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만나는 일 못지않게 떠나보내는 일 역시 중요한 것은 야구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선수의 인생이란 길어도 이십 년을 넘기 어려운 것이고, 팬의 기억이란 한 사람의 삶보다도 길게 이어져 한 번도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선수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타깝게 떠나보낸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은 그가 선물한 수많은 즐거움과 놀라움과 희열의 순간마저 모두 덮어버리는 우울한 장막이 돼 버린다.

예컨대 김재박과 이만수, 그리고 최동원과 김시진을 생각해볼 때 그렇다. 한국 프로야구 스타계보의 맨 윗줄에 가장 굵은 글씨로 기록될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은퇴식을 치르지 못한 채 쫓겨나듯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는 점이다. 70년대 생의 야구소년들, 각자 유격수를, 포수를, 그리고 투수를 꿈꾸게 했던 영광의 세월을 보낸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늘 한 줄기의 그늘이 스쳐가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한 선수를 떠나보내기 위해 3만 관중이 모여들다

1997년 4월 29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트윈스와의 베어스 홈경기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표가 모두 팔려나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 뒤로 다시 베어스의 평일 홈경기가 매진되는 데는 무려 12년 4개월이 걸릴 만큼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오직 그날 통산 76승을 기록했을 뿐인 '그저 그런' 한 노장투수의 은퇴식이 열린다는 이유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파였다. 기록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박철순이라는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박철순 그곳에서 이기고, 그곳에서 지고, 그곳에서 쓰러졌다가, 그곳에서 일어섰다. 그는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내려와 목숨 같던 유니폼을 벗었다.

▲ 박철순 그곳에서 이기고, 그곳에서 지고, 그곳에서 쓰러졌다가, 그곳에서 일어섰다. 그는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내려와 목숨 같던 유니폼을 벗었다. ⓒ 두산 베어스


"그날 원래 은퇴경기를 하기로 했어. 그래서 내가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딱 1이닝을 던지고 내려와서 은퇴식을 하기로 했는데···그 때 상대팀 타자들이 와서 그러더라고. 그냥 가운데로 던지시면 알아서 스윙 세 개 하고 물러가겠다고. 은퇴경기 마지막 등판에서 딱 연속으로 삼진 세 개를 잡고 내려가는 거지. 그런데…그거 못하겠더라고. 내가 어떻게 지키고 버텨온 마운드인데, 거기서 장난질 치는 것 같고. 그래서 도저히 등판할 수가 없다고, 그냥 은퇴식만 하게 해달라고 했어." (박철순)

배명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1년을 보낼 때까지 체격이 좋고 공이 빠른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그래서 전국무대에서 거둔 성적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박철순이 투수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공군 팀 '성무'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독한 근성의 사나이 이종도와 부대끼며 '드디어 야구를 레크리에이션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당대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명투수 남우식에게 과외교습을 받으며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구대성 국가대표팀 최강의 에이스. 그리고 최강의 선발과 최강의 마무리를 동시에 감당했던 최강의 투수.

▲ 구대성 국가대표팀 최강의 에이스. 그리고 최강의 선발과 최강의 마무리를 동시에 감당했던 최강의 투수. ⓒ 한화 이글스


그래서 군대 말년에 출전한 1978년 백호기 결승에서 연세대 최동원과 완투맞대결을 벌여 2대0으로 승리하며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기로 국가대표로 발탁돼 쿠바전 최초의 승리투수가 되고 다시 미국무대로 진출하는 역사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대중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 것은 역시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이었다. 그 해 서울연고 선수들을 2대1로 나누어 가지게 된 MBC청룡과 OB베어스는 두 팀만의 드래프트를 벌였고, 청룡이 먼저 김재박과 이해창을 지명한 뒤 OB베어스가 찍은 것이 박철순이었다. 박철순은 그렇게 OB 유니폼을 입었고, 마침 서울에서 열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위해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 등이 프로진출을 유보당했던 그 해 마운드의 독보적인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는 빠른 공을 주무기로 삼는 투수였지만, 간간히 너클볼과 팜볼 같이 생소한 궤적과 속도로 날아가는 신무기를 선보이며 상대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해 팀당 80경기가 치러지는 가운데 그는 22연승을 포함해 24승을 기록했고, 그런 압도적인 활약으로서 팀에 역사적인 첫 우승컵을 안기게 된다.

원년 에이스, 그리고 '불사조' 신화

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이 야구팬들에게 각별하게 기억된 것은 오히려 그 뒤의 일들 때문이었다. 심각한 허리부상에도 불구하고 국소마취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등판해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후유증이 이듬해부터 시작됐다. 다시 부상부위에 직선타를 맞은 불운까지 겹치며 그는 병상과 연습장을 오가는 기나긴 세월을 시작하게 된다.

게다가 오랜 투병생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겹친 그를 돕기 위해 구단 프런트가 주선한 광고 촬영에 나섰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사고까지 당하면서부터는 연습장에서보다 더 긴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하는 신세로 몰린다.

김현욱 쌍방울과 삼성의 에이스였으며, 무엇보다도 중간계투의 가치를 한 단계 격상시킨 주인공.

▲ 김현욱 쌍방울과 삼성의 에이스였으며, 무엇보다도 중간계투의 가치를 한 단계 격상시킨 주인공. ⓒ 삼성 라이온즈

"나한테 남아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고, 그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유니폼 입고 마운드에 올라가서 공을 던지다가 죽어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박철순이라는 사람이, 뭐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또 대단한 투수도 아니었거든. 그저 단 하나, 그렇게 부상을 당하고 그랬는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야구팬들이 대견하게 봐주시고 기억해주시는 건데…정말 고마운 일이지." (박철순)

허리, 발목, 허리, 발목.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었던 부상의 늪에서 헤어 나오는 데만 십여 년이 걸렸다. 그 사이 연봉은 줄었고, 병원비는 쌓였으며, 그 사이 억세진 두 아들을 지키고 키우는 것 역시 박철순 혼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재기에 성공해 최고령 승리투수, 최고령 완투승, 최고령 완봉승 따위 기록들을 차례로 깨나가며 90년대 내내 7승에서 9승을 기록하는 듬직한 허리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결국 1995년에는 팀의 두 번째 우승에 작은 디딤돌 노릇을 해내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가다 문득 멈춰 섰을 때, 프로원년을 함께 시작했던 이들 중 아직 현역으로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그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1997년, 그는 15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응원팀에 상관없이 3만 명의 눈물어린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고, 무릎을 꿇은 뒤, 투수판에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고 싶었어. 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곳이고, 내가 쓰러진 곳이고. 거기서 이기기도 했고, 지기도 했고, 실수도 했고. 한 번은 전날 비가 쏟아지니까 내일 경기 안 한다고 새벽까지 술을 퍼먹었는데 갑자기 날이 개서 비틀비틀 올라갔다가 마운드에서 토한 적도 있었지. 허허허. 거기서 물러나면서 정말 입을 맞추고 싶었어."(박철순)

최고의 업적을 쌓은 선수도 아니며, 가장 훌륭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대단히 살뜰하게 후배들을 끌고 당겨준 선배도 아니었던 박철순. 하지만 그런 그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삶이 그렇듯 야구 역시 단순하지 않은 굴곡의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떠나는 투수들

1997년 4월의 그날 이후, 투수판에 입을 맞추는 것은 투수들의 은퇴식에서 빠지지 않는 순서로 자리 잡았다. 부산야구의 짧은 봄날을 이끌었던 주형광이 그랬고, 중간계투로서 20승 신화를 남긴 김현욱이 그랬으며, 또한 200승 신화의 송진우와 국가대표팀 사상 최강의 에이스 구대성도 그랬다.

그들은 자신의 팔꿈치와 어깨와 허리와 무릎의 뼛가루를 쌓고 땀과 눈물로 다져온 땅 위에 마지막으로 입 맞추고 눈물 떨구며 옷을 벗었고, 그렇게 이어가고 물려온 마운드는 야구팬들이 마음으로 지키는 성지가 되고 있다.

주형광 부산야구의 봄날을 이끌었던 에이스. 선수인생에는 행운도 있고 비운도 있었지만, 마운드에 입을 맞출 기회를 가졌던 것은 같은 팀 출신의 투수들 중 행운에 속했다.

▲ 주형광 부산야구의 봄날을 이끌었던 에이스. 선수인생에는 행운도 있고 비운도 있었지만, 마운드에 입을 맞출 기회를 가졌던 것은 같은 팀 출신의 투수들 중 행운에 속했다. ⓒ 롯데 자이언츠


만남의 기억은 헤어질 때까지 이어지지만, 헤어지는 순간의 기억은 잊혀질 때까지 계속된다. 야구가 계속되는 한 야구팬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오늘의 야구팬들이 베이브 루스와 사첼 페이지를 기억하듯 내일의 야구팬 역시 이종범과 손민한을 이야기할 것이다. 헤어짐의 순간에 좀 더 세심해야 할 이유를 구단들이 좀 더 깊이 새겨주었으면 하는 이유다.

송진우 200승과 3000이닝의 금자탑을 세운 한국프로야구의 역사.

▲ 송진우 200승과 3000이닝의 금자탑을 세운 한국프로야구의 역사. ⓒ 한화 이글스


박철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