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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채널을 보기 위해선 성인·오락 채널을 거쳐가야 한다.
▲ C&M구로 케이블방송채널편성표 어린이 채널을 보기 위해선 성인·오락 채널을 거쳐가야 한다.
ⓒ C&M구로케이블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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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동생은 집에만 오면 컴퓨터부터 켜고 본다. 으름장도 놓아봤지만, 어디 하지 말란다고 안할 초딩이더냐. 엄마와 나는 강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컴퓨터 하는 시간을 줄이게 하기 위해 책과 TV를 선택했다. 컴퓨터 대신 책과 TV에 친숙하게 하자는 의도였다. 단 TV시청은 부모님이나 언니·오빠와 함께.

그래서 요즘 동생과 함께 TV 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며 동심에 젖어들기도 하고, <1박 2일>과 같은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희희낙락하기도 하고, 뉴스를 보며 '쇠고기 파동' '촛불 문화제' 등에 대해 알기 쉽게 풀이해주기도 한다.

그 덕분에 '대딩' 언니와 '초딩' 동생 사이에 단절된 대화의 벽도 허물어졌다. 방구석에 틀어박혀있던 나는 공공의 공간인 거실로 나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동생의 사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몰라보게 늘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가 나오면 지나가는 말로 설명해주었던 것들이 하나 둘 쌓여 아이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아직 서툴지만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들을 보며 곧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설명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스스로 찾아보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동생의 '요구'로 촛불 집회에 다녀오기도 했다.

어린이 채널 양옆에 자리잡은 성인∙오락 채널

그런데, 동생과 같이 TV를 보다 보면 민망해질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선정적인 프로그램이나 성인 대상 프로그램으로부터 동생의 눈을 보호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있는 C&M구로 케이블방송의 '배려없는 채널 편성' 앞에서는 모두 헛수고가 된다.

문제는 성인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채널로의 접근이 매우 '용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즐겨보는 어린이 채널인 <투니버스>나 <재능방송>을 보려면, 성인∙오락 채널인 <Story ON>과 <tvN> 그리고 <On Style>과 <mbc Every1>을 반드시 거쳐가야 한다. 

22번 <투니버스> 좌우로 21번에는 <Story ON>, 23번에는 <tvN>이, 29번 <재능방송> 양 옆에는 28번 <On Style>, 30번 <mbc Every1>이 양대 산맥처럼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 채널 바로 옆 채널에 등급제에 의한 청소년 시청 불가 프로그램이 4개, 9개나 있다.
▲ 각 채널의 프로그램 편성표 어린이 채널 바로 옆 채널에 등급제에 의한 청소년 시청 불가 프로그램이 4개, 9개나 있다.
ⓒ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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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채널 편성 때문에 리모컨을 돌리다 보면 '험한 꼴'을 당하기 일쑤다. 보기에도 민망한 프로그램 제목이 화면에 떠있거나, 바람난 남편의 행적을 쫓고 부부가 헐뜯고 싸우는 내용도 나온다.

심지어 성인 남녀가 거의 벗은 채로 나오는 낯뜨거운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언니, 저거 무슨 내용이야? 저 사람이 왜 욕해?'라고 묻기라도 하면 말문이 막힌다. 법적으로 성인 프로그램 방영이 가능한 밤 10시 이후가 되면 더욱 긴장한다. 리모콘을 돌리는 엄지손가락에 가속이 붙는다.

케이블 방송 채널 편성에 기준, 규제 갖춰지지 않아

현행 방송법에서 케이블TV의 채널 편성권은 전적으로 방송 사업자에게 있다. 지역방송발전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칙 (방송통신위원회 규칙 제6호) 제9조에 따라,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는 자의적으로 채널을 편성할 수 있다.

채널을 편성함에 있어서 시청자의 시청권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종합우선방송사업자의 이익만이 고려될 뿐이다. 시민 단체의 감시나 시민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종합유선방송사업자 등 다채널 방송사업자들의 '제멋대로식' 채널 편성은 많은 항의를 받고 있다. 사전 예고 없이 일부 채널을 삭제하거나 유료 채널로 변경하는 등 지역방송사업자의 횡포에 시청자들의 시청권은 짓밟히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난 2007년 4월 27일,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여러 시민단체가 '종합유선방송 채널 군(群) 편성의무화'에 대해 주장한 바 있다.

민언련은 논평에서 "현행 방송법에는 채널 편성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어 종합유선방송사업자가 수익극대화를 위한 목적으로 채널을 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을 방해할 뿐 아니라 특정 방송의 시청을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비판했다.

또한 "방송이 지향하는 문화적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고 시청자의 채널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채널 군(群)을 설정해야 한다"며 "방송의 공적 성격이 구현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편성에 관한 기본 방향을 규정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종합유선방송 채널군별 편성의무화'를 주장하고 있다.
▲ 지난 2007년 4월 27일, 전국 민언련 논평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종합유선방송 채널군별 편성의무화'를 주장하고 있다.
ⓒ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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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도 이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이 정해져 있지 않다. 

'2008년 1월 방송사업자별(종합유선방송사업자 대상) 시청자불만 접수 및 처리결과 통계'(출처:방송통신위원회)를 살펴보면, '사전 고지 없는 임의 채널 편성에 대한 불만', '채널편성 및 독점에 대한 불만' 등 채널편성에 대한 불만이 10건이나 접수되었다. 그에 반해 처리 결과는 모두 '사무처 답변처리(편성은 고유권한임을 안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채널 편성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만은 잇따라 계속 되고 있는데도 방송통신위원회는 왜 채널편성에 대해 실질적인 제재를 가할 생각 조차 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정서 확립 시기에 놓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프로그램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아직 판단력이 제대로 서지 않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해를 안겨다 줄 것인지는 두말 할 나위 없다.

더 이상 채널 편성권을 전적으로 사업자들의 재량에 맡겨서는 안 된다. 채널 군 설정 의무화 등 제도의 개선을 통해 시청자들의 시청권을 보호하고, 유해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야 할 것이다.

한 시청자가 케이블방송사 채널 편성표에 관해 불만을 표하고 있다.
▲ 방송통신위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시청자의 제안 한 시청자가 케이블방송사 채널 편성표에 관해 불만을 표하고 있다.
ⓒ 방송통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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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케이블TV, #채널 편성, #방송통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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