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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와! 처음 기사 썼는데 으뜸이야! 원고료도 12,000원? 아, 행복해라!”

때는 지난 2007년 11월 11일. <오마이뉴스>에 처음 글을 송고한 날이다. 당시 난 일하던 대학학보사를 개인 사정 때문에 그만두고 갈 곳이 없었다. 기사 작성 하나로 살아온 내가 갑자기 어린 나이에 ‘직장’ 같은 보금자리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어느 날, 학교게시판에 밝은 하늘색 포스터 하나가 달렸다.

‘제2회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푸른 하늘에 한 남자가 자신있게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이다. 그래픽 형상인 이 남자는 나에게 뭔가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그래, 가보는거야”라는 심정이 이때부터 생겼다. 그것이 바로 <오마이뉴스>에 2007년 11월 처음 글을 올린 계기다.

생애 <오마이뉴스> 첫 아이템은 위와 같이 으뜸기사로 선정됐다. 바로 지하철 종합안내도 주변 교통안내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다. 2004년 서울시 대중교통이 개편되던 해, 3년이 넘도록 버스번호안내를 이전과 그대로 해놓은 역들을 당시 많이 봤다. “아, 한번쯤은 이것이 고쳐져야겠구나”는 생각이 여기서 들었다.

그래서, 너무 멀리 나가는 대신 3호선과 분당선을 중심으로 취재했다. 총 4군데를 돈 결과 1군데 빼고 3군데가 문제점 투성이였다. 이 문제점 투성이들을 ‘대학생기자상 공모전’에  지원했고, 으뜸으로 기사가 선정된 것이다.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땅을 파더라도 쉽게 12,000원 받기 힘든데, 아이디어 하나로 큰 영광을 누린 셈이다. 12,000원이 하찮아 보이더라도 대학생에겐 식사 몇 끼 해결할 수 있는 소중한 돈이기 때문이다.

어려도 난 지원자라구요!

해가 지나 2008년, 2008년 연초는 다른 해와 달리 특별하게 살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이 마음은 연초에 <오마이뉴스> 7기 인턴기자 지원까지 이어졌다. 선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지원했다.

2008년 1월 11일, 드디어 1차합격자가 발표됐다. 20명의 이름 중 내 이름 석자가 박혔다. 당시 운전학원 기능시험 연습중에 1차합격 소식을 전화로 접했다. 예상치 못한 합격이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운전 핸들을 마구 때렸다. 옆에 교관이 있으면 혼날 몸짓이지만 혼자 주행연습을 해서 이 기쁨을 과격(?)하게 표현했다.

2008년 1월 11일 '오마이광장'에 실린 7기 인턴기자 1차합격자 명단 발표글
▲ 당시의 기쁨이란… 2008년 1월 11일 '오마이광장'에 실린 7기 인턴기자 1차합격자 명단 발표글
ⓒ '오마이광장'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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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뒤인 14일. 2차 전형을 보기 위해 <오마이뉴스>로 향했다. 당시는 <오마이뉴스>가 광화문에서 상암동으로 회사를 이전한 지 얼마 안된 때다. 위치가 애매해 찾기 힘들었다. 수색역 주위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지하철 역에서 너무 멀었다.

힘들게 회사를 찾고 면접이 다가왔다. 담당자인 한 상근기자만 면접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똑똑해 보이는 여성 한 명, 군대를 갓 제대한 복학생 그리고 그 중 가장 어린 07학번 내가 입실했다. 주로 라디오 방송에 많이 출연했고 그 계기가 기사로 이어졌다는 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 상근기자는 관심이 없는 듯 여학생에게 경제 관련 질문을 계속 했다. 특정인에게 치중한 면접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뭘 모른다는 오해를 받았을까? 기회가 너무 없었던 것. 이 불안은 결국 불합격으로 이어졌다. 불합격도 불합격이지만 화가 치밀어 그 당시 면접관인 상근기자에게 항의 메일을 보냈다.

“너무 한 사람만 치중해서 면접을 본 것이 아닌가요?”

그러자, 면접관이었던 상근기자의 답변은 이랬다.

“한 사람에게 치중하려고 했던 의도가 아닌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군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만나죠.”

너무 항의만 내세운 탓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예상보다 그 상근기자가 나의 분노를 차분히 달래주는 듯한 인상이기 때문이었다.

불만과 도전으로 <오마이뉴스>를 더 이해하게 되다

이렇게 과감한 첫 도전과 불만 표출이 강해지다 보니, <오마이뉴스>를 더욱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시민기자로서의 현장감과 창의력 있는 기사 작성이 핵심이란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생 신분으로서 이같은 내용이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그 의미를 살피기 위해 시민기자의 글과 상근기자의 글을 맹독했다.

맹독한 결과, 기사쓸 때 한 주제만 치우치는 것이 내 문제였다. 라디오만 치우친 내가 기자로서의 아이템 지식이 부족했다. 그래서 더더욱 노력하며 아이템 수집에 힘썼다. 대학생 스펙 관련 카페와 뉴스사이트 등을 검색해 수많은 아이템 쌓기에 공을 들였다.

이렇게 노력을 한 후, 명함을 얻었다. 끊임없는 검색에 거쳐 만든 내 기사들 덕분에 ‘3개월 동안 버금기사 5개 이상을 등록한 자’에게 주어지는 명함을 얻게 된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명함, 생각과 달리 디자인이 달라졌고, 깔끔했다
▲ 그 노력의 결과 오마이뉴스의 명함, 생각과 달리 디자인이 달라졌고, 깔끔했다
ⓒ 조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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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수많은 명함을 받았지만, 한글과 영문이름이 같이 나오는 명함은 처음이다. 게다가 깔끔해 보이는 빨간색 명함이 참 맘에 들었다. 시민기자로서 너무 뿌듯한 결과다.

이뿐만이 아니다. 더 <오마이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기만26기'에 참석해 기사교육을 받고 진정한 이상형도 찾았다. 또 다양한 연령대인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고 '오기만26기' 클럽의 주인장이 됐다. 평소에 만나기 힘들 것 같았던 오연호 대표도 만났다. 영광스러웠다.

또 서희태 <베토벤 바이러스> 예술감독과의 인터뷰 기사가 <위클리 오마이뉴스> 지면에 실려 그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다. 부모님도 이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 대신 주간 오마이뉴스를 더 요청하시기도 했다.

편집부 기자와 MBC 라디오를 방문해 취재한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 중 하나다. 최초로 편집기자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기사이기도 했다. 또 2만여 건의 조회수가 넘는 기사도 써 지금도 매우 뿌듯하다.

분노와 오해가 있었다. 초반 수없이 많았던 생나무가 나를 좌절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생나무는 나에게 여러 가지 아이템 작성이 가능한 ‘생기있는 나무’ 역할을 해줬다. 그 식물은 나에게 있어 용기와 희망의 식물이다.

언론인이 되기 위해서 <오마이뉴스>에 수많은 아이템을 작성하려는 나, 창간 9주년을 축하하며 향후 ‘조재환’이라는 이름이 어떤 기사로 독자의 공감을 얻을지 기대해도 좋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긴 일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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