"창의적인 일을 하는 방송 PD들은 B형이 많습니다. B형은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강한 다혈질입니다. 한 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이라 할 수 있죠."

한 예능 PD는 방송 PD중 B형이 많다는 소신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PD들의 혈액형이 대부분 B형이라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교양 PD인 필자 주변에는 AB형이 월등히 많다. 신 아무개 부국장. 장 아무개 실장, 송 아무개 부장, 최 아무개 PD, 이 아무개 PD, 보도국에 파견된 박 아무개 PD, 필자 등이 공교롭게도 모두 AB형이다. '분석적이고 비판의식이 강하지만 냉정한 합리주의자 AB형'이라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하기에 유리할 수 있다.

방송 PD엔 (  )형이 많다? 직접 확인해 보니...

ⓒ 다은출판사


사실 필자는 혈액형과 성격 혹은 혈액형과 직업의 상관관계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고 얼마 전 이런 논지로 책도 썼다.(관련 기사: 교과서에 실린 '혈액형 이야기'... B형 남자 제멋대로?) 그러나 주변에서 반론이 만만치 않다. 제법 과학적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PD들도 "100%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70%는…"하고 말끝을 흐린다. 그 근거는 자신들의 체험이다. 사실, 직접 체험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이론은 없다.

PD는 전문직이다. 만약 PD들의 혈액형에서 특성이 나타난다면,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에 대한 유력한 근거가 대두되는 셈이다. 그래서 11월 10일부터 15일까지 SBS PD협회 소속 PD들의 혈액형을 조사해보았다. 연수자와 계열회사 파견자등을 뺀 200여 명의 회원 중 절반 가량인 103명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저는 방송사에 들어와서 점점 더 소심하게 변한 A형 같은 B형입니다. 직장생활하는 동안 주변 눈치 보면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이지만 뒤끝은 없는 O형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PD로서는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전 천재성이 있는 AB형입니다. ^ ^ 근데 AB형이 천재 아니면 바보 맞나요?"

회신을 한 PD들은 대부분 혈액형에 관심이 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의견들을 갖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오기현 SBS PD가 조사한 SBS PD협회 소속 PD 103명의 혈액형 분포

오기현 SBS PD가 조사한 SBS PD협회 소속 PD 103명의 혈액형 분포 ⓒ 이미나


결과는 어떨까? 103명 중 A형 33명, B형 22명, O형 26명, AB형 22명으로 나왔다. (참고로 SBS는 최근 예능과 교양을 통합했으므로 아쉽게도 예능PD와 교양PD를 구분하여 통계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A형이 가장 많다. 그건 특이한 수치는 아니다. 그런데 B형 22명과 AB형 22명이 동수로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대한적십자사에서 헌혈자 256만 명을 조사해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한국인 중 A형은 34.2%, B형은 27%, O형은 27.3%, 그리고 AB형은 11.5%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103명 중 대략 A형은 35명, B형은 28명, O형은 28명, AB형은 12명이어야 한다. 그런데 B형은 평균치보다 6명이 적고, AB형은 10명이 더 많다.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AB형은 방송 PD가 되는데 매우 유리하고 B형은 약간 불리하다.

과연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실제로 특정 성격이나 특정 직업에 특정 혈액형이 많을 수는 있다. 혈액형과 성격의 과학적 관련성은 없다. 혈액형은 적혈구에 붙어있는 당사슬(sugar chain)이라는 물질이 결정한다. 그런데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 뇌세포 속에는 피가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혈액형과 성격은 관련이 없다.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 사실은 이것 때문이다

혈관 속을 흐르는 적혈구 혈액형은 도넛 모양의 적혈구 표면에 있는 당사슬에 따라 결정된다.

▲ 혈관 속을 흐르는 적혈구 혈액형은 도넛 모양의 적혈구 표면에 있는 당사슬에 따라 결정된다. ⓒ SBS


그렇다면 특정 성격이나 특정 직업에 특정 혈액형이 많은 것은 왜 그럴까? 심리적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제멋대로'라는 믿음이 퍼져 있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혈액형별 성격을 따라간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암시인데 전문용어로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고 한다. 일본의 심리학자인 오무라 마사오 교수는 'FBI효과'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좀 복잡한 내용이다).

A형이 원래 소심하지는 않지만 다들 그렇다고 하니 소심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B형 남자가 원래 자유분방한 바람둥이가 아니지만 남들이 그렇다고들 하니 조심하지 않고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O형이 정치인의 기질이라고 하니까 O형인 사람들은 정치에 쉽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실제 정치인이 된다. 다른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특정 혈액형에 특정성격이 많고 특정 혈액형에 특정 직업이 많은 현상이 나타난다.

둘째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오인하기 때문에 특정 성격이나 특정 직업에 특정 혈액형이 많아 보인다. 일종의 착각인데, 세차하고 나면 꼭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세차하고 나면 비가 오는 경우도 있지만, 비가 안 오는 경우도 있다. 또 세차를 하지 않았는데 비가 오는 경우도 있고,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즉 '세차하면 비가 온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이런 네 가지 경우를 다 고려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편한 대로 '세차하고 나서 비 온 경우'만 기억한다. 이걸 '확인편파(confirmation bias)'라고 한다.

소심한 A형을 만났을 때는 '아! 저 사람 원래 소심한 A형이지'라고 기억하고, 소심하지 않은 A형을 만나면 예외로 여기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제멋대로이고 O형은 고집불통이고 AB형은 이기적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B형 PD를 만나면 '원래 PD는 B형이 많아'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혈액형의 PD를 보면 '예외군!'하고 흘려버린다는 논리다.

대답은 '마음먹기 달렸다'다

 SBS스페셜 <혈액형의 진실>(연출 오기현)의 한 장면

SBS스페셜 <혈액형의 진실>(연출 오기현)의 한 장면 ⓒ SBS


그렇더라도 AB형의 PD가 평균치의 두 배가 나온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명확히 통계의 함정이다. 즉 통계수치가 신뢰를 얻으려면 모집단의 규모가 커야 한다. 그런데 100명의 PD를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3000명이나 되는 국내 PD들 중 AB형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SBS PD들 가운데 AB형의 비율이 한국 평균치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는 말은 타당성이 있다. 단언컨대, 한국 PD 전체의 혈액형을 조사하면 전술한 대한적십자사 혈액형 비율처럼 나올 것이다. 모집단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의도한 혈액형 비율을 얻을 수 있다. 넓히면 넓힐수록 한국의 혈액형비율 평균치에 근접한다.

따라서 혈액형과 성격, 혈액형과 직업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학적 관련성은 없지만, 종종 그런 경우가 나타나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AB형이 PD가 되는데 유리할까? 대답은 '마음먹기 달렸다'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PD저널 인터넷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혈액형 자기충족적 예언 확인편파 SB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