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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거스 히딩크가 다녀간 이래로 한국에서는 외국인 지도자의 존재가치가 이전에 비해 높아졌다. 한국인들 간의 학연·지연·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딩크의 사례를 외국인 장차관 임용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히딩크가 실패했다손 치더라도, 그로 인해 대한민국의 운명이 잘못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월드컵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망신을 당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국정의 경우는 다르다. 외국인 장차관에게 국정을 맡겼다가 실패하는 경우에는, 월드컵축구 실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인 장차관 임용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외국인 장차관 임용,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물론 외국인의 경우에는 한국인이 간과하기 쉬운 한국의 문제점을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 과연 한국을 위해서 충심으로 일해줄 것인가도 의문이지만, 설사 그가 한국을 위해 충심으로 일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외국인인 히딩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동안의 우여곡절을 거쳐 그에게 고도의 재량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요인이 없었다면, 한국 내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그가 주변의 견제를 물리치고 소신을 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국인 장차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이 대한민국 행정가로서 성과를 거두자면 대통령으로부터 고도의 재량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국내에 별다른 기반도 없는 외국인이 무슨 수로 소관부처의 행정을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고도의 재량권을 받지 못한 외국인 장차관은 관료집단이나 이해집단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통에 소신껏 일하기가 힘들 것이다. 

외국인 장차관에게 고도의 재량권을 부여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말은 쉽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

막상 대한민국의 부문별 국정을 외국인의 재량에 맡긴다고 하면 왠지 불안하고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에게 자기 집 통장과 도장을 맡기는 기분일 것이다. 장차관에 대한 권한의 위임은 기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국적을 달리하는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또 우리는 외국인들이 한국보다는 일본이나 중국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동아시아’ 하면 일본이나 중국을 먼저 떠올린다. 그들은 일본이나 중국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국을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그 대신 이등박문이나 강희제를 더 잘 알고 있을 파란 눈의 외국인이 부문별 국정을 ‘소신껏’ 이끌어간다면, 그 결과가 과연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 한·일 간에 독도·교과서 등의 갈등이 터지거나 한·중 간에 역사분쟁이 터지는 경우, 한국보다는 일본·중국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을 그 외국인 장차관은 과연 어떤 생각을 품을까? 그런 문제들도 외국인 장차관의 소신에 내맡길 수 있을까? 

게다가 외국인 장차관의 ‘소신’ 속에는 서양적 가치관과 애국심(자기 나라에 대한)이 뿌리박혀 있을 텐데, 그런 소신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

설령 외국인 장차관을 무한 신뢰하고 그에게 고도의 재량권을 준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재량권을 주는 목적은 소신껏 일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소신이니 재량권이니 하는 것들은 일단 소관 부처를 장악한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소관 부처를 장악하려면 일단 업무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최소한 1년은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 필수

필자가 아는 어느 베이징대 학생은 기역 니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 대학원에 유학 온 지 10개월 만에 한글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이런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다. 그리고 그나마 그 학생은 같은 동양권 출신이라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권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외국인 장차관이 초빙된다면, 이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무한정 기다려주어야 할까? 한국인 장차관 같았으면 몇 번이나 교체되고도 남을 만한 시간에, 외국인 장차관은 아직도 ‘한국에 적응 중’일 것이다.

히딩크의 경우에는 그 분야가 스포츠였기 때문에 업무를 빨리 파악할 수 있었지만, 국가행정의 경우에는 사정이 이와 다르다. 스포츠는 몸으로 뛰는 운동이기 때문에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선수들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행정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문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서행정을 파악하려면 일단 언어에 능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어가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언어도 아닌데, 외국인이 한국어로 전개되는 문서행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까? 만약 히딩크가 축구대표팀 감독이 아닌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었다면, 그는 아마 대통령 임기가 다 끝나도록 업무파악도 마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비서들이 영어로 잘 보좌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외국인 장차관을 위해 모든 것을 영어 시스템으로 가동한다면, 부서 행정이 비능률적이 될 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행정부서가 외국인 장차관을 위해 존재하는 주객전도의 양상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장관이 미니스터(Minister, ‘작은 자’ 혹은 ‘종’의 의미)가 되는 게 아니라 국민과 하위 공무원들이 미니스터가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들의 한국문화 체험을 위한 연수의 장(場)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외국인 장차관에게 고도의 재량권이 부여될 경우, 그가 그 권한을 갖고 한국을 위해 충심을 다해 일해줄지도 의문이지만, 그 재량권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겠느냐도 의문이라 하겠다.

그럼, 외국인 장차관에게 재량권을 안 주면 될 게 아니냐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라면 외국인 장차관을 임용할 필요가 있을까? 외국인을 장차관으로 임용하는 이유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활용하기 위한 것인데, 대통령이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할 것 같으면 차라리 한국인 장차관을 활용하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외국인 장차관과 한국인 장차관은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우리는 대통령이 한국인 장차관을 다루듯이 외국인 장차관을 다룰 경우에 그 폐해가 어떠할 것인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그 결과는 <왕과 나>, 아니 <대통령과 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국인 장차관의 경우에는 아무리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았다고 해도 그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입장과 기반을 갖기 마련이다. 그는 한국사회 안에서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얽혀진 복잡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얼마든지 사회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을 견제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상 장관은 장관이라는 지위에서는 대통령의 아랫사람이지만 국무위원이라는 지위에서는 대통령과 대등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무위원인 장관이 국무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정부 안에서 장관은 실제로도 대통령을 일정 정도 견제할 수 있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왕이 자신이 임명한 신하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왕이 신하를 임명하기는 하지만, 막상 임명한 후에는 신하에게 일정한 권한을 떼어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점은 비단 정부뿐만 아니라 회사 등을 포함한 모든 집단에서 다 나타나는 현상이다.

통치자는 형식상으로는 분명히 장차관보다 위에 있지만, 그 장차관도 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애당초 일정한 사회적 지위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장차관으로 임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통치자는 사회적 파워를 보유한 자신의 아랫사람들 때문에 일정 정도는 마음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독주는 행정부 안에서도 어느 정도 통제될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견제는 비단 입법부나 사법부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이처럼 행정부 내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같은 한국인을 장차관으로 임명했을 경우에 국한된 이야기다. 만약 국내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국인을 장차관으로 임명했을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런 경우에는 행정부 내에서 장관을 통한 대통령 견제의 효과를 거의 기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대통령이 외국에서 데려온 장차관은 국내에 거의 기반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 장차관은 대통령에게 고도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아무런 연고도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대통령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을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대통령의 독주를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인 장관, 대통령의 독주를 강화하는 역할 할 수도

옛날의 제왕들이 다른 나라에서 재상을 초빙하거나 혹은 승려(예컨대, 신돈)를 재상에 모신 것은, 국내의 여타 정치세력과 별다른 친분관계가 없는 사람을 전면에 내세워 강력한 왕권정치를 펼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과거 한국·중국 등의 제왕들이 내시(내관)를 활용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내시로 활용한 것은, 오로지 군주에게만 충성하는 친위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과거의 내시들은 낮은 신분의 출신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귀족이나 고위 관료들과 별로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귀족·관료들과 결탁하여 왕을 위협할 가능성도 낮았다. 게다가 몸의 일부에 인위적 변형까지 가한 데에다가 자식마저 없으므로 세상일에 욕심을 부릴 이유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내시는 더욱 더 왕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시험을 거친 사대부 출신의 신하는 아무리 평소에는 충신일지라도 막상 왕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해친다고 판단되면 “전하,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내시들은 그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왕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이 진짜로 미행을 하러 나가건 어우동을 만나러 가건 간에 무조건 왕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의 입장에서는 내시들을 활용하는 것이 자신의 부정부패를 숨기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었다. 내시들을 시켜 비자금을 축적해 놓고도 막상 문제가 터지면 내시들을 방패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도 내시들이 “진짜 몸통은 따로 있다”고 폭로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역사 속에서 내시가 부정부패의 주범으로 몰려 지탄을 받은 경우의 상당수는 이처럼 ‘왕과 나’의 눈물겨운 의리를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왕의 입장에서는 내시세력을 통해 자신을 보호함은 물론 귀족세력을 견제할 수도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료집단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백성들의 동정을 직접 파악할 수도 있었다. 왕이 그들을 믿고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내시들이 여타 정치세력과 별로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만 믿고 한국에 온 외국인 장차관도 과거의 내시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다른 사회세력과 별다른 연관관계가 없기 때문에 부정부패의 위험성은 낮겠지만, 그만큼 그는 대통령을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대통령에게 고도의 의존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외국사상이나 관념을 갖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을 견제하려면, 대통령을 견제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고유의 정치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점에서 외국인 장차관은 한국인 장차관보다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국내에 아무런 정치 기반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을 견제하고 대통령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희망사항일 것이다.

물론 이따금씩 한국인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하겠지만, 만약 그런 아이디어가 필요해서 외국인을 기용하는 것이라면 굳이 장차관에 임명할 필요 없이 그냥 고문이나 자문위원을 시키면 될 것이다.

그런 안전한 방법을 놔두고 굳이 위험한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외국인의 두뇌가 필요하면 고문이나 자문위원을 대거 임용하면 될 일이지, 굳이 국가공무원법까지 바꿔가면서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외국인 두뇌가 필요하면 고문이나 자문위원을 임명하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외국인 장차관을 임용하는 데에는 쉽사리 해결하기 힘든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외국인 장차관을 통해 무언가의 성과를 거두자면 그에게 고도의 재량권을 부여해야 하는데, 외국인에게 대한민국 운명의 일정부분을 맡긴다는 것 자체도 두렵고 불안한 일이거니와, 외국인이 받은 바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신속히 파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반대로, 외국인에게 재량권을 주지 않고 다른 한국인 장차관과 똑같이 다룬다면, 한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외국인 장차관으로서는 대통령에게 한층 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대통령을 견제하거나 대통령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대통령의 독주를 강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외국인 장차관은 마치 <대통령과 나>처럼 대통령에게 고도로 의존하는 과거의 내시들과 유사한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시처럼 대통령에게 고도로 의존하는 외국인 장차관이 행정부 일부를 장악한다면, 행정부 안에서는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할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인 장차관은 대한민국 행정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보다는 대통령의 독주를 강화하는 데에만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태그:#외국인 장차관 임용, #정부조직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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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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