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는 개인의 것이 아닌 만인의 것,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랴.'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 영화사 아침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이 조정에 올린 한 장의 비밀보고서의 서두.

80년대 한 때 조선시대 민중운동사를 학습하던 운동권에서 회자됐던 그 유명한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담은 이 보고서는 이후 1,000여명의 선비가 역모에 관련되어 처형 되거나 유배되면서 조선중기를 핏빛으로 뒤흔들게 한 기축옥사의 도화선이 됩니다.

주인공은 다산 정약용에 앞서 주권재민론을 내세운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입니다. 그는 만민평등의 계모임인 대동계를 조직해 조선을 바꾸려했던 혁명가이자, 이몽학의 난과 홍경래의 난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등 조선시대 민중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혁명적 사상가였습니다.

그 정여립이 죽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년째인 1596년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난 변란의 실제인물 '이몽학'을 스크린으로 각색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4월 28일 관객들을 찾았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만나 팩션을 만들다

영화는 임진왜란 직전 정여립 역모사건과 대동계의 난을 배경으로 출발합니다. 같은 제목의 박흥용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사실과 허구를 조합한 팩션물인지라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큽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이몽학(차승원)이 대동계를 이끌고 한양으로 입성하고, 황정학 (황정민) 일행 역시 텅 빈 도성에서 그와 조우하며 마지막 일전을 치르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 따르면 실제 이몽학은 조선 왕족의 피가 흐르는 서얼출신으로 왜란 직후 비밀결사 동갑계를 조직해 혁명을 꾀하던 중 충청도 홍산에서 승속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이른바 '이몽학의 난'은 청양 등 여섯 고을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하다 홍주에서 몽학이 믿었던 부하의 손에 참수당한 뒤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따라서 영화에서처럼 이몽학이 정여립과 함께 대동계에서 혁명을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몽학이 호서일원에서 오랜 기간 유랑생활을 했고, 정여립이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뜻의 동요를 옥판에 새겨서 지리산 석굴에 감추어 놓았다는 소문이 당시에도 무성했던 것으로 보아 이런저런 영향은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몽학의 말에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모순 없는 세상에 살았느냐"고 되묻는 정학. 옳은 꿈’이지만 스스로 왕이 되려는 몽학과 일전을 불사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몽학의 말에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모순 없는 세상에 살았느냐"고 되묻는 정학. 옳은 꿈’이지만 스스로 왕이 되려는 몽학과 일전을 불사하지만…. ⓒ 영화사 아침


영화에서는 몽학과 정학이 혁명과 반혁명의 칼끝을 서로에게 겨누게 된 것을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에 대한 인식과 노선차이에서 찾습니다. 몽학이 대동계를 조선을 뒤집어엎는 기폭제로 삼는 반면 정학은 줄곧 조선의 안위를 우선하는 결사체로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허구지만 영화적 상상력을 전제한다면 설득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또한 정여립과 대동계의 대업만을 놓고 본다면 몽학이 이를 계승한 셈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들 대의가 불꽃을 튀기며 격돌하지 않습니다. "이 썩어빠진 나라를 쓸어버리자"는 몽학의 말에 정학이 "칼잽이는 칼 뒤에 숨어 있어야지"라고 화답할 뿐, 봉기의 대의는 온데간데없고 야망과 구국이라는 두 남자의 단순한 대결구도로 전락합니다.

조선시대 민중운동의 정점, 정여립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을 가리켜 이미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 임금과 신하의  규범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순절한다는 뜻)을 타파하려 한 혁명적인 사상가로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천하공물설에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까지 주창한 혁신적인 사상에 뛰어난 병법과 무예, 대동계를 결성한 탁월한 조직장악력, 호남에서 황해도까지 근거지를 넓힌 전략적 안목 등은 변혁운동가로서의 정여립의 진면목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선의 변혁을 꿈꾸는 이몽학과 이를 막는 맹인 검객 황정학. 여기에 백지의 사랑과 견자의 복수가 두 남자가 내뿜는 혁명과 반혁명의 칼끝 위를 교차하며 욕망과 신념, 복수와 사랑의 파열음을 토해 놓으면서 관객들을 급박하게 빨아들인다.

조선의 변혁을 꿈꾸는 이몽학과 이를 막는 맹인 검객 황정학. 여기에 백지의 사랑과 견자의 복수가 두 남자가 내뿜는 혁명과 반혁명의 칼끝 위를 교차하며 욕망과 신념, 복수와 사랑의 파열음을 토해 놓으면서 관객들을 급박하게 빨아들인다. ⓒ 영화사 아침


영화는 정여립이 죽은 지 3년째 되는 해인 임진왜란을 주 무대로 삼습니다. 이 점이 인상적인데, 그 이유는 일부 진보적 역사가들이 정여립 역모사건 즉, 기축옥사의 황폐한 재앙이 왜란을 야기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과 서인이 엎치락뒤치락 피의 난타전을 주고받는 와중에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 등 본격적인 붕당정치로 조선이 분열되면서 왜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동인과 서인이 왜란이 일어났을 때조차 당파적 이익과 명분에 매몰되어 갑론을박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골머리를 썩이던 선조가 두 당파에서 각각 천거한 "신립을 육지로, 이순신은 바다로 보내 지키게 하라"고 명하는 대목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정여립의 대동사상의 후폭풍이 조선 지배층의 분열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습니다. '반역의 시대'라고 일컫을 수 있는 조선중기부터 1894년 동학농민전쟁까지 근 4세기에 걸쳐 조선시대 민중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반역의 시대는 생존을 위한 경제투쟁으로서의 '민란'과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으로서의 '변란'으로 나눠집니다.

영화에서 혁명을 꿈꾸는 두 인물 중 정여립은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아우르는 한편 반상의 차이를 넘어서는 통합으로 민란과 변란을 결합한 최초의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몽학은 주변부 왕족으로서 중앙권력의 쟁취를 목표로 변란(쿠데타)을 일으키지만 수탈에 찌든 농민들이 대거 참여해 세가 확장되면서 결국 정여립의 뒤를 잇습니다.

정여립과 이몽학이 꿈꾸던 대동 세상 

흥미로운 사실은 정여립이 황해도를 역모의 진원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호남을 중심으로 대동계를 구축했음에도 이곳이 발원이 된 것은 정여립 등 역모의 주역이 황해도 출신인 탓도 있지만 일찍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뿌리 깊은 데 연유합니다.

황해도를 비롯해 서북지역에 사대부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것은 태조 이성계가 서북인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언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정여립 역모사건 뒤로 호남의 사림이 초토화되고 조정에서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고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이로써 전라도와 서북면은 반역의 기운이 서린 땅으로 후천개벽의 지상정토를 간절히 염원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정여립을 죽게 하고 대동계를 해체한 한신균을 몽학이 죽이자 서자 견자가 복수를 다짐한다. 몽학에 대해 일편단심인 백지를 흠모하게 된 견자는 괴로워하면서 마지막 복수의 칼을 겨눈다.

정여립을 죽게 하고 대동계를 해체한 한신균을 몽학이 죽이자 서자 견자가 복수를 다짐한다. 몽학에 대해 일편단심인 백지를 흠모하게 된 견자는 괴로워하면서 마지막 복수의 칼을 겨눈다. ⓒ 영화사 아침


영화에서 이몽학은 정여립의 죽임 뒤 대동계의 수장이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여립과 몽학은 대동계와 동갑계라는 별개의 계를 꾸립니다. 이들 계는 무사들은 물론 공사천의 노비까지 참여하는 등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었던 비밀결사체에 가까웠습니다. 조선 후기의 검계나 살주계 역시 반양반 조직으로 평등한 사회를 꿈 꾼 결사체였습니다.

계를 구심체로 활동하던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맞닿은 곳이 있으니 바로 미륵신앙입니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며 기거했던 집터가 김제 금산사 인근에 남아 있고, 몽학의 동갑계 주력이 부여 도천사 승려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정여립이 성리학의 의리론 즉 이론과 명분에 갇혀 있지 않고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아 불평등한 조선을 뜯어고침으로써 대동 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 역시 지상정토인 미륵용화세계의 구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륵신앙은 구세불인 미륵과 불국토의 도래를 기원하는 데서 기독교의 메시아에 비견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민심이 도탄에 빠졌을 때, 미륵용화세계라는 지상정토를 실현하려던 백성들과 혁명가들의 꿈은 그만큼 간절했습니다. 이런 미륵신앙이 조선 중기 이후 '반역의 세월'에 민중봉기의 표상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으로 부활한 민중운동

미륵신앙은 정여립을 경과하면서 질적 도약을 하게 됩니다. 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듯이, 메시아는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가 메시아라는 각성을 가질 때 현신한다는 사상적 지표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홍경래가 '진인설'을 항쟁의 사상기반으로 삼은 것이나 동학농민전쟁이 인내천의 깃발을 높이 세운 것 역시 정여립으로 귀결됩니다.
  
영화에서는 임금이 달아난 텅 빈 도성에 무혈 입성한 이몽학을 통해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비극을 부르는 것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물론 그에 앞선 정여립의 혁명도 실패로 끝나고 그 뒤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전쟁 등 민중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스스로 죽창을 들고 새 세상을 만들고자 나설 적에야 후천개벽은 열린다는 민중사상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세의 메시아를 꿈꿨던 미륵신앙에서 싹터 정여립을 통과한 다음 동학에 이르러 제 모습을 갖추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민중사상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빛고을에서 '민중항쟁'으로 부활하며 우리에게 다시금 묻습니다.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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