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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에서 가장 안 치우는 교수연구실
ⓒ 김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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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깨끗한 곳만 찍으라'며 취재에 응했지만...

"세상에 무슨 쪽 다 팔려고?"

'아마도 전국에서 제일 지저분한 교수연구실이 세명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소방방재학과 김준경 교수 연구실에 들이닥치자 그가 한 말이었다. 그는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취재에 불응하더니, 마음이 조금 열린 듯 개그콘서트식 유머를 날렸다.

"소는 누가 키우냐? 그럴 시간에 소나 키우지."
"저희는 이게 공부예요. 교수님 제발~"

취재진이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김 교수는 주섬주섬 주변을 치우기 시작했다. 황급히 카메라를 들이대자, "잠깐 앉으라"고 하더니 "좀 깨끗한 곳만 찍으라"며 마지못해 취재에 응했다.

그런데 의자 위에도 책들이 널려 있어 앉을 데도 없었고, 도대체 깨끗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연구실 바닥에는 책과 보고서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고, 한쪽 벽의 책장에는 책과 연구자료들이 앞뒤도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액자는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방치돼 있었고, 벽에 걸린 달력은 7월에 멈춰 있었다. 이곳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조차도 질서를 잃어버린 혼돈 그 자체였다.
  
   책과 연구자료로 어지러운 연구실.
 책과 연구자료로 어지러운 연구실.
ⓒ 송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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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전에 다른 교수나 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니 김 교수가 게으른 성품을 가졌거나 학문 세계가 '혼돈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을 뿐 아니라 전공분야에서도 권위를 인정받고, 학생들에게도 인기 있는 교수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혼돈과 효율'의 연구공간이 궁금해 취재에 나섰다.

김 교수는 서울대학교 자원공학과를 졸업하고 유공(현 SK)에서 근무하면서 석유시추 광풍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도 석유기술자가 되려고 미국 애리조나 대학원에 들어갔으나 방법론이 같은 지질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당시 한국에는 지진을 전공한 사람도 거의 없고 일자리도 없을 듯해 장래가 걱정이었지만, 새로운 분야를 전공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도 원자력발전소가 잇달아 건설되면서 내진설계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원자력연구소를 거쳐 93년 세명대로 오게 됐다. 지금은 소방방재학과에서 지진방재 분야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 교수님 연구실 정도라면 지진 강도로 몇 도 상황인가요?
"진도5만 돼도 강진인데, 이렇게 되면 그 동네 비워야지. 아, 이거 참, 자랑이 아닌데…."

- 연구실 자료 위치는 다 기억하시나요?
"엉망인 것 같죠? 나는 다 알아요. 이거는 수업 관련, 이건 지진 관련, 요 칸은 나름대로 다 정리를 해놓은 거예요. 한번은 대학원생이 내 방에 들어와 '교수님 한 번 치울까요'라고 하기에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 없는 동안 지가 한번 폼 잡고 치웠어. 그 바람에 자료 찾느라 일 년 정도 헷갈렸어.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거야."

- 본인이 직접 정리를 하시면 되잖아요? 언제부터 이렇게 됐나요?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들어오는 자료들이 너무 많다보니까. 수업도 하지만 외부 연구도 많이 하다 보니 들어오는 자료들을 빨리빨리 정리해야 하는데…. 내가 정리하는 속도보다 들어오는 양이 많다 보니 어느 날 쌓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마! (무릎을 탁 치며) 습관이 되어버렸어. 한 칠팔 년 전부터 좀 심해졌을 거예요. 2, 3년마다 겨울방학 되면 한 번씩 정리는 합니다. 이번 겨울에 정리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들이닥쳤네. 내가 정리를 한다고 하는데 남들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고 합디다."

"너무 빨리 버리는 습관도 문제"

세명대 소방방재학과 김준경 교수.
 세명대 소방방재학과 김준경 교수.
ⓒ 송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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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교수님이나 손님이 연구실에 찾아오면 뭐라고 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앉을 데가 없다고 좀 투덜거렸는데 요즘은 잘 찾아오지를 않죠, 와도 서서 얘기해야 하니까. 내가 다른 교수연구실을 찾아가거나 실험실 또는 과사무실 같은 데 자주 찾아가죠. 내가 만남의 주도권을 갖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과 자료들은 최근에 작업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자료와 책들은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것들이라며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라고 '변명'했다.

- 그래도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좀 정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참 이런 게 있어요. 버리고나면 아쉬울 때가 많다고. 누구는 1, 2년 안 본 자료는 버리라고 하던데. 찾기는 어려워도 자료가 어딘가에 있는 거하고 없는 거는 큰 차이가 있어요. 내가 다시 그 자료를 만들려고 하면 무지무지 시간이 많이 걸려요. 옛날 있는 자료에다 요즘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하면 훨씬 좋은 자료가 되죠. 완전 맨바닥에서 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노력만큼 그게 안 나온다고. 그래서 계속 쌓아 놓는 거지, 언젠가는 쓰일까 봐. 우리는 조금만 낡아도 우선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습관이 있어요. 시간이 흘러서 가치가 살아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속이 정돈돼 있으면 그게 '효율적'

-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정리정돈이란 뭔가요?
"뭐라고 할까? 마음속이 정돈되어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요? 남 보기에 창피하기는 하지만 나한테는 효율적인 측면도 있어요. 정리하는 데 들이는 시간도 어쩌면 낭비 아니겠어요. 지나치게 자기 방이나 차를 깨끗하게 닦는 이들이 오히려 사물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자위도 해봅니다. 너무 깔끔한 사람은 접근하기도 힘들고요. 뒤죽박죽 마구 쌓여있어 혼돈스러워 보이지만 나름대로 질서가 있습니다."

- '혼돈 속의 질서', 뭐 이런 건가요?
"그렇지요. 우선 이렇게 자료가 쌓여있지만 최근에 사용한 자료는 맨 위쪽에 있기 마련입니다. 한 이삼 년 된 것은 맨 밑쪽을 뒤지면 나오겠지요. 건드리면 혼돈이 생깁니다. 실은 헛소리고. 근데 앞으로는 고치도록 노력할게요."

취재진은 '자기만의 질서를 구축한' 그의 방에서 나온 뒤 "편안한 느낌을 주는 분" "참 열심히 사는 분'이라는 인상을 서로 얘기했다. 그리고 우리가 질서라고 말하는 영역이 더 혼돈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 '불편한 질서'를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세명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에서 만드는 단비뉴스( 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세명대, #김준경, #연구실, #더러운,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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