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문 엽위신의 <엽문>에서 주인공 엽문 역을 맡은 견자단

▲ 엽문 엽위신의 <엽문>에서 주인공 엽문 역을 맡은 견자단 ⓒ CJ엔터테인먼트(주)


오늘날 홍콩영화계 최고의 고수는 두말없이 견자단이다. 배우이기 이전에 무술인인 그는 중국 정통 무술을 기본으로 현대 격투기까지 넘나들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액션연기를 펼친다(그는 원화평의 누이에게 무술을 배운 어머니 덕택에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빠르고 강한 그의 액션은 홍콩 액션영화의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유일한 위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션연기 외적인 요소가 매번 견자단의 발목을 잡았는데, 영 작품 운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썩 변변치 않았다는 얘기다. 예컨대 최근 그의 필모그래피엔 <살파랑> <도화선> <용호문>같이 내러티브가 빈약해 탁월한 그의 액션만이 악전고투한 현대극이 있는가 하면, <칠검> <연의 왕후> <화피>같이 그조차 무색한 시대극도 있다.

여기엔 홍콩 액션영화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데다 그가 더러 제작자나 감독, 무술감독으로 참여한 탓도 있을 터이다. 그렇다손 쳐도, 대개 걸출한 배우와 좋은 작품은 운명처럼 만나 선순환을 일으키게 마련. 하지만 그에겐 좀체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그즈음 견자단에게 찾아온 영화가 바로 엽위신의 <엽문>이다. 실존했던 영춘권의 대가 엽문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면서 그가 주인공 엽문 역에 캐스팅된 것이다. 엽문은 홍콩 액션배우들의 우상인 이소룡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인물(현재 준비 중인 <엽문2>에선 이 대목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더구나 그에게 <엽문>이 의미심장한 건 단독 주연 무협영화의 성공이야말로 홍콩영화계에서 당대 최고의 액션배우로서 받는 인증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소룡에게 <정무문>, 성룡에게 <취권> 시리즈, 이연걸에게 <황비홍> 시리즈라는 여의주가 있었듯 말이다.

엽문 영춘권의 대가 엽문(왼쪽)과 그의 제자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소룡(오른쪽)

▲ 엽문 영춘권의 대가 엽문(왼쪽)과 그의 제자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소룡(오른쪽) ⓒ CJ엔터테인먼트(주)

1930년대, 중국 남권 무술의 발원지 불산에는 여러 문파의 무도관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선다. 그중에서도 날쌔고 간결한 영춘권의 고수 엽문은, 뛰어난 무술 실력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품도 지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영웅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불산도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 후 일본의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인해 불산은 점차 황폐되고 그의 가족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그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소신을 굽히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또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일본군의 횡포에 많은 무인이 죽어 가자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의 대결에 분연히 일어선다.

아니나 다를까 <엽문>은 온전히 견자단의 영화다. 그는 그나마 괜찮아진 내러티브 속에서 자신의 최대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먼저 그에게 으레 기대한 액션은 <도화선>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수준은 아닐지언정 과장되지 않고 절제돼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중반부에 일본군을 상대하는 10대 1 액션 신이 단연 압권인데, 왜 그가 으뜸인지 다시 한 번 증명한다(물론 그가 1이다). 그런데 액션보다 눈에 띄는 게 의외로 그 밖의 연기다. 그가 겸손한 무인이자 성 정치학적으로 올바른 가장인 엽문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는 까닭이다. 덕분에 여성이 만든 무술인 만큼 비교적 부드러운 영춘권과 맥락이 통하고 곤궁한 처지는 피부에 와 닿는다. 대체로 유순하나 때로는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연기는, 강약의 조절이 능란할뿐더러 전작들과 교묘한 차이를 만든다. 어느덧 지천명을 바라보는 액션배우로서 그동안 누적된 마초 이미지를 덜어 내고 연기의 폭을 넓히는 쾌거다(그는 1963년생으로 공교롭게도 이연걸과 동갑이다).

그런데도 <엽문>은 견자단을 가리고 보면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장르의 관습에 철저히 기대는 바람에 언뜻 다른 영화들이 겹쳐 보인다. 초반에 이른바 '도장 깨기'가 등장하고 후반에 최후의 일전으로 장식하는, 전형적인 플롯이기 때문이다. 일견 <황비홍1>으로 시작해 <무인 곽원갑>으로 끝나는 셈이다.

심지어 조연들의 캐릭터는 <황비홍1>을 닮아 리순(임가동)과 주청천(임달화)에게 각각 양관(원표)과 임진동(임세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망자의 매개물과 뒤늦은 후회(화해)라는 불필요한 클리셰에 이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 외에도 전반에 깔리는 애국주의가 외국인의 입장에선 다소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담뿍 얹은 비장미와 유사한 과거 덕택에 제법 잔잔한 감동을 이끌어 낼 성싶다.

철마류 원화평의 <철마류>에서 황기영 역을 맡았던 견자단의 모습

▲ 철마류 원화평의 <철마류>에서 황기영 역을 맡았던 견자단의 모습 ⓒ CJ엔터테인먼트(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견자단은 <황비홍2-남아당자강>에서 황비홍(이연걸)에게 고꾸라지는 사이비 교주 납란원술이었고, <신유성호접검>에서 맹성흔(양조위)에게 밀려 고소저(양자경)와 소소(왕조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무인 엽상이었며, <신용문객잔>에서 주방장의 칼에 두 다리마저 저며져 죽는 내시 조소흠이었다(공교롭게도 양조위는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에서 엽문 역을 맡았다).

물론 그에게도 2001년 미국에서 때늦게 개봉해 흥행과 평단의 인정을 모두 받은 <철마류>가 있긴 하다. 게다가 여기서 그는 황기영역을 맡아 우영광(철마류 역)과 더불어 불타는 장대 위에서 액션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장면을 합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영광은 우영광은 당연하고 감독 원화평과도 함께 나눠야 했고 아무래도 그에게 돌아오는 몫은 크지 않았다(원화평은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영화계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랬던 그가 <엽문>을 만나 비로소 크리티컬 매스에 도달한다. 그야말로 '잠룡의 승천'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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