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고시아시옹(Négociation), '협상'이라는 뜻의 불어. 지난 2004년, 제57회 칸 국제 영화제의 개막식을 장식한 단어다. 그해 개막식이 열린 5월 12일,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칸을 찾은 쿠엔틴 타렌티노 감독이 '비바 시네마'를 외치며 팔레 데 페스티벌로 입장한 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은막의 스타들과 나란히 레드카펫을 밟은 12인의 '낯선' 손님들이 펼쳐 보인 단어. 야회복 차림으로 팔레 데 페스티벌의 계단에 선 12인의 등에는 '네고시아시옹'의 철자가 각각 한 자씩 붙어 있었다. '협상'!

제57회 칸 영화제에 초청된 '공연 노동자 시위'

전 해인 2003년 7월 1일, 프랑스 정부의 공연 예술 비정규직 노동자(이하 공연 노동자) 실업수당 지급제도 변경 발표는 프랑스 사회를 즉시 혼란에 빠뜨렸다. 그해 여름, 실업수당 제도 변경에 항의하는 공연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으로 태반의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됐으며,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름 축제 중 하나인 아비뇽 연극축제가 무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스 공영 방송 저녁 뉴스 시간에 방송국 스튜디오를 점령한 공연 노동자들은 생방송으로 그들의 요구를 전파하는가 하면, 2004년 4월 19일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몰리에르 시상식 도중 파업을 단행해 행사가 파행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이튿날, 공연 노동자들은 '칸 영화제 저지 위원회'를 결성해 영화제 '보이콧'을 선언했다.

고심 끝에 칸 영화제 측은 영화제 개막 하루 전인 5월 11일, 극적인 타협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4000여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 노동자를 대표하는 12인이 팔레 데 페스티벌의 레드카펫 위에서 그들의 요구를 알리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협상'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칸 영화제에 등장할 수 있었다.

'사건'은 이어진 15일 전개됐다. 영화 <화씨 9/11>을 가지고 칸을 방문한 할리우드의 악동 마이클 무어와 프랑스의 대표적인 대안세계주의 운동가 조제 보베가 공연 노동자들의 투쟁에 합류한 것이다. 조제 보베는 여기서 "문화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 투쟁'을 위해 칸에 왔다"고 밝혔고, "노동은 권리이며, 최저 임금은 인권"이라는 구호로 입을 연 마이클 무어는 "프랑스 공연 노동자들의 투쟁은 고통 받는 전 세계 모든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투쟁"이라고 말했다. 그 해 <화씨 9/11>은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우리 영화 <올드 보이>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에 연대한 프랑스 문화예술인들

제 59회 칸 국제영화제 이틀째인 지난 18일, 영화제 주 행사장 앞 광장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호소하는 최민식과 프랑스 좌파 언론의 상징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제 59회 칸 국제영화제 이틀째인 지난 18일, 영화제 주 행사장 앞 광장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호소하는 최민식과 프랑스 좌파 언론의 상징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제 59회 칸 국제영화제 이틀째인 지난 2006년 5월18일, 영화제 주 행사장 앞 광장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호소하는 최민식과 프랑스 좌파 언론의 상징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 박영신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것이 희극이어야 했다면, 그 희극의 주인공은 배우 최민식이었다. <올드 보이>로 박찬욱 감독과 함께 그해 칸의 화려한 레드카펫을 밟은 바 있는 최민식은 2006년 제 59회 칸 영화제에 다시 초대됐다. 아니 스스로를 초대했다. 이번에 그와 함께 한 작품은 한미 FTA 선결 조건으로 위기에 빠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이었다.

개막식이 열린 5월 17일, 개막작으로 선정된 미국 블록버스터의 상징 <다빈치 코드>(론 하워드)의 제작사인 콜롬비아 영화사 직원 1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독과 배우들이 팔레 데 페스티벌의 레드카펫을 밟던 바로 그 순간, 스크린쿼터 사수 원정 투쟁단(이하 원정단)과 함께 최민식의 침묵 시위는 시작됐다. 그들은 그러나 외롭지 않았다. 잠시 후, 레드카펫을 밟아야 할 성장의 프랑스 문화예술인들이 하나둘 모여든 것이다.

이들은 전 세계 70여 개국 배우 노조를 아우르는 국제 배우노조연맹의 카트린 알메라스 부회장,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산하 공연예술노조의 끌로드 미셸 위원장, 칸 영화제 감독 주간을 전담하는 영화감독협회(SRF)의 뤽 르클레르 뒤 사브롱 부회장을 비롯한 20여 명의 프랑스 예술인들이었다. 개막식에 초청된 부산국제영화제(BIFF) 김동호 당시 집행위원장의 모습도 보였다.

원정단이 나눠주는 티셔츠를 입고 자발적으로 플래카드를 든 이들은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끌로드 미셸 위원장은 "올해 칸 영화제의 개막작은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며, 이것은 칸 영화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아름다운 투쟁"이라 격찬했다.

칸 영화제 이사회,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 지지' 공식 선언

18일 칸 영화제 주 행사장 앞 광장에서 기습 1인시위를 시도한 최민식이 경찰에 제지를 받자 시민들이 그를 에워싸 호위했다. 18일 칸 영화제 주 행사장 앞 광장에서 기습 1인시위를 시도한 최민식이 경찰에 제지를 받자 시민들이 그를 에워싸 호위했다.

2006년 5월 18일 칸 영화제 주 행사장 앞 광장에서 기습 1인시위를 시도한 최민식이 경찰에 제지를 받자 시민들이 그를 에워싸 호위했다. ⓒ 박영신


영화제 이틀 째인 18일에는 돌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최민식이 스크린쿼터 축소에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영화제 주 행사관 광장에 펼치는 순간 경찰이 제지한 것이다. 원정단과 경찰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구경꾼이 몰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최민식은 전 세계 언론의 카메라에 포위되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최민식", "올드 보이"라는 수군거림도 잠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서 "브라보" 소리가 터져나왔다.

2002년 <취화선>(임권택, 감독상)과 2004년 <올드 보이>로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칸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는 최민식은 무명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의 TV를 시작으로 프랑스, 영국 등 각국의 언론이 최민식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는 동안 조용히 그의 옆을 지킨 시민들은 손에 손에 든 촛불로 칸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여기저기 연락을 해대던 경찰은 영화제 측이 최민식의 시위를 허가했음을 알려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시위는 이어졌다. 감독주간에 <괴물>을 소개한 봉준호 감독, 주목할 만한 시선에 <용서받지 못한 자>를 선보인 윤종빈 감독들이 최민식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1일, 칸 영화제 최고 의결 기구인 이사회는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을 지지하는 공식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질 자콥 조직위원장과 프랑스 문화장관을 비롯한 감독, 배우, 제작자, 배급자 대표 등 20여 명이 모인 이날 연례 이사회에서 한국의 스크린쿼터 지지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이다. 칸 영화제는 영화만이 아닌, 사회 현실을 통해서도 관객과 만나고 있었다.

지난 6일, 제 1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성대한 막을 올렸다. 그리고 8일, 제5차 희망버스가 출발한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씨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276일째 되는 날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4일에는 박찬욱, 임순례, 변영주 감독과 배우 김여진, 권병길 씨를 비롯한 국내 영화인 1543명이 희망버스와 김진숙 지도위원에 지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영화는 우리의 욕망과 일치하는 세상 가능하게 하는 시선"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와 영화인들이 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희망버스 지지 한국영화인 276인 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며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와 영화인들이 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희망버스 지지 한국영화인 276인 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며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 유성호


이 자리에서 "영화인은 전부터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영화로 말해 왔다", "김진숙이 올라가 있는 한진 85호 크레인의 아픈 풍경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최고의 영화임을 감히 선언한다"고 영화인들은 역설했다.

"올해 칸 영화제의 개막작은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며, 이것은 칸 영화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아름다운 투쟁이다."

2006년 칸에서 시작된 프랑스 공연예술노조 끌로드 미셸 위원장의 선언과 2011년 1543 영화인 선언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위해 프랑스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인 것과 같이 올해 희망버스와 김진숙을 지켜내기 위해 국내 영화인들도 모인다. 제5차 희망버스가 전국 각지에서 출발하는 8일 오후 4시,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해운대에서는 별도로 영화인 희망버스가 시동을 걸게 된다.

'영화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흔히 말한다. 구체적으로 장-뤽 고다르는 1963년 작 <경멸>에서 자막이 아닌 육성 타이틀을 통해 "영화는 우리의 욕망과 일치하는 세상을 우리의 시선으로 대체한다고 앙드레 바쟁은 말했다"고 했다. 고다르가 인용한 바쟁의 문장은 그러나 원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미셸 무를레와 가진 <라 쁠륌>지 대담에서 바쟁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우리의 욕망과 일치하는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이다."

2011년 10월 현재, 우리의 욕망은 어쩌면 85호 크레인일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희망버스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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