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에서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당시 노무현 의원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에서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당시 노무현 의원
ⓒ 김종구

관련사진보기


국회의원 노무현.

벌써 20년 전에 자기소개서를 들고 처음 노무현 의원을 만났을 때 국회의원 마크도 없고 흔히 국회의원들이 이름 위에 두른 금박도 없는 소박한 명함을 건네며 "얘기 들었어요. 한번 잘 해 봅시다"라는 것이 그가 건넨 말의 전부였다. 명함 만큼이나 소박한 얼굴에 이마에 패인 골 깊은 주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넘겼지만 변호사 출신이라고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인상이었다.

그때 나 역시 처음 국회란 곳에 발을 들여놓았고 국회의원도 처음 만나본 것이니 깊이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1988년 11월 중순 KBS 본관 뒤에 있는 2층짜리 연립주택단지의 의원회관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야학과 노동현장과 감옥을 거치며 잔뼈가 굵은 학삐리 출신이었고 노동운동만이 민주주의와 평등사회 건설의 원동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스물일곱의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그즈음 의원회관 사무실은 5공 청문회를 진행하느라 모든 비서들이 일에 매달려 있었다. 노무현 의원은 노동위원회에서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삼총사로 맹활약 중이었다. 결국 먼저 일하고 있던 이광재, 이명호 두 사람이 5공청문회와 예결산업무를 맡았고 노동위원회를 담당할 비서로 내가 연결이 된 것이다.

'노동계 인기스타'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 의원은 일반적인 초선 국회의원들에게 비인기 상임위원회이자 오히려 기피하는 국회 노동위원회를 선택하였다. 그에게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가는 힘이었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그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 부산의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노동상담소'를 설치하고 노동자들의 권익과 노동운동의 외곽지원 활동을 꾸준히 해 온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부터 부산·경남지역의 노동운동 관련 변론과 상담을 도맡아 왔고87년 6월 항쟁에 이은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에도 주요 파업현장에 대한 방문과 지원에 나섰다. 결국 이석규씨 장례식을 치르던 대우조선 파업현장 연설로 변호사로서는 처음으로 3자 개입 혐의로 구속까지 된 것이다. 울산의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창원의 통일중공업, 거제의 대우조선, 부산의 연합철강과 부산항운노조 등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그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고 노동3권 쟁취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 없이 펼치고 다녔다. 그의 연설과 주장은 노동자들의 투지를 살리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각성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어 그는 많은 노동 현장으로부터 초청 대상이 되었을 정도였다.

노무현 변호사는 87년 대선후보 단일화 실패 이후 재야단체들과 논의를 거쳐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국회의원 일성은 1988년 7월 8일 사회부문 대정부질의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하며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의 삶과 투쟁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대접받고 그들의 권리가 어떻게 무너지고 재벌과 공권력이 탄압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철거민과 도시빈민의 문제까지 얘기하며 재벌 해체와 재벌소유 재산의 노동자 분배, 토지에 대한 농민분배, 군부세력 처단과 재산환수에 이르기까지 혁명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왕따 의원' 노무현 "나 같은 국회의원 20명만 있어도..."

노무현 의원에게 세상은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곳이었고 그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제도정치권의 반응은 싸늘했다. 5공 청문회가 끝나고 노동위원회 차원에서 장기노사분규 사업장에 대한 청문회를 시도했다. 현대중공업·삼성조선·풍산금속·통일중공업 등의 사주와 노조를 참고인으로 한 청문회는 결국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를 통한 압력으로 좌절됐다. 불참한 사주들에 대한 소환이나 고발조치도 무산됐다. 그에게 국회란 곳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1년도 되지 않은 1989년 3월 국회의원 사표를 던지고 잠적했다. 부산에서 지구당 당원들이 서울 집으로 몰려오고 이호철 선배까지 올라와서 만류한 끝에 다시 국회로 돌아왔지만 몇 시간씩 장관을 물고 호통 치던 그의 발언은 점차 줄기 시작했다. 89년 여름부터는 마산과 창원 지역의 분규현장을 함께 다니고 현대중공업에서 "나 같은 국회의원 20명만 있어도…'라는 발언이 나왔다. 제도권의 벽은 너무도 두텁고 그는 국회 안에서 왕따가 되기 시작했다. 청문회 스타로 일약 국민적인 정치인이 된 그는 주요 언론의 조롱거리 기사에만 올랐다. 재벌해체와 노동자 인권을 주장하는 그에게 이른바 돈 있는 자들의 외면과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탄광과 농촌, 파업현장 어디든 부르면 달려갔다. 일주일 일정 중 절반은 지방으로 떠났고 국회의원이 되면서 마련한 기아 콩코드는 2년도 되지 않아 거의 30만km를 달렸다. 고통 받고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그에겐 가장 홀가분하고 즐거운 일이었고 늘 대화는 차에서 이루어졌다. 정치 일반에 대한 얘기에서부터 사소한 주변 일까지 우리에게 묻고 의견을 구하고 스스로 정리해 나가는 모습은 항상 진지하고도 유쾌했다. 그 기본은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1989년 마지막 날 전두환에 대한 정치권의 타협과 1990년 3당 합당이후 그에게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제대로 된 야당을 만드는 것이 현실의 과제가 되었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한국정치를 왜곡하는 지역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이 그에겐 더욱 시급했다. 1998년 대선을 앞두고 오랫동안 적과 동지를 반복하던 김대중 후보를 선택하며 집권여당의 일원으로 다시 노동자들과 만나게 된다. IMF 직후 구조조정에 직면한 삼성자동차·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정책적 조정을 해나가는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아마 그라면 지금 쌍용자동차 현장에서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장에서 당기를 흔드는 김영삼 당시 총재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장에서 당기를 흔드는 김영삼 당시 총재
ⓒ 김종구

관련사진보기


노무현은 과연 '반노동자적' 대통령이었을까?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그가 온 몸으로 저항했던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제도와 관행은 거의 사라졌다. 노동 3권은 정당하게 보장되었고 40시간 노동제, 각종 보험과 연금의 도입, 산업재해의 방지, 사회적 안전망 확대 등 어쩌면 그가 꿈꾸던 세상을 조금씩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부동산 거품을 잡고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고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양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영세 자영업자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2004년 노무현이 만들고자 한 노동자들의 정치세력은 비록 10석에 불과하지만 제 3당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2007년 비정규직법안을 처리하면서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노사정위원회를 깨고 참여정부를 반(反)노동자 정권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에 팽배한 반(反)노무현, 반(反)참여정부의 정서에 편승하고 나아가 이를 조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겐 자기를 몰라주는 이들에 대한 섭섭함과 아쉬움이 얼마나 컸을까? 적어도 그는 재벌과 기업을 비호하거나 그들과의 거래를 통해 반(反)노동자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퇴임 후 노대통령이 민주주의와 진보, 양극화를 넘어서는 사회적 대안에 대해 더욱 천착하려한 이유도 기실 그가 꿈꾸던 세상, 가난하고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겠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농민이든, 노동자든, 철거민이든, 노점상이든...

지난 이십 몇 년간 변호사. 국회의원, 대통령이란 호칭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10일이면 49재, 그가 이승을 떠나게 된다. 이 땅의 정치인 중 그만큼 노동자를 사랑했던 사람도 없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초선으로 노동위원회를 선택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지만 좌절했던 사람, 3당 합당이후 지역주의와 맞서 끊임없이 싸웠지만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사람, 온갖 조롱과 모함 속에서도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위해 일했지만 결국 스스로 세상을 떠나야했던 사람, 그러나 그를 만나서 행복했던 한 사람으로 영원한 안식과 평온을 빈다.

덧붙이는 글 | 조상훈 기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비서관(1988~1992)을 지냈고, 현재 광진참여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다.



태그:#노무현전대통령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