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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도 다니지 않았고 아직 다리는 병의 진행은 막았지만 절룩거리며 다니는 상태여서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하루하루가 무료 했습니다. 한의사는 치료 도중 내게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공부며 책읽기며 너무 신경을 쓰는 일은 안하는 게 좋습니다. 다리에 이상이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온 부분도 있어요. 사람들은 정신과 신체를 따로 생각하지만 정신과 신체는 언제나 함께 갑니다."

나는 한의사의 말도 있었지만 순수문학 작가를 꿈꾸었던 걸 포기했습니다. 난 천재도 아니고 그저 일기를 쓰다보니 글을 써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 문학수업을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다리가 빨리 나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취직해서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들며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 다리가 빨리 정상으로 돌아와야 했고 운동은 계속 해야했기 때문에 탁구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내게 탁구를 가르쳤던 한준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대학을 다니지 않고 음식점을 했던 엄마를 도우며 탁구 가르치는 등의 소일을 하는 아이였습니다. 곱슬머리에 외꺼플 눈매가 은근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탁구를 치는 도중 간간히 삐죽히 웃었는데 그 아이가 웃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한준이는 잘 생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성적 매력을 풍기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탁구를 어느 정도 배웠을 무렵입니다.

"나하고 차 한 잔 할래요?"
"그래요."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흔쾌히 허락했고 우린 차를 마시고 그 또래에서 할 수 있는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 아이의 성격은 조금 모가 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가 나 있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의 질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고 우린 어느 새 이성간의 감정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준이가 우리 집 앞 길목에서 내게 전화를 했습니다.

"난데 잠깐 나올 수 있어?"
"밤에는 엄마가 못나가게 하는데 잠깐이면 돼?

어느새 한준이와 나는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고 한준이는 집 앞 길목에서 발로 뭔가 툭툭 차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읽던 책을 손에 든 채 그대로 집 앞 길목으로 나갔습니다. 한준이가 나를 보자 다짜고짜 말했습니다. 

"아유 엄마 식당에 열 받게 하는 자식이 하나 들어 왔는데 내가 상을 뒤엎고 그 자식을 실컷 두둘겨 패주고 싶었지만 너를 생각하면서 꾹 참았다."
"잘했어, 사람들하고  싸우지마."
"알았어, 잠깐이라도 보고싶어서 왔어, 그만 들어가봐."
"너도 잘가 혹시라도 술 마시지 말고."

돌아서서 가던 한준이가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되돌아왔어?"라고 물을 틈도 없이 한준이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내게 깊고 진한 키스를 했습니다. '툭'하고 책이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짜르르한 기운이 흘렀습니다. 이성과의 진짜 키스는 처음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모두 지나다니는 길에서 우리는 길고 긴 키스를 했습니다. 다행히 밤이라 그리 많은 사람이 지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키스가 끝나자 이번에는 그가 이마에 한번 더 입맞춤을 하고는 바로 뒤돌아서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한동안 넋이 나간 듯 서있었습니다. 방안에 들어와서 몸을 옹그리고 앉았지만 짜릿하게 느껴졌던 그 감정이 내 온몸을 휘감고 또 휘감은 상태였습니다.

불장난
 불장난
ⓒ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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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꿈 같았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는 한준이가 조금 술에 취해 있는 상태에서 또 집 앞으로 나를 찾아 왔습니다.

"나랑 딱 한 잔만 하자."
"밤중이라 오래는 못 있어, 멀리 가지도 못하고."
"요 앞에서 한 잔 만 해. 학현아 부탁이다."

나는 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하는 생각에 집에서 가까운 술집에 한준이를 따라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가 술집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좁은 찻집처럼 생긴 술집 안은 몇 개의 탁자와 의자가 기차의자처럼 배열되어 있었고 플라스틱 잎파리가 벽을 조악하게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한준이는 이미 한 차례 술을 한 탓이었는지 조금 더 취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내 발은 항상 차가웠는데 발이 시려워 왔습니다.

"나 발 시려워, 이제 그만 가자."

한준이는 갑자기 양말을 벗더니 내 발을 자기 무릎에 얹어놓고는 한짝씩 자기 양말을  신겨주었습니다.

"난 이제 널 위해 살거야. 제발 아프지 좀 마라. 그리고 오늘 밤 우린 선을 넘는거야. 알았지? 여기서 마시고 나가서 오늘 들어가지 말자."

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나 그만 갈게 다음에 만나."

내가 일어서자 한준이가 나를 억지로 끌어다 앉혔습니다. 한준이는 이미 많이 취한 상태여서 나를 막무가내로 붙잡았습니다. 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 하고 카운터에서 종이와 볼펜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집으로 전화를 해달라는 글을 적어 카운터로 갔다 주었습니다. 다행히 형부가 휴가를 나와 우리 집에 온 날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형부와 언니가 한걸음에 달려 왔습니다.

"형부!"

나는 형부를 보자 울먹이며 일어섰고 한준이가 또 나를 붙잡아 앉혔습니다. 형부가 그런 한준이에게 한방의 펀치를 날리자 한준이가 그대로 휘청하며 의자위에 주저 앉았고 형부는 내 손을 붙잡고 집 쪽으로 마구 뛰었습니다.

"토껴! 토껴!"

형부는 아마 내가 납치라도 된 것 인줄 알았나봅니다. 언니가 볼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토끼긴 뭘 토껴! 재 우리집 다 알아. 학현이 너 밤중에 술집을 왜 따라갔어."

형부도 나를 질책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자면서 몇 번이고 가위에 눌렸습니다. 꿈 속에서 어떤 남자가 나를 억지로 강탈하려는 꿈을 꾸었고 그날부터 나는 밤이면 꼼짝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한준이가 찾아올까봐 겁이 났습니다. 다행히 한준이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남자들이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을 넘자'던 한준이의 말이 끔찍하게 자꾸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리자 언니가 '자기 최면술'이란 책을 사다 주었습니다. 끄덕하면 심장이 두근거리며 바깥출입을 꺼리던 내게 그 책은 조금씩 나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리 옆집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준이가 우편물을 배달하러 왔습니다. 우연히 창밖을 내다봤는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방위복을 입은 한준이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보고 삐죽히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한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지만 그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서 가버렸습니다. 그는 방위병이 되어 있었고 그 후로 나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두려움도 사라져 갔습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아이와 불장난을 한 것입니다. 사랑도 아니었고 탈출구가 없던 내게 한준이는 한때 나의 탈출구였고 나를 어른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첫 키스를 한 아이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불장난, #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 #학현이,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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