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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트태권V 영화 포스터
 로보트태권V 영화 포스터
1.

훈은 마우스피스를 악물고 글러브를 부딪쳤다. 공이 울렸다. 코치가 뒤에서 뭐라고 떠들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상대는 훈보다 체구가 작았지만 매우 민첩하고 로우킥이 위력적이었다. 근접하여 날리는 니킥이나 팔굽치기도 치명적이다. 녀석에게 접근할 기회를 주면 안 된다.

훈은 두더지처럼 파고들어오는 상대를 향해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운 좋게도 안면의 한 가운데를 강타했다. 상대가 휘청거리는 사이 훈의 강력한 하이킥이 작렬했다. 쿵-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태국에서 온 무에타이 전사가 무너졌다. 주심이 케이오 선언을 하자 관중의 함성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기 잘 봤다. 너 많이 세졌더구나."
"원래 세요."

훈은 락커룸으로 찾아온 부친을 퉁명스럽게 대했다. 언제나 일로 바쁜 아버지였다. 경기장에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훈은 그가 반갑지 않고 불편했다.

"난 네가 이종격투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저도 몰랐어요."
"태권도 다시 해 볼 생각은 없냐. 내가 국기원에 있는 사람들을 좀 안다."
"됐어요."

한 때는 국가대표가 꿈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발차기를 할 수 있으니 당연히 국가대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순진한 착각이었다. 현실을 깨닫게 해준 사람은 훈에게 처음 태권도를 가르쳤던 홍 사범이었다.

"태권도 해서 성공하려면 경희대나 용인대를 나와야 돼. 안되면 한체대나 경원대라도 나와야지... 너처럼 상고 나온 놈은 대통령은 해도 국가대표는 못 한다."

처음에는 홍 사범의 충고를 믿지 않았다.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는 동네 체육관 사범이 무얼 알겠나 싶었다. 겨루기에서는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훈이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경기에서는 고비마다 패했다. 납득할 수 없는 판정이 되풀이되었다. 결국 국가대표로 선발된 용인대 선수를 경기장 밖에서 돌려차기로 실신시켰다. 유력한 과학자인 부친의 도움으로 징역살이는 면했지만 훈은 태권도 계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운동하기 싫으면 공무원이라도 해라. 너도 이제 자리 잡아야지."

부친은 하얀 플라스틱 명함을 내밀었다. 직함에 '태권브이 개발연구원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단체였다. 부친은 6개월 전만 해도 포항공대 전임교수였다.

"언제 옮기셨어요? 여기 뭐하는 데예요?"
"좀 됐어. 행정안전부 산하 연구기관인데 대우가 괜찮다. 내가 힘써줄 테니 이력서 한 장 들고 와라. 지금 우리 연구원에서 개방형 임용제로 조종사를 구하는 중이다."
"조종사요? 연구원에서 무슨 조종사를 써요?"
"태권브이 조종사를 구하는 거다."
"태권브이가 뭐예요?"
"일본의 마징가를 순수 국산기술로 만든 거다. 물론 마징가를 베낀 거는 아니고, 순수 우리기술로 재창조한 거지. 자세한 거는 알 거 없고, 태권브이 조종사는 별정직이 아니라 정식 6급 공무원으로 채용된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중앙공무원으로 6급이 어디냐. 냉큼 이력서 내라."
"흥, 그 딴 말단 공무원직에 관심 없어요. 전 이종격투기 선수가 훨씬 좋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훈은 이미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격투기 선수로서 한계를 느끼고 있는 훈이었다. 훈이 활동하고 있는 '배틀링'은 무제한 격투기로 중한 부상이 많은데다 물불을 안 가리는 동남아 파이터들이 계속 들어와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팔꿈치에 머리를 가격당한 중국 선수가 사망하기도 했다.

"다음 주에 식사나 같이 하자. 그럼 간다."
"가세요."

훈은 부친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부친은 훈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왜소한 체구의 백발노인으로 늙어 버렸다. 1라운드에서 얻어맞은 옆구리가 쑤시기 시작하자 훈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찡그렸다. 

발차기 하는 로보트태권브이 피규어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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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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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훈은 부친이 시킨 대로 최대한 허리를 숙이면서 공손하게 악수했다. 부친의 직장에는 연구원들이 가장 많았지만 행정직 공무원도 상당수 있었다. 훈은 사무관 열일곱 명, 서기관 다섯 명, 부이사관 두 명, 이사관 한 명에게 정중하게 첫 인사를 드렸다. 비록 연구원장인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들어오긴 했어도, 임기가 있는 연구원장을 믿기보다는 행정직 공무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부친은 몇 번이나 강조한 바 있었다.

훈은 자신과 직급이 같은 주사들 여덟 명과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주사보 다섯 명, 그보다 낮은 서기 아홉 명과 가장 말단의 서기보 두 명에게도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기술직은 무엇보다 행정직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게 부친의 지론이었다.

훈은 명색이 조종사였지만 연구원에 들어온 뒤로 메카닉이나 조종기술에 대해 거의 배운 게 없었다. 그것은 연구원의 교육과정이 조종실무보다는 법령 숙지나 행정 업무를 익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부친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태권브이는 조종사의 뇌파로 움직이기 때문에 따로 조종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다. 태권도 품세 연습이나 가끔 해두렴. 태권도는 세계최초의 무술로봇이라서 조종사의 무술실력을 그대로 반영한다. 너 정도 태권도 실력이면 조종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거다. 하지만 관련 법령이랑 규정은 부지런히 익혀야 할 거야. 행정 절차도 눈여겨 두고. 그런 게 실전에서 꼭 필요하게 된단다."

훈은 법령 지식이나 행정 절차가 어떻게 실전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 동안 이론교육과 모의조종 실습을 거친 훈은 드디어 태권브이가 있는 거대 격납고를 방문할 수 있었다. 보안이 무척 철저해서 격납고 입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가족관계증명서와 인감증명서, 통장사본, 성병 검사결과를 제출해야 했다. 여직원은 서류를 받아서 한 번 읽어보고는 휴지통에 처넣었다. 그리고 수십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여기는 1급 국가보안시설입니다. 디카나 핸드폰 촬영을 절대 금합니다. 음식물을 반입하셔도 안 되구요, 큰 소리로 떠드시면 안 됩니다. 태권브이 다리에 기념낙서를 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집니다. 태권브이 다리 밑에서 애인과 응응을 하거나 지퍼 내리고 쉬를 하시면 공무원 신분에서 파면되고 10년간 공직에 근무할 수 없습니다. 태권브이의 생김새나 조종방법을 친구한테 얘기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제비호에 탑승하실 때는 앞에 놓인 데톨로 손을 씻으시고 조종간을 잡으세요."



훈은 여직원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자신이 탑승하게 될 거대로봇을 올려다보았다. 전고 오십육 미터에 무게 일천사백톤, 출력 팔백구십오만 킬로와트의 웅장한 전투기계가 머나먼 곳에 시선을 두고 과묵하게 서 있었다.

"조종석 내부에 있는 방향제나 각티슈는 연구원의 재산이므로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내릴 때는 마지막 주행거리를 조종석 오른쪽에 매달린 장부에 기록해주시고요, 톨게이트 영수증은 꼭 챙겨주세요."

훈은 여직원의 잔소리를 견딜 수 없어 무시하고 제비호로 향했다. 총무팀에서 받아온 열쇠고리에서 '제비호'라는 견출지가 붙은 열쇠를 찾아 조종석 뚜껑에 달린 자물쇠에 넣었다. '철컥'하고 자물쇠가 열렸다. 훈은 조종석 뚜껑을 열고 몸을 구겨 넣었다. 뚜껑이 닫히자 방금 전 잔소리를 퍼붓던 여직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대국, 성숙한 세계국가! 창조적 실용주의로 선진일류국가를 만들겠습니다."

조종간을 당기자 제비호가 푸슈슉-방귀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조종석 내부가 시뮬레이터와 많이 달라서 훈이 당혹감을 느끼는 사이에 제비호는 태권브이의 정수리 속으로 쿵 하고 불시착했다. 밑바닥이 쑥 열리면서 훈은 태권브이의 조종석으로 떨어졌다. 쿠션이 전혀 없어서 발목을 다칠 뻔 했지만 낙법을 익혀 둔 덕에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태권브이 조종석에는 뇌파 감지기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조종 장치가 없었지만 한쪽 구석에 삼성 싱크마스터 모니터와 매직스테이션 데스크탑 PC가 눈에 띄었다.

3.

훈이 정신을 집중해서 태권브이와 싱크로나이징을 하는데 브리츠 스피커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훈씨 나오시오. 김훈씨."
"네. 말씀하세요."
"아 나 행안부 김유연 사무관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 그래. 지금 태권브이 안에 있나?"
"네. 지금 조종실습 중입니다."
"그렇구만. 김훈씨, 지금 당장 여의도로 출격하쇼."
"네?"
"지금 여의도에 거대 로봇이 출현해서 금융감독원 건물을 공격하고 있어."

행정 사무관의 명령을 직접 받아본 적이 없는 훈이었다. 당황한 가운데 어떻게든 태권브이를 격납고 밖으로 빼내야겠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훈의 뇌파와 몸동작을 스캔한 태권브이는 격납고 천장을 뚫고 하늘 높이 뛰어 올랐다. 중력의 법칙에 따라 다시 땅으로 떨어진 태권브이는 목동에 있는 SBS 주차장을 박살냈다. 태권브이의 발에 맞아 부서진 검정색 밴에서 소녀 댄스그룹이 기어 나와 태권브이에게 쌍욕을 해댔다. 멀리서 금감원 건물을 두 동강 내려는 거대 로봇이 보였다. 드럼통을 이어 붙인 것처럼 투박한 생김새였다.

훈과 완전히 싱크로나이즈된 태권브이는 훈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움직였다. 태권브이는 다시 점프해서 선유도공원에 착지했다가 한강물에 뛰어들었다. 수심이 생각보다 얕아 강물이 태권브이의 발목 정도 밖에 오지 않았다. 태권브이는 당산철교를 뛰어 넘어 국회의사당 천정 위로 엎어졌다. 반구형의 돔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스피커에서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김훈!"
"네 사무관님."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모션 밸런스가 무너지는 바람에…."
"이 호로 xx야. 지금 정기국회중인데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져서 나경원 의원님 머리모양이 망가졌어! 국회 사무처에서 우리한테 전화해서 지랄지랄 아주 난리가 났다고! 너 제정신이냐?"

훈은 짜증이 나서 사무관의 통신을 끊어버렸다. 태권브이가 국회에서 버둥대는 동안 거대 로봇은 금감원 건물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거대 로봇의 금속 주먹은 콘크리트 건물을 퍽퍽 두부처럼 부숴버렸다. 태권브이는 의사당로를 따라 내달려 여의도공원을 훌쩍 뛰어 넘은 뒤 거대 로봇에 몸을 던졌다. 쾅 하는 굉음소리와 함께 로봇 두 대가 하나 금융 프라자 앞 대로변에 쓰러졌다. 로봇끼리의 육박전이 이어졌다. 훈은 팔꿈치로 상대 로봇의 정수리를 가격한 뒤 무릎으로 복부를 공격했다. 거대 로봇의 주먹이 태권브이의 안면을 후려치자 충격이 그대로 훈에게 전해졌다. 정신이 몽롱해지는데 스피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김훈 조종사. 나 차관인데."
"네 차관님!"
"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지금 바쁜가?"
"네, 지금 미확인 로봇이 금감원 직원들을 학살하고 있어서요."
"알았네. 용건만 말하지. 지금 청와대를 통해서 태권도협회장님의 말씀이 들어왔는데, 태권브이의 동작이 우리나라 국기인 태권도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지적이야. 이종격투기를 연상시킨다고 협회장께서 상당히 불쾌해 하셨다는군. 알다시피 협회장님은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우신 분이니까, 자네가 협조를 좀 해줘야겠네."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주춤서기 자세에서 정권지르기 몇 번만 해주게나."

태권브이는 사학연금회관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거대 로봇의 몸체를 향해 정권지르기를 했다. 훈은 초등학교 때 배운 대로 조종석 안에서 기합도 넣었다.

"얍! 얍! 태권! 태권! 태권도! 태권도!"

삼연속 지르기 두 번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로봇이 태권브이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했다. 태권브이는 건너편 커피빈에 머리를 처박고 넘어졌다.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훈아 괜찮은 게냐?"
"아버지! 아직까진 괜찮아요. 근데 저 녀석 굉장히 단단해요."
"단단할 수밖에. 그 거대 로봇은 카프 박사가 만든 초합금 로봇이다."
"카프? 그 사람 논문조작으로 망신당했던 사람 아닌가요?"
"맞다. 이번에 대주주와 짜고 코스닥에서 주가조작을 하다가 금감원에 적발됐다더라. 사건을 무마하려고 아예 금감원을 없애버릴 생각인가보다."
"아버지… 이미 반쯤은 없어진 거 같아요."
"훈아! 그 로봇의 몸체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아다만티움 합금이다. 태권브이의 주먹이나 발차기로는 파괴할 수 없어."
"그럼 어떡해야 해요?"
"광자력 빔을 사용해라."

2007년 1월 8일 촬영한 서울시청앞 광장에 전시중인 로보트 태권브이(V) 모형
 2007년 1월 8일 촬영한 서울시청앞 광장에 전시중인 로보트 태권브이(V) 모형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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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은 광자력 연구소의 윤박사가 자바늄에서 추출했다는 궁극의 파괴광선을 가동하기 위해 레버를 당겼다. 경고음이 울리면서 레버가 중간에서 걸렸다.
"어? 아버지! 레버가 움직이지 않아요!"
"훈아, 광자력 빔은 너무 위험한 살상무기이기 때문에 장관님의 사용승인을 득해야 한다. 어서 행정전산망에 접속해서 결재를 올려라."
"아…."

훈은 그제야 법령지식이나 행정절차가 실전에서 도움이 된다는 부친의 충고가 떠올랐다. 조종석 구석에 있는 매직스테이션 PC를 부팅하고 기안기를 띄웠다. 훈은 문서규정에 따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결재문서를 꾸몄다.

문서제목 : 태권브이 궁극 무기 사용승인에 관한 건

1. 관련근거 : 태권브이 운영 규정 제 17조(광자력 빔의 사용승인)
2. 00일 00시 현재 여의도 소재 금융감독원을 습격한 초합금 로봇의 파괴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태권브이 흉부의 브이-마크를 통해 광자력 빔을 조사(照査)코자 하오니 신속한 승인을 바랍니다.
   가. 조사대상 : 카프 박사의 거대 로봇
   나. 파괴대상 : 아다만티움 합금 몸체
   다. 조사량 : 최대출력으로 1분간
   라. 조사자 : 조종사 김훈

훈은 장관까지 결재선을 지정하고 결재를 상신했다. 담당자들이 훈의 전투실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결재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개발연구원의 과장, 부장, 실장은 재빨리 결재를 해줬고 연구원장인 부친도 일사천리로 결재를 해서 전자문서가 행정안전부로 넘어갔다. 하지만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중앙공무원들은 결재가 늦었다. 비상정책과장에서 삼십분을 지체하더니 재난대책국장에서 딱 걸려서 좀처럼 결재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카프 박사의 초합금 로봇은 태권브이의 두개골을 손날로 내리쳐 그래픽 카드를 고장 내고, 사타구니를 걷어차서 폐윤활유를 배출하는 전립파이프를 망가뜨렸다. 훈은 특공무술과 유술과 합기도와 무에타이와 레슬링과 까뽀에라로 초합금 로봇의 급소와 관절을 골고루 공격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훈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태권브이 연구개발원 김훈 조종사입니다. 우종석 국장님좀 부탁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지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훈은 긴박한 현장을 설명하고 조속한 결재를 부탁했다. 국장은 점심시간이 길어져서 그랬다며 사람 좋게 웃고는 결재를 해주었다. 그 사이에 카프 박사의 초합금 로봇은 태권브이의 오른쪽 무릎관절을 파괴했다. 균형을 잃은 태권브이는 넘어지면서 한화증권 빌딩을 붙잡았다. 태권브이의 무게에 못이긴 빌딩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유리창 수백장이 부서지고 빌딩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빌딩은 벌채되는 열대우림의 나무처럼 서서히 쓰러지더니 굉음을 내며 콘크리트 먼지 속으로 파묻혔다. 빌딩 잔해 속에 누워 있던 태권브이는 초합금 로봇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려진 뒤 유화증권 빌딩으로 던져졌다. 유화증권 빌딩을 초토화시킨 태권브이는 다시 초합금 로봇에게 다리를 잡혀 빙빙 회전하다가 신한증권빌딩 쪽으로 날아갔다. 태권브이의 몸체와 충돌하며 건물 반쪽이 날아가 버렸다. 기세가 오른 초합금 로봇은 서울증권 빌딩을 뽑아서 태권브이에게 집어던졌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서울증권 빌딩을 바라보며 훈은 생각했다.

"대한민국 개국 이래 최대의 금융위기구나."

김주영 박사는 초조한 목소리로 장관 비서를 닦달했다.

"아, 어서 결재를 해주란 말이오!"
"지금 장관님 해외 출장 가셨다니까요. 다음 주에나 오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모든 결재는 대결로 하거나 차관 전결로 하라고 공지가 나갔는데…."
"안 계시니까 아가씨가 대신 하란 말이야! 내 아들 죽으면 아가씨가 책임 질 거야?"
"잠시 계세요. 제가 비서실장님한테 여쭤보고 올게요."

김 박사는 끊었던 담배를 십년 만에 물었다.

태권브이는 잔해 속에 누워있고 훈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초합금 로봇은 도시 전체를 파괴할 셈인지 원효대교를 뜯어내고 아파트와 상업용 빌딩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중이었다. 스피커에서 다시 사람목소리가 들려왔다.

"훈아! 정신 차려라! 어서 태권브이를 일으켜!"
"아버지, 승산이 없어요."
"훈아! 장관 결재가 떨어졌다. 어서 광자력 빔을 작동시켜!"

훈은 레버에 손을 얹었다.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레버가 스르르 아래로 당겨졌다.

4.

김주영 박사는 초합금 로봇이 광자력 빔을 맞아 파괴된 모습을 커다란 액자에 담아 원장실 한쪽에 걸어두었다. 빔에 녹아내린 로봇은 어린아이가 먹다 남긴 초콜릿 아이스크림 덩어리 같았다. 훈은 머리에 감은 붕대 안쪽이 간지러워 연신 긁었다.

"아버지, 보기 흉한 사진을 뭐 하러 걸어놔요?"
"홍보용으로 걸어둔 거다. 나중에 국정감사 받으면 의원들하고 기자들한테 보여줄 거다."
"참, 부조종사 뽑는다더니, 어떻게 됐어요?"
"그렇지 않아도 소개시켜 주려고 불렀다. 영희씨, 들어와요."

체격이 좋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자애 하나가 원장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윤영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게 인사하며 손을 내미는 영희에게 훈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김주영 박사는 영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영희양이 얼굴은 예쁘게 생겼지만 태권도 실력은 너한테 지지 않을 거다. 아무렴, 국가대표 출신이거든."

훈은 살짝 비위가 상했다.

"나도 잘 부탁한다. 학교는 어디 나왔나?"
"네. 경희대학교 00학번입니다."

훈의 질투심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9년에 SF동호회 사이트, 환상문학 웹진 '거울' 등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태권브이, #SF,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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