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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외도동은 시내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7~9km정도 이른 곳에 있다. 과거에는 마늘과 보리를 재배하던 작은 농촌이었는데, 10년 전 쯤 이 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제주시 도심의 기능을 분담하는 베드타운으로 떠오르는 곳이다.

 

외도동과 광령마을 경계지역에서 고인돌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일대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삼별초가 탐라를 장악했을 때, 외도 해안을 포구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원제국 시대에 세워진 탐라 3대 사찰 중 하나였던 수정사도 외도에 세워지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이 곳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1702년에 이형상 목사가 화공 김남길을 통해 그린 <탐라순력도>의 일부인 '한라장촉'에는 지금 외도지경에 '수정(水淨)마을'이 나타난다. 이 일대 마을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1770년에 작성된 <제주삼읍총지도(濟州三邑總地圖)>에 외도근천(外都近川), 내도근천(內都近川) 등이 나타난다. 지금의 외도동은 '외도근천'에서, 내도동은 '내도근천'에서 유래한 이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로웠던 수정사 옛터에는 교회가 들어서 있고

 

외도1동에는 원제국시대에 '수정사'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수정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작성된 <태종실록>에 '수정사의 노비를 130명에서 30명으로 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조선시대 이전에 사찰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종 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충청도 금산을 거쳐 제주에 유배되었던 충암 김정은 제주유배기간 중 불자인 고근손의 요청에 의해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靜寺重修勸文)을 지어주었다. 그 내용의 일부다.

 

생각해보니, 원대부터 있던 오래된 것이면서 아직도 우뚝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도근천의 수정사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 기와와 서까래가 깨지고 벗겨졌는데, 그것이 장차 무너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생각을 강개하게 먹고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그 옛것을 보존하면서 그것을 다시 건설하였다.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와서 문장을 구함에 무척 열심히 하였다. 이에 그 객에게 답하는 현식의 문장을 써서 그에게 준다.

 

김정은 조광조와 운명을 같이했던 대표적 사림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했던 신념에도 불구하고 유배 중에 불교사찰을 위해 중수권문을 작성한 것을 보면, 그 사상적 포용력이 남달리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수권문은 1521년 충암 김정이 사약을 먹고 사사되기 직전에 쓴 것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정사는 원제국 시대에 지어진 3대 사찰 (원당사, 법화사, 수정사)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으며, 1521년 경 한차례 중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창된 수정사는 이후 100년도 못되어 거의 황폐해졌다. 어사 김상헌이 1601년 이 일대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을 요량으로 수정사에 들렀다가 남긴 기록에는, "초가 두어 칸이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라고 되어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국가지도이념으로 자리 잡자, 수정사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 불교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수정사터에는 절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에는 성지교회라는 간판으로 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 교회는 주변의 아파트를 배경으로 날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도근천은 월대와 도근포로 통한다

 

수정사터 가까운 곳에는 500여 년 된 소나무의 가지가 푸른 물과 어우러져 동양화 속의 도원을 연상케하는 하천이 있다. 과거 주민들은 이 하천 일대에서 오래된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천에 비친 달빛을 사모하였다. 그래서 이 하천가에 '달을 감상하는 곳'이란 의미로 월대(月臺)를 만들었다.

 

월대 옆을 흐르는 하천은 도근천의 하류에 해당한다. 이 하천에는 은어가 서식하고 있고, 먹이를 찾아 두루미가 날아온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장면에 효과 음향을 더하듯 물이 정겨운 소리를 내며 흐른다.

 

도근천이 월대를 지나 바다에 이르는 지점에 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를 과거에는 도근포(都近浦)라 하였다. 이와 관련한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제주목에서 서쪽으로 18리에 도근천이 있다. 일명 수정천 또는 조공천이라고 한다. 지방사람들의 말이 매끄럽지가 못한데, 도근(都近)은 곧 조공(朝貢)이란 말의 그릇된 표현이다. 언덕은 높고 험하여 폭포가 수십 척을 날아 흘러 그 밑에서 땅 속으로 스며들어 7, 8리에 이르러 돌 사이로 솟아 나와 드디어 대천의 하류를 이루었는데, 도근포라 일컫는다.

 

1270년 고려 관군을 격파하고 탐라는 물론이고 남해안 해상교통로를 장악한 삼별초군은 도근천 하류에 있는 포구를 통해 항파두리성으로 보급물자를 들여왔다. 도근포는 삼별초군이 사용하던 조공포가 변형된 이름이고, 그 도근포로 이어지는 하천이 도근천인 셈이다.

 

 

연대는 무너지고 연대마을만 있어

 

도근포에서 서쪽 500미터 지점 해안가에는 '연대'라는 이름을 지닌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연대는 해안 방어에 필수적인 통신수단이었다. 마을이름이 연대인 것은 이 마을 해안에 '조부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마을은 월대마을과 함께 외도2동으로 묶여 있다.

 

조부(藻腐)란 '해초가 썩는 곳'이란 의미다. 이 마을에는 주민들이 '듬북개'라 부르는 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에는 '듬북'이라는 해초가 주로 쌓여 썩는다고 한다. 과거 문서에 이 포구는 조부포(藻腐浦)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조부포'라는 포구의 이름에서 '조부연대'라는 이름이 만들어졌고, 그 조부연대의 '연대'가 마을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런데 연대 마을을 방문해보니, 정작 조부연대에 대한 안내표지도 마련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연대도 흉물스럽게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을 주변에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민박집이 많이 들어서 있었는데, 마을의 이름을 결정한 유적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내도동 몽돌해안에서 자갈구르는 소리에 취해

 

도근천의 동쪽 해안에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작은 해안마을이 있는데, 이름이 내도동이다. 제주시 중심지에서 볼 때 도근천을 경계로 안쪽에 들어서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외도동에 함께 속해있다.

 

내도동 해안가에 들어서는 길목에는 둥근 돌들로 쌓인 돌담이 있어서, 마치 오래 전 영화에 등장하는 마을을 보는 듯하여 정겹다. 이 돌담길을 따라 가면 물기를 머금은 매끄러운 둥근 자갈들이 햇빛을 반사시켜 조명쇼를 펼치는 몽돌해안에 이른다.

 

 

몽돌해안에 가만 앉아 있으니, 파도가 밀려올 때 자갈들을 쓸어 올리고, 밀려온 물이 빠질 때 다시 이들을 쓸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자갈이 물속을 구르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자작나무 소리를 좋아해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는 이들도 자연이 전하는 이런 평화로운 소리에 취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외도1동이 10여 년 전부터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 아파트 단지 주변은 농지들이 펼쳐진 영락없는 농촌이다. 원래 이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여전히 마늘과 보리 등을 재배하며 삶을 지탱한다.

  

외도동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민편의시설들이 늘어나고 있다. 외도동에 실내수영장이 들어선 것은 오래된 일이며, 최근에는 인조잔디가 잘 깔린 축구장이 만들어져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제주시 서부에는 농촌 들녘에 도근천이 흐르고, 그 도근천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물이 만들어내는 풍경과 소리를 자랑하는 마을이 있다. 누구든지 아름다운 물소리가 그립거든 제주시 외도동으로 갈 일이다.

 

(계속)


태그:#외도동, #내도동, #월대, #도군천, #연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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