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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은 섬 포구에 자리한 작은 등대입니다.

바람이 잔잔하고 햇살이 좋은 날이면 먼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잔잔한 날이라도 밤은 무섭습니다. 온밤을 꼬박 눈 부릅뜨고 지새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면 더 힘들지만 그런 날이야말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이곳에 살아오면서도 그리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이나 거센 바람이 부는 날이면 파도가 내 몸을 사정없이 때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쓰러뜨리려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밤 혹은 어둠, 폭풍우가 없는 바다였다면 내가 이곳에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내 삶은 그들이 있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 그곳에 살아가는 동안 내 몸은 조금씩 삭아 들기 시작했습니다. 삭아 들어가는 몸 사이사이 붉게 녹슨 철근들이 드러나고, 부식된 철근은 눈물처럼 녹물의 흔적을 내 몸에 남깁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쉬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흉하게 변해가는 내 모습 때문에 늘 슬펐습니다.

 

 

"바다야, 너는 행복하니?"

"행복? 세상에 있는 것은 다 행복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니?"

"그런데 난 언젠가부터 슬프단다. 나를 봐, 이렇게 삭아 들고 있잖아."

"그렇다고 네가 하는 일을 쉰 적은 없잖아."

"그렇지, 그 일을 쉴 수는 없었지,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러면 행복한 것 아니겠니? 삭아 드는 것은 삶의 흔적이란다."

"그래도 난 처음 그 순간처럼 늘 아름다워지고 싶기도 해."

"사람들이 너를 고쳐주겠지. 넌 꼭 필요한 존재니까."

"그러나 녹슨 철근은 그대로 두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바꿀걸?"

"녹슨 철근이 미운 거니?"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너도 알지? 그런데 내 안에 이렇게 녹슨 철근이 들어 있다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얘, 난 어떤 것 같아?"

"넌 늘 새롭잖아. 항상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지 않니? 생명을 잉태하는 바다라고들 하잖아."

"내 안에는 내가 원하는 것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어. 흘러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인단다."

"더러운 것도?"

"물론이지, 더러운 것도, 심지어는 죽은 것도 받아들여 생명을 불어넣는단다."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그래, 더러운 것, 죽은 것이 없다면 생명을 불어넣는 일도 할 수 없지."

 

바다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더러운 것, 썩은 것, 죽은 것 모두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신이 싫을 때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 자신이 그것을 깨끗하게 하고, 살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그 후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그런 것이며, 아름다운 것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나는 내 몸에서 드러난 철근에서 흘러내린 쇳물로 얼룩진 내 몸을 보았습니다. 얼룩진 몸이긴 하지만 단 한 번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쉰 적이 없습니다. 뱃사람들은 내 몸의 얼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두운 바다에 비추는 빛, 폭풍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빛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바라보니 내가 그동안 슬프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도 슬픈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슬픔이나 행복, 그것은 많은 경우 내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죠.

 

 

어느 겨울날 밤이었습니다.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불어왔고, 바람의 세기만큼 높은 파도가 내 몸을 때렸습니다.

밤바다로 나갔던 배들이 서둘러 포구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도 눈을 부릅뜨고 그들이 포구로 안전하게 돌아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체만한 큰 파도가 내 허리 부분을 쳤습니다. 나도 모르게 '휘청!'하는가 싶더니만 태어나 처음으로 구부정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번 그렇게 허리가 꺾이자 그냥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기 먼 바다에 아직도 포구로 돌아오지 못한 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 배가 포구로 돌아와야 해요, 그때까지만 제가 빛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배가 포구로 돌아올 때까지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부릅떴습니다. 한 번 구부정해진 몸은 점점 꺾어져 곧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침내 마지막 배가 포구로 돌아왔을 때 등대는 '쿵!' 소리를 내며 방파제 한쪽에 기대에 누웠습니다. 그제야 등대는 끝까지 등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제 몸에 들어 있던 녹슨 철근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마워…….'

 

덧붙이는 글 | 글은 김민수(달팽이), 삽화는 위창남(목각인형)이 그렸습니다. 그리하여 '목각인형과 달팽이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 집을 드나드는 분들께 행복한 일들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이야기는 월요일(27일) 이어집니다.


태그:#동화, #바다,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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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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