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나는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떨어져나가도록 던졌고, 성준은 1년을 절치부심 칼을 간 끝에 팀을 3관왕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가 됐어요. 하지만 노준이 발목이 부러진 것 말고는 그 해 사람들에게 기억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고교야구의 인기가 최정점을 찍던 시절의 주역 중 한 사람인 김건우가 술 한 잔 걸친 자리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했던 이야기다.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천재와 범재, 1인자와 2인자, 혹은 스타와 조연의 처지에 관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말이기도 했다.

1981년, 고교야구의 절정기 

박노준과 김건우 1980년과 1981년, 선린상고는 투타 양면에서 고교무대 최고수준의 기량을자랑했던 박노준과 김건우을 앞세워 가장 강하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팀으로 군림했다.(좌 : 박노준, 우: 김건우)

▲ 박노준과 김건우 1980년과 1981년, 선린상고는 투타 양면에서 고교무대 최고수준의 기량을자랑했던 박노준과 김건우을 앞세워 가장 강하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팀으로 군림했다.(좌 : 박노준, 우: 김건우) ⓒ 한국야구위원회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1981년, 한국야구의 메이저무대였던 고교야구 최고의 팀은 단연 선린상고였다. 선린상고의 쌍두마차 박노준과 김건우는 2학년생이던 1980년에 이미 한 해 선배들인 선동열(광주일고)과 이상군(천안북일고)을 때려 부수며 전국적인 선수로 자리잡고 있었다.

같은 해 경북고의 성준, 진흥고의 김정수 등이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선린상고 듀오와는 이름값에서 한 단계의 격차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중에서도 대중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박노준이었다.

박노준은 리틀야구 시절부터 나가는 대회마다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었던 '천재'였다. 그리고 고교 2학년이던 1980년에는 이미 초고교급으로 불리던 대형투수 선동열과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맞대결해 타자로서는 홈런 포함 3안타 3타점을 뺏는가 하면 투수로서도 5이닝 2안타 1실점으로 광주일고 강타선을 잠재우는 KO승을 거두기도 한 1인자였다.

게다가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에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눌러썼던 모자와 헬멧이 풍기던 과묵한 카리스마가 '독일병정'이라는 멋진 별명을 붙게 했다. 여고생들이 매일 선린상고 담장 안으로 종이비행기 편지를 수백 통씩이나 날려대는 진풍경을 연출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현대사 최초의 아이돌 스타였다는 이야기까지 듣는 박노준은 모든 동갑내기 선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목표였으며,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질투심을 들쑤시는 원흉이기도 했다. 그것은 각자의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 위해 반드시 박노준을 쓰러뜨려야 했던 성준뿐만 아니라, 늘 뒤지지 않은 활약으로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도 늘 초점 흐린 배경으로만 남겨지던 김건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로지 박노준 하나만을 떠올리며 절치부심했던 성준은 그 해 경북고에 전국대회 3관왕의 영광을 안길 수 있었고, 뒤늦게 투수훈련을 시작한 김건우는 그 해 7월 미국에서 열린 제 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끝내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한 선린상고는 불운의 절정이었던 1981년 8월 26일, 그 모든 영광들을 한 편의 비극에 쓸려보내고 말았다.

그날 봉황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던 박노준의 스파이크가 덜 마른 그라운드에 박히면서 발목이 겹겹이 부러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미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떨어져나간 상태로 전날 완투하는 무리를 감수했던 김건우는 다시 마운드에 올라 투혼을 던졌고, 성준이 이끌던 경북고는 '박노준 없는 선린상고에게마저 밀리는 대참극'을 피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국 역전에 성공하면서 우승컵과 최우수선수 트로피를 손에 쥔 경북고의 성준은 '박노준을 꺾겠다는 일념으로 땀흘려왔다'고 비장한 소감을 남겼고, 이튿날 우승컵을 들고 박노준의 병실을 찾아 우정의 악수를 건네는 풋풋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미 TV 카메라와 야구팬들의 모든 관심은 결국 경북고가 우승을 확정 짓고 3관왕에 오른 동대문야구장 대신 박노준이 긴급수술을 받고 누워
있던 병원으로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 고교야구의 후폭풍, 1986년의 프로야구

그 1981년의 고교야구세대들이 프로무대로 진입한 것이 바로 1986년이었다. 그 해 대학을 졸업한 박노준, 김건우, 성준, 김정수가 각각 OB, MBC, 삼성, 해태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한 발 뒤에 늘어서있던 김태원, 차동철, 한희민 등이 역시 MBC, 해태, 빙그레 유니폼을 입었다. 게다가 한 해 전에 입단한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가 그제서야 1군 무대에 진입하면서 사실상 함께 데뷔하게 된 이상군이 있었고, 상무를 거치느라 두 해를 거른 윤학길도 있었다.

가을까치 김정수 1981년, 서울에 박노준과 김건우가 있고 대구에 성준이 있다면 광주에는 김정수가 있었다. 역대 최강의 좌완 강속구 투수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그보다 더 강한 모습을 보인 투수는 없었다.

▲ 가을까치 김정수 1981년, 서울에 박노준과 김건우가 있고 대구에 성준이 있다면 광주에는 김정수가 있었다. 역대 최강의 좌완 강속구 투수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그보다 더 강한 모습을 보인 투수는 없었다. ⓒ 기아 타이거즈

물론 '최대어'는 박노준이었다. 그 박노준을 잡기 위해 서울 팀 MBC와 OB가 신경전과 협상을 벌인 끝에도 합의를 보지 못하면서 처음으로 동전던지기를 해야 했다. 또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명권을 확보한 OB는 '선동열급 대우'를 요구하던 박노준과 계약조건을 놓고 피 말리는 기싸움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예상을 완전히 깨는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 누적된 무리와 부상, 그리고 프로입단 후에도 투수와 타자를 놓고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던 여파로 박노준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기나긴 침체의 시간을 시작해야 했던 것. 반면 늘 그에게 밀려왔던 2인자들이 앞 다투어 스포츠신문의 1면을 뒤덮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타자로 방향을 잡았다가 해외전지훈련장에서 준비해 간 배트를 모두 부러뜨리는 바람에 '그냥 놀 수는 없어서' 투구연습을 하다가 코치의 눈에 띈 김건우는 역대 데뷔시즌 최다승인 18승을 기록하며 당당히 신인왕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김건우와 고교시절에는 숙적으로, 대학시절에는 절친한 동반자로 맺어졌던 성준이 15승으로 뒤를 이었고, 이상군이 승수는 12에 불과했지만 혼자 243.1이닝을 던지며 3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꼴찌팀 빙그레의 대들보 노릇을 해 찬사를 받았다.

아마추어 시절의 이름값으로는 결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았던 윤학길 역시 1승에 머물며 박노준과 함께 '뜻밖에 부진한 거물들' 범주에 묶였지만, 9승을 올리며 딱 기대만큼의 가능성을 입증한 김정수와 한희민도 있었다. 어쨌든 그 해 그렇게 수준급 이상의 투수들이 프로무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2인자들의 투혼승부, 김신부와 차동철의 15이닝 완봉 맞대결

하지만 그 해 신인투수들이 보여준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은, 7월 27일 인천 도원야구장이었다. 그 날 청보 핀토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내세운 선발투수는 각각 김신부와 차동철이었고, 두 사람 모두 그 해 한국프로야구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이었다.

차동철은 치열했던 1981년 광주일고를 이끌고 늘 전국무대에서 일정한 성적을 내던 에이스급 투수였다. 하지만 팀 내에서는 한 해 선배 선동열과 비교되고, 전국무대에서는 박노준, 김건우, 성준 같은 동기생들과 비교되며 조명받지 못했던 처지였다. 건국대를 거쳐 입단한 그 해에도 같은 광주 출신의 김정수에게 밀리며 큰 기대를 받지는 못 하는 처지였다.

반면 김신부는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를 거친 재일교포였다. 한국만큼이나 대단한 고교야구 열풍이 불었던 1981년 일본에서 김신부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고시엔 우승을 이끌며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긴테스에 전체 1번으로 지명되었던 김의명과 관서지역에서 오랜 라이벌관계를 맺어온 투수. 김신부 역시 난카이에 1차로 지명됐고 김의명과 나란히 2억 원에 가까운(6천만 엔) 초고액의 계약금을 요구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여 파란을 일으켰던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결국 4년간 1군 무대에서 단 한 경기도 경험하지 못한 채 방출된 뒤 한국으로 건너왔고, 그 시점에서는 대학에서 4년을 보낸 차동철과 똑같은 23세의 동갑이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건 일본에서건 '프로야구 1군 무대'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처지였다.

그 두 투수가 만났던 7월 27일이 그 해를 상징한다고 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그 날 두 투수는 나란히 15이닝을 던졌고, 두 사람 모두 단 한 점의 실점도 하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역사상 전무후무한 '15이닝 완봉 맞대결 무승부경기'였다. 차동철의 기록은 10피안타 6탈삼진이었고 김신부의 기록은 8피안타 10탈삼진이었다.

김신부는 원래 정통파 스타일에서 사이드암을 거쳐 언더핸드로 전향한 스타일로서, 직구도 시속 130킬로미터를 간신히 오르락내리락하던 '감속구 투수'였다. 그리고 차동철 역시 빠르기보다는 변화구로 승부하는 축이었는데, 특히 투심 스타일의 직구와 포크볼 같은 '떨어지는 공'을 섞어 던지면서 헛스윙을 유도하는 투수였다.

나름대로 강했지만 더 강한 이들때문에 묻혔던 선수들. 그리고 힘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우회하는 스타일로 버텨냈던 투수들. 그 두 사람은 그 해 나란히 10승을 올리며 기대 이상으로 활약했고, 또 각자의 팀에서 버려진 먼 훗날 LG 트윈스에서 잠시 한솥밥을 먹는 인연으로 재회하기도 했다.

한국야구의 첫 번째 세대교체, 그리고 업그레이드

성준 박노준을 꺾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1981년에 경북고에 전국대회 우승컵 3개를 바치며 우뚝 섰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교시절의 성준은 박노준의 길고 짙은 그늘에 가려진 2인자일 뿐이다.

▲ 성준 박노준을 꺾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1981년에 경북고에 전국대회 우승컵 3개를 바치며 우뚝 섰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교시절의 성준은 박노준의 길고 짙은 그늘에 가려진 2인자일 뿐이다. ⓒ 삼성 라이온즈

세대의 구분이 꼭 10년이나 10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사람이 나고 성장하는 것이 꼭 미리 정한 일정대로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1986년, 한국프로야구에는 유례 없이 좋은 투수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들은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축투수로 자리를 잡으며 그동안 괴물같은 선수 한 명의 출현에 좌지우지되며 널뛰기하던 각 팀의 안정적인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에 더해 지난 해 후반기에야 첫선을 보였던 2년차 선동열이 무려 262.2이닝을 소화하면서도 0.99라는 기이한 숫자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시즌을 압도했다.

역시 실업팀을 거쳐 뒤늦게 프로생활을 시작했던 2년차 투수 김용수도 그 해 35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며 마무리투수의 시대를 안착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섯 해째를 맞은 한국프로야구가 한 번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경험했고, 또한 뚜렷한 '업그레이드'를 완성했다.

더구나 박노준과 윤학길이라는 선두주자들이 출발선에 걸려 넘어졌음에도, 김건우와 성준, 혹은 김신부와 차동철 같은 2인자 3인자들이 활개쳐 날아오르며 그려내던 싱싱했던 풍경. 바로 그런 것들이 1986년을 더욱 멋진 해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김은식 김신부 차동철 박노준 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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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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