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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29일, 불운의 교통사고로 별이 된 조각가 구본주 4주기 추모전이 서울 갤러리 눈(창덕궁)에서 열린다.

 

故구본주 작가의 기일에 맞춰 29~30일 양일간 진행되는 이번 추모전의 컨셉은 '기억되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쉬움을 더해 가는 구본주 작가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가슴에 품은 동료, 선후배 작가 20여 명이 모여, 그에 관해 버리지 못한 기억들을 작품과 공연으로 형상화해 낸다.

 

1992년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민하며 각목을 잇대어 깎아 만든 자화상 <1992년 겨울>을 비롯하여, 시대의 표정을 담아낸 <노동> <6월>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 <눈칫밥 삼십 년> <위기의식 속에 빠진 그는> 등 구본주의 유작 10여 점도 함께 전시된다.

 

이번 추모전에서 독보이는 점은 구본주 작가를 매개로 만들어진 미술인 서포터즈 ‘구본주를 나르는 사람들(구포터)’의 등장이다. 이 모임은 지난해 8월 온라인 상에 만들어진 구본주 추모 블로그(http://blog.naver.com/chan_ta)를 바탕으로, 3주기 추모전에 맞춰 20여 명이 발대식을 한 바 있으며, 온오프라인을 망라하여 구본주 작가와 깊은 인연을 맺은 예술가들은 물론, 구본주를 기억하고, 사회적으로 기억시키고자 하는 일반인들까지 합세하여 현재 60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추모전 또한 기획에서 연출, 스탭까지 함께하고 있다. 29일 7시 추모 공연을 기획, 진행하는 문화노동자 연영석 씨도 이 모임에 속해 있다.

 

구본주 작가를 진정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작품으로 몸으로 마음을 담아낸 이번 전시는 화려하고 형식적인 추모전을 넘어, 소박하게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1992년 겨울_구본주 작가 작업 노트

 

1992년 겨울 구본주의 작업 노트 ● 지금은 그리 즐겨하지는 않지만 조각으로의 나의 시작은 그림이었다. 미술을 하는 대부분 이들의 유년 기억에 그림 그리기가 남아있듯 나도 그들 축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여섯 살 때였던가, 형의 여자 친구가 형에게 선물해 준 찰스 브론슨의 초상화를 무작정 베껴대던 때가 있었다. 이후로도 매일 그림만 그린다고 항상 형제들에게 빈축을 사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 그린다고 싫어한 것이 아니라 글씨로 채워 공부만 해도 모자랄 공책에 그림만 가득 차, 형제들에겐 그것이 낭비로만 보였던 게 아니었을까.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의 공책엔 항상 그림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난 글씨체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각각의 과목들로 나뉘게 되었을 때, 미술에 대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나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더욱 더 자신감으로 다가와 나의 일상을 유지시켰던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미술은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3 여름방학을 지내고 미대를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이의 시작이 그렇듯 로댕이나 부르델, 미켈란젤로를 동경하면서 나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무조건적인 서양의 모델링에 대한 환기 ● 그들을 따른 정통 모델링 덕에 2학년 무렵 전국대학미전에서 동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누구나 대학미전에 나가지만 당시 대학미전이란 4학년 중에서도 선발이 되어 나갔는데 2학년이었던 내가 미전에 나가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대견하고 대학시절 항상 들떠있던 자신감의 출발이기도 했다. 이후 한때 여행을 무작정 많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학 초기에 이루어지는 무조건적인 서양의 모델링에 대한 환기를 시킬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 중에서 경주 남산과, 석굴암 조각에 대한 나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역사' 아직은 시작하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작업을 하면서 끌어가야 할 열쇠로 간직하고 있다. 87년 우연히 알게 된 친구의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자족적인 미술을 넘어 ● 당시 민중미술이란 이름으로 대중화된 책 한 권, 그리고 그 책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교우관계가 나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로 던져졌고 지금도 남아 있는 고민들을 풀기 위해 작업을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업에 대한 나의 고민이란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정도였는데 이젠 한 걸음 더 나아가 '난 과연 어떠한 미술을 해야 하는가', '어떠한 미술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내 속에서만의 자족적인 작업이 아닌 다른 이들을 포함해서 생각할 줄 아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난 운동권이라 불리며 새로운 삶과 사고방식들을 접하게 되었다. 데모도 많이 하고 감옥에도 잠깐 갔다 오고 떨어지긴 했지만 총학생회장단에 출마하기도 했다. 새로운 생활들을 열정적으로 보내기도 하였지만 가끔씩 찾아드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회의로 군 생활도 안하고서 휴학 기간을 포함해 꼬박 7년 반이란 시간 동안 학생이란 신분을 달고 다녔다. 대학에서 마지막 일 년을 보낼 무렵 또 한 차례의 공백이 찾아왔다. 일생일대 가장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고민에 빠져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난 무엇을 해왔나, 그리고 지금까지의 활동이 앞으로의 삶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총학생회단 선거에 낙선되고 외부와 고립된 시간을 보내며 작업에만 몰두했었다.

 

고립과 몰입의 시간이 남겨준 선물 ● 모든 고민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작업했다. 탄탄한 모델링 덕분인지 자신감 있는 작품들이 나왔고 앞으로의 진로를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생활로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이후에도 계속 작업만을 하기 위해 작업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힘든 가정 형편임을 알면서도 부모님을 졸라 6개월만에 포천 고향 땅에 작업장을 짓게 되었다. 어려운 설득이었다. 나에 대해 걱정하고 못미더워 하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처음으로 공모전에 출품하였다. MBC 구상조각대전에 작품을 낸 것이다. 6개월을 준비하여 두 작품을 내놓았다. 한 작품은 입선, 다른 한 작품은 대상이었다. 그 일로 부모님의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삶에 대해 조급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고 난 후, 난 다시 조각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이젠 담담하고 차분하게...

 

현실 주변의 삶, 작업의 모티브가 되다 ● 나 스스로, 민중미술에 대한 재검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중이란 개념과 계급이란 부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작품의 모티브들을 집회 장소에서 현실 주변의 삶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개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천의 한구석, 나의 작업장까지 전달되는 TV의 일상에서 샐러리맨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비교되면서 나의 손은 청동으로 쇠로, 나무로 그들을 묘사하고 현실의 상황들을 연출한다. 첫 번째 개인전이 인사동 금호미술관에서 진행되었다. 기본적으로 전시장이 지하인데 다가 내가 다루는 재료 자체가 워낙 무거운지라 설치하는 데 무척 고생을 했다. 전시 전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도와준 동기며, 후배들이 너무 고맙다. 나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지켜봐 주는 동기, 후배 녀석들은 나의 두형의 재산목록 1호이다. 아무리 무거워도 와서 봐주고 옮겨주고 싶은 작품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한다. 그들이 나의 든든한 빽이 되듯, 나 또한 그들의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할 것이다. 서로의 영원한 동반작가로서.

 

민중미술 본연의 역할 ●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끝내고 마치 열병을 앓고 난 직후의 말까지 정신 속에 자신감만으로 꽉 차, 빈약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오버랩 되며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더 많은 허점들이 느껴진다. 내 작품 앞에서 배꼽 빠져라 웃던 관람객들, 한없이 진지하게 감상하던 관람객들, 그들에게 또 다른 새로움으로 다가가고 싶다. '민중미술이 현실 속에서 지향하는 미술의 진정한 민주화는, 대중 속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대중미술 문화로서의 본연의 역할'이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하다고, 나는 믿는다. ■ 구본주_1995년 <미술세계>에 쓴 글

 

 

 


 


태그:#구본주, #구본주를나르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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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갈 곳을 잃은 옛따책방 쥔장이자 한 아이의 엄마, 그리고 구본주를나르는사람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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