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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지역 신문들.
 영국 지역 신문들.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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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많은 한국의 언론사, 관련 단체, 기관 및 학자들이 영국을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소속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마치 순례하듯 BBC에 가고 <가디언>에 간다. 오죽하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관들에서 오는 한국 언론 관련 인사들의 방문 계획이 너무 많아, BBC의 경우 유사한 한국 방문자들의 일정을 임의로 합쳐놓아서 동시에 방문한 한국 언론 관계자들이 현지에서 어색한 만남을 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기자가 약 3년 동안 현지에서 동행하여 방문한 사례만 보더라도 BBC와 <가디언>이 일정에서 빠진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는 방문 목적과 상관없이 BBC나 <가디언>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보고 나머지 일정은 관광을 즐기다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해외 선진 산업 방문이라는 대부분의 타이틀에 걸맞게 이들은 과연 영국 언론에서 많은 것을 배워 가는가? 혹은 얻어 가지 말아야 할 것을 오히려 배워가진 않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기자는 지난 6월 12일부터 18일까지 영국의 지역 신문을 둘러보고 지역 신문 발전 방안을 찾기 위해 방문한 한국언론진흥재단 산하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팀과 동행하여 영국 지역 신문과 한국 언론인들의 해외 연수 실태를 취재했다.

이들의 일정에도 BBC와 <가디언>은 포함되어 있었으나 다행히도 지역 신문을 책임지는 일꾼들답게 대표적인 영국 지역 신문인 <맨체스터 이브닝>이나 <레스터 머큐리>를 방문하고 조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배우지 말았으면 하는 내용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영국 지역 신문, 여론 다양성의 부재와 독점

"저희 지역에 경쟁은 없습니다. 대부분 한 지역에 하나의 지배적인 지역 신문사만 있기 때문이죠. 그나마 경쟁이라고 하면 지역 BBC 방송 정도죠."

<레스터 머큐리>의 키스 퍼치(Kieth Perch) 편집장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인구 29만 명의 중소 도시 레스터에서 하루 6만 부가 판매되는 일간지인 <레스터 머큐리>에서 요일별 섹션 신문, 소지역별 무료 주간지 <메일>, 월간 잡지 <라이프>에다 모기업에서 발행하는 무료 일간지 <메트로>까지 책임지는 이 지역 신문사의 주인 역시 거대 미디어 집단인 데일리 메일 미디어 그룹이다. 즉, 영국 미디어의 현실에서 지역 신문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점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들은 트리니티 미러 그룹, 노스클리프 미디어 그룹과 같은 전국적 미디어 재벌의 계열사에 속해 있다. 건강한 대안적 지역 신문은 자리 잡기 힘든 현실이다. 

"작년까지 운영하던 TV와 라디오 채널을 매각했습니다. 신문과 온라인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향후에 다시 통합해서 운영할 계획입니다."

이안 우드(Ian Wood) <맨체스터 이브닝> 편집국장 대행은 인터뷰에서 향후 다매체 운영 계획을 밝혔다. <맨체스터 이브닝>은 박지성이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소식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문이다. 이 신문 역시 작년에 거대 미디어 재벌인 트리니티 미러 그룹에 인수되었다. 그전까지 모기업인 가디언 미디어 그룹은 이 지역 신문과 연계한 <채널 엠(Channel M)>이라는 비교적 독립적인 성향의 지역 기반 방송 채널을 운영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 가디언 미디어 그룹은 지속된 경영난을 견디지 못한 채 <맨체스터 이브닝>을 매각했고, 이를 인수한 트리니티 측에서는 일종의 대안 언론 성향이었던 <채널 엠>을 곧바로 없애버렸다.

하지만 온·오프라인 매체 융합에 심혈을 기울이는 트리니티 미러 그룹 측에서도 전체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는 역시 방송국도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현재 진행 중인 법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 보수당 중심의 정권 교체 이후 변화하고 있는 정책 흐름은 한마디로 지역 미디어 교차 소유 제한 조항의 철폐다. 우리의 종편과 상당 부분 유사한 정책이다. 즉, 현재 지역에서 시장 점유율이 50% 이상인 신문사는 그 지역의 아날로그 라디오 방송과 채널3 TV 방송을 소유하지 못하지만, 이 규제가 없어지면 자금이 풍부한 트리니티 미러 그룹 계열사 같은 지역 언론사가 모든 매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초우량 지역 독점 미디어(ultra-local media)'가 되는 것이다. 현재 영국의 유력 지역 신문사들은 물론 미디어 규제 기관인 오프콤(Ofcom)에서도 지역 신문사들의 경영난이라는 실제적 명분과 미디어 업계의 경쟁력 강화라는 당위적 명분 속에서 규제 철폐 안을 준비하고 있다.

키스 퍼치 <레스터 머큐리> 편집장.
 키스 퍼치 <레스터 머큐리> 편집장.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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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신문 상업화의 핵심은 선정성, 폭력성, 획일성

"영국 지역 신문은 1면이 거의 범죄 혹은 선정적 내용이라 <선(Sun)>지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영국이 많은 스포츠의 발생지라서 그런지 스포츠 기사가 엄청 많네요."
"영국 지역 신문의 사진은 전부 인물 사진이네요. 다른 건 전혀 없어요."
"영국 지역 신문은 우리의 생활 정보지와 결합한 것 같아요."

이번 연수에 참여한 현직 지방 언론사 기자, 편집국장, 대표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왜 당신들은 인물 사진과 기사에만 포커스를 맞추나?"라는 한 지역 신문사 편집국장의 질문에 키스 퍼치 편집장과 이안 우드 편집장 대행은 똑같이 "아니 그것 말고 뭐가 중요하죠?"라며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것 말고 중요한 게 너무나 많은 우리의 현실이 이상한 걸까? 

사실 영국 정부는 이전의 전국 단위, 글로벌 단위의 미디어 우선 정책을 통해 BBC를 글로벌 콘텐츠 공급자로 키워냈고 성공적인 공영방송 시스템과 방송 포맷 산업 등 글로벌 콘텐츠 제작 역량을 갖추게 되었지만, 동시에 지역 미디어 특히 지역 신문의 고유한 특징과 개성이 급속히 사라지게 된 것이 현실이다. 최근 들어서야 '로컬리즘'의 부활이란 기치 아래 정부 주도로 지역성과 지역의 의제를 찾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된 상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지역 신문의 뉴스 의제는 더욱 선정적·폭력적으로 변했고 어느 신문이든 스포츠나 인물 기사 위주의 단순함과 획일성을 보인다. 이는 자본에 의한 독점의 현실과 과도한 상업성에서 비롯된 부정적 영향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선정적·폭력적 인물 이야기와 스포츠 소식에 전체 신문의 포커스를 맞추는 영국 지역 신문의 질을,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과연 높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이안 우드 <맨체스터 이브닝> 편집장 대행.
 이안 우드 <맨체스터 이브닝> 편집장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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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감축과 구조 조정이 부른 엄청난 노동 강도

이번에 방문한 <맨체스터 이브닝>과 <레스터 머큐리>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최근 1~2년 사이에 전체의 50%가 넘는 인력을 감원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두 신문사가 만들어내는 매체의 양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이는 방문한 한국 언론인들도 가장 놀란 부분이었다.

<맨체스터 이브닝>은 54명의 취재·편집 인력으로 주 6일, 하루 64면(타블로이드 판형)의 일간지를 비롯해 소지역 커뮤니티 주간 신문, <비즈니스 위크>라는 40페이지 분량 주간지 등 총 25개의 매체를 생산해낸다. <레스터 머큐리>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이안 우드 <맨체스터 이브닝> 편집장 대행은 '백팩(backpack) 저널리즘'(배낭에 카메라, 전화기, 노트북 등 모든 장비를 갖추어 모든 기자가 온·오프라인 및 동영상을 위한 모든 취재를 한꺼번에 하는 것)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기자의 하드 워킹이 뉴미디어 시대의 기본임을 강조했다. 

"처음에 회사에서 '백팩 저널리즘'을 요구했을 때 기자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어요. 기자들은 전화기만 챙기지 다른 장비들은 잊어버리기 일쑤였죠. 하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핸드폰으로 모든 게 다 되니 이젠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죠."

이안 우드 편집장 대행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자들의 순응 이면에 있는 주요한 원인은 최근 단행된 대규모 구조 조정과 노동 강도의 압박으로 보였다. <레스터 머큐리> 방문 때 "이런 높은 노동 강도 속에 노조는 있는가?"라고 묻자 키스 퍼치 편집장은 이렇게 답했다. "물론 노조는 있지만 근래에 한 번도 모이거나 활동하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뉴스룸을 밀착형으로 바꾸어 의사소통 구조를 강화하고 노동 강도를 높인 <맨체스터 이브닝> 신문사 내부.
 뉴스룸을 밀착형으로 바꾸어 의사소통 구조를 강화하고 노동 강도를 높인 <맨체스터 이브닝> 신문사 내부.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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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지역 신문, 한국에서 먼저 만들어 가야

비록 전반적인 신문 산업의 위기 속에서 현재 우리의 지역 신문들도 많은 어려움과 한계에 직면해 있지만 구조적·대안적·실험적인 면에서 영미권의 지역 신문들에서 찾기 힘든 희망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거대 미디어 재벌에서 구조적으로 독립적이고 지역성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에게는 힘든 지역 신문끼리 유기적 결합을 통해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백팩 저널리즘'을 대신할 새로운 복합적 기자의 모습 등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번 연수에 참가한 <순천 시민의 신문> 허석 대표가 지적하듯이 영미권의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상당히 위험하다.

이는 영국 미디어를 보러 오는 수많은 방문자들에게 꼭 필요한 준비 자세이기도 하다. 건강한 지역 신문 혹은 언론에 대한 방안은 건강한 인재들에게 달려 있으므로, 건강한 일꾼들을 토대로 우리가 먼저 새로운 희망의 길 찾기를 해서 전 세계 미디어를 깜짝 놀라게 하길 기대한다.


태그:#지역신문, #영국, #미디어, #연수,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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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문화연구자. 지역의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함. 10여년 전 유학시절 <오마이뉴스> 영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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