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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일제 말기 암울했던 우리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나라 읽은 백성의 체념과 달관을 서정성 짙게 표현한 박목월의 '나그네'는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당대 현실과 동떨어진 '술 익는 마을' 등 표현으로 인해 현실 도피성 문학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시 '완화삼'에 대한 화답시라고 한다.

 

두 작가의 우정을 엿볼 수 있는 화답시는 그 성격상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그 정서를 시적 표현을 통해 발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던 중국의 대문호 바진(1904~2005)의 <봄 속의 가을>은 소설이지만 화답시 성격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봄 속의 가을'은 헝가리 에스페란토 작가인 율리오 바기(Julio Baghy, 1891~1967)의 <가을 속의 봄>을 함께 수록하고 있는데, 바진은 바기오로부터 영향을 받고 소설을 썼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봄 속의 가을>은 봉건제의 잔재가 가시지 않았던 1930년대 중국 청년들의 사랑 이야기가 소재다. 바진은 1932년판 서문에서 "<봄 속의 가을>은 온화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청년세대 전부의 호소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기처럼 펜을 들어, 이 청년 세대를 위해 질풍같이 달려 나가, 죽어 가는 사회를 향해 주저 없이 외칠 것입니다. "J'accuse(나는 고발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에밀 졸라의 말을 빌려 '나는 고발한다'고 주장했던 바진은 봉건잔재가 청년들을 억압하는 상황을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은 이상한 일이요, 놀이의 일종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사랑놀이를 즐기는 대신에, 사랑이 사람들을 자주 놀린다. 사랑은 기분이 좋을 때는 우리에게 약간의 포도주를 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눈물을 준다."

 

"내가 자살을 선택한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인생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전에 말했듯이,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마감해야 한다."

 

당시 스물여덟 청년 작가였던 바진에게 있어서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라고 부르짖지만 부모에 의해 강제 결혼을 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사랑은, 죽음을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부모가 결정하는 방식의 결혼은 잔혹한 제도였으며, 봉건 억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정작 봉건 잔재 청산을 부르짖었던 이 소설은 중국 문화혁명 당시 불온서적 중 하나로 분류되어, 바진을 격리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꼿꼿한 작가적 양심을 버리지 않았던 바진은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해서도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옹호할 만치 반체제 지식인으로 살기를 마다 않다 생을 마감했다.

 

한편 바기가 쓴 <가을 속의 봄>에선 평생을 '장을 떠나지 않고, 장이 서는 곳만 바꾸면서 생활하기를' 운명으로 여기고 장돌뱅이처럼 살아가는 집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고아 학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속에서 청춘남녀의 사랑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결코 살갑지 않다.

 

"이 따위 허망한 환상은 그만두자. 희극배우는 장터의 천막에서 살아가야 되는 운명이야. 언젠가 몸이 튼튼하고 혈기왕성한 회전 목마 타는 사람이 오면....... 그때는.......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학문을 배운 사람에게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어울리고, 학교 문 앞도 안간 희극배우와는 안 어울려. 그것이 진실이야. 낭만은 소설가들에게나 어울린다고 보아야지."

 

학문을 배우는 학생과 집시 아가씨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자유연애가 보편화된 이 시대엔 우스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불합리하게 보이는 그러한 사회제도는 지금도 버젓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작가 역시 모르진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불합리한 사회제도가 억압해도 청춘이란 삶은 상처 입은 청년을 위로하던 노교수가 속삭였듯이 봄으로 충만한 긍정이 있다는 것이다.

 

"봄은 아직도 올 거야....... 많은 아름다운 봄들이."


봄 속의 가을

바진.율리오 바기 지음, 장정렬 옮김, 갈무리(2007)


태그:#연애, #결혼, #바진, #바기오, #에스페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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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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