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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활 주변에 숨어있는 한자 오자들을 재야 한자 고수인 조인석씨와 함께 바로잡습니다. [편집자말]
<한자 바로잡기> 기획의 첫 번째 장소로 낙점된 곳은 '독립공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취재를 담당한 본인이 독립운동가(고조부, 증조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그렇다, 사심이 가득한 취재다). 게다가 독립공원 내의 구 서대문 형무소(현 역사관)는 조부가 직접 옥고를 치른 곳이라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두 번째 이유는 11월 17일인 오늘이 순국선열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이 어떤 날인지, 또 대부분 언제인지도 모르는 요즘, 그나마 이 연재를 접하는 독자라도 오늘을 기억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순국선열의 날은 일제의 폭압에 맞서다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는 날이며 현충일은 한국전쟁 때 나라를 지키다가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날이다).

독립문 사이로 보이는 독립공원의 모습
 독립문 사이로 보이는 독립공원의 모습
ⓒ 김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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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1월 17일은 국권이 실질적으로 침탈당한 을사조약(1905)이 체결된 날이기도 하다. 하필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한 이유는 그날을 전후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 희생을 절대 잊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날에 독립공원의 오자를 지적하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한자권 국가의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 중 하나이기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일이든 조그마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가다 보면 큰일로 이어지기 마련 아니던가. 

독립공원 입구부터 오자가...

사전 취재를 위해 독립공원을 처음 방문한 것은 11월 5일 오전 10시 30분. 독립문 바로 앞에 있는 영은문의 기둥 초석 앞에 인부 두 명이 서 있었다.

좀 더 다가가 보니 미묘하게 틀어진 '사적(史蹟) 제33호(第三三號)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라고 새겨진 표지석을 바로 놓는 작업 중이었다.

표지석을 바로 놓는 작업 중인 인부들
 표지석을 바로 놓는 작업 중인 인부들
ⓒ 김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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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사대사상의 상징으로 비판받아 헐어 버린 영은문(청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에 위치해 있었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표지석이지만 한국도 이제 이런 작은 것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구나 하고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마침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한 조인석 선생이 그 장면을 보고 대뜸 한마디를 던진다.

'사적(史蹟)제33호(第三三號)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라고 새겨진 표지석. '맞을 영(迎)'자를 잘못 썼다.
 '사적(史蹟)제33호(第三三號)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라고 새겨진 표지석. '맞을 영(迎)'자를 잘못 썼다.

"저 표지석이 제가 말한 오자입니다."

"네?"
"독립공원 입구부터 오자를 지적해서 조금 미안하지만 영은문의 '영(迎)' 자를 자세히 보세요."

짧디 짧은 한자 실력이지만 아무리 봐도 틀린 곳은 없어 보였다. 내심 사적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표지석이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맞을 영, 은혜 은, 문 문,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은혜를 준 사람을 맞이하는 문. 도대체 어디가 틀렸다는 것일까.

"영자가 틀렸어요. 저런 글자는 지구상에 없는 글자입니다. 버들 류(柳)의 오른쪽 부분과 같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맞을 영(迎)의 오른쪽 한자 부분은 획수로 볼 때 버들 류(柳)의 오른쪽 한자 부분보다 1획이 적습니다."

자세히 보니 정말 그렇다. 매년 80만 명이 찾는 역사관광명소에서 누가 이 글자가 틀렸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수백만 명이 TV로 보고 그냥 지나쳤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골함 덮개돌 오자를 발견한 사람답다. 선생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맞을 영(迎)의 오른쪽 부분과 같이 쓰는 한자는 대표적으로 우러를 앙(仰)과 누를 억(抑)자가 있습니다. 신앙(信仰)이나 억제(抑制)라는 단어를 쓸 때 들어가는 글자이지요. 한마디로 아주 기초적인 한자라는 뜻입니다. 어느 누구나 지적할 수 있는 이 표지석의 한자가 도대체 몇 년 동안이나 이렇게 버티고 있었을까요." 

글자의 비교를 위해 조인석 선생이 직접 보내 온 사진이다. 경복궁 <영추문>의 현판에 적힌 '맞을 영(迎)'자가 올바른 글자이다.
 글자의 비교를 위해 조인석 선생이 직접 보내 온 사진이다. 경복궁 <영추문>의 현판에 적힌 '맞을 영(迎)'자가 올바른 글자이다.
ⓒ 조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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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을 돌아다니다 문법에 맞지 않는 해괴한 한국어 안내판이나 너무나 기초적인 오자를 보면 처음에는 웃음이 나오다가도 나중에는 조금 화가 난다. 적어도 공공장소의 안내판이나 주요 관광지에 적히는 글자쯤 되면 공공기관이나 국가가 나서서 하는 일이다. 그래도 그토록 엉망이라는 것은 왠지 한국이라는 나라를 무시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인 지인들의 한국관광 가이드를 자처하며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물며 연간 80만 명의 관광객이 드나든다는 독립공원, 특히 중국, 일본의 한자권 국가에서 인기가 많은 역사관광명소의 입구부터 오자라니. 조인석 선생과 함께 다니다 보면 부끄러울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독립문 표지석도 오자?

몇 걸음 걷자마자 선생이 또 멈춰 선다. 이번에는 사적(史蹟) 제32호(第三二號) 독립문(獨立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표지석 앞이다.

"선생님. 설마 이 표지석도 틀렸다는 말씀입니까?"

독립문이 사적 제32호임을 알리는 표지석
 독립문이 사적 제32호임을 알리는 표지석
ⓒ 김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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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은문 주초(迎恩門柱礎)라고 새겨진 표지석 앞을 지난지 몇 걸음 되었다고 또 오자란 말인가. 그것도 사적의 명칭을 적어 놓은 표지석이 두 개 연달아 오자라니.

"홀로 독(獨)의 왼쪽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부수 명으로는  '개사슴록변'이라고 하는데 '개(짐승)'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개 견(犬)자를 부수로 사용할 때는 저런 모양으로 바뀌어서 왼편에 붙는 것입니다. 표지석에 새겨진 한자 부수의 1획과 2획은 서로 교차해서 써야 하는 글자입니다."

"선생님, 그런데 저 정도는 봐줄 수 있는 오자 아닌가요? 원래 한자는 멋을 부려서 많이 쓰잖아요."

독립문이 제32호 사적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글자 중, 홀로 독(獨)자 부수가 잘못 쓰였다.
 독립문이 제32호 사적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글자 중, 홀로 독(獨)자 부수가 잘못 쓰였다.
ⓒ 김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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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까다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 부수는 마치 X처럼 교차해서 쓰지 않으면 한자로서 성립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미칠 광(狂)자처럼요. 우리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외국인이 한글의 'ㄱ'과 'ㅋ'을 구분해서 쓰지 않으면 이상한 것처럼 한자권 국가의 사람들이 보기엔 아주 이상한 글자지요.

저기에 새겨진 한자의 왼편은 마치 다닐 행(行)의 왼편(부수명: 두인 변)과 아주 비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일부러 멋을 부려 쓴 듯하지만 그래도 한자의 표준 서체 내에서 멋을 부려야 하지요. 착각과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자쓰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괜히 어설픈 실력으로 이의제기를 했다가 선생님께 혼이 났다. 독립유공자 후손이 독립문 앞에서 혼이 나다니. 하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이의제기를 해서 궁금증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필자였다. 질문해서 부끄러운 건 그 순간뿐, 배움은 평생을 가니까.   

"저 독립문 상단의 앞뒤 글자는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오자(誤字)아닌 오자(汚字)인 셈이지요. "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독립문 글씨가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구절이 분명히 들어있다. 약간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독립문 글씨가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구절이 분명히 들어있다. 약간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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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년 만에 개방된(2009년 10월 28일 개방) 독립문을 지나면서 선생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다. 

덧붙이는 글 | 조인석·김창규의 <한자 바로잡기> 연재 기사입니다.



태그:#독립문, #독립공원,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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