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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손에 볼펜을 쥐고 인생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문순태 작가.
ⓒ 서영화
"작가는 뜨거운 가슴, 따뜻한 시각으로 인간과 사물을 봐야 해요."

휴머니즘 정신이 바로 작가정신이라는 문순태 작가. 그는 <징소리>와 <철쭉제> 같은 우리민중의 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으며 올해 한국의 리얼리즘 작가들이 가장 선망한다는 요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장편소설 <타오르는 강> 완간에 전념하고 있다.

펜과 함께한 인생 65년. 그에겐 3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신문기자, 대학교수, 그리고 어느새 그의 이름이 되어버린 소설가.

"신문기자와 교수활동을 한 것이 소설을 쓰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죠."(웃음)

<징소리>와 <철쭉제>는 고등학교 시절 문학교과서의 단골메뉴였다. 그 당시 짧게나마 소설의 지문을 읽으며 '이 소설을 쓴 이는 대체 누구일까'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지난 1일, 전남 담양에 있는 문순태 작가의 창작 공간 '생오지'를 찾았다. 차를 타고 가며 교과서로만 알고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문순태 작가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후끈 들떴다.

인터뷰 문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볏짚 타는 냄새가 차창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시골 특유의 구수한 향내를 따라 창가로 고개를 돌려보니, 울창한 숲 사이로 드문드문 낡은 시골가옥이 보였다. 그 옆으로 늦가을 들녘의 금빛 벼이삭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로 얽혀 광활한 들판을 이루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차가 멈춰 섰다. 벌써 도착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문순태 작가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마중 나와 있었다. 엷은 흙빛 벙거지 모자 사이로 흰 머리 몇 가닥이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리고 있었다.

산골 선비의 집 같은 '생오지'

▲ 문학의 집 현관 앞 푯말.
ⓒ 서영화
광주에서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문학의 집 '생오지'는 넓적한 하얀 지붕이 이색적인 버섯모양의 집이었다. 집 앞에는 돌로 담을 쌓은 연못을 사이에 끼고 녹색 잔디를 덮은 정갈한 돌길이 징검다리처럼 나있었다.

현관 앞에는 유명 영화제의 레드카펫처럼 문학의 집에 오는 이들을 위해 짚으로 촘촘히 엮은 고풍스런 깔판이 깔려있었다. 마치 깊숙한 산골에 자리 잡은 선비의 집을 방문하는 것인 양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현관문에 가까이 가자 파란 글씨로 쓰인 푯말이 보였다.

"이 곳은 소설가 문순태의 창작공간입니다. 지금은 집필시간이니 방문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문학의 집 <생오지> 주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카페로 착각할 만큼 안락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푹신해 보이는 긴 의자 여러 개가 수많은 책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긴 의자 사이사이로 그의 인생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대별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었다.

문순태 작가는 1941년생의 노(老)작가다. 그는 6·25가 터진 뒤, 12살 때 고향 담양을 떠나 광주에서 생활하다 55년 만에 돌아왔다. 삶의 터전을 옮긴 그는 자유로워 보였고 마음의 평화를 찾은 모습이었다.

문순태 작가는 언론인과 대학교수의 옷을 벗고 정년이 없는 작가로 돌아오니 굉장히 자유롭다며 창가로 시선을 돌려 햇살 드리운 시골길을 바라보았다. 고향을 어머니의 자궁 속이자 소설의 텃밭, 뿌리라고 표현하는 문순태 작가. 고향을 말하는 그의 얼굴에 연신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내 소설의 뿌리를 찾아오니 작가로서 재출발하는 것 같고 소설의 뿌리를 더 튼실하게 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그에겐 고향만큼이나 애틋한 존재가 있다. 바로 어머니다. 그는 이번에 요산문학상을 수상한 <울타리> 같은 일련의 어머니 소설에서 농경 사회 어머니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모성본능만 있지, 모성애는 사라지고 있는 요즘 시대에 농경사회 어머니 상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작품을 썼어요."

도시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그는 산골 생활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수 가꾼 텃밭에서 고추, 상추 같은 채소를 심고 먹으니 시장 볼 필요가 없어 흐뭇하다고 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도 쏠쏠해요. 아까는 마을 사람들이 맛있는 생선 만들어놓고 술 마시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걸쭉한 그의 웃음이 정겹게 느껴진다.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니 하나도 안 외로워요."

올해 8월 정년퇴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산골생활은 벌써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생오지'에 오기 전 문순태 작가는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정년을 앞두고 그는 7000권 정도의 많은 책을 어디에 보관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문학의 집을 혼자 쓰기 아까워 창작실 겸 책을 보관하는 작은 도서관으로 만들기로 했다.

"동료작가들과 시인들의 기증본이 많아 차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 공간을 만들었죠. 허허." 문순태 작가는 오전 창작시간 외에는, 누구나 들어와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문학의 집을 열어놓는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작가들을 초청해 '시 낭송과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열기도 한다. 11월 10일에는 신덕룡 시인이 '나는 왜 시인이 되었는가'를 주제로 강의했다.

'세계문학전집', 소설가 꿈에 불을 지피다

▲ 문학의 집 앞에 정갈한 돌길이 펼쳐져 있다.
ⓒ 서영화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묻자, 청년 문순태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10대 종손인 그는 6·25로 집안이 힘들어지자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할 사명감을 느껴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허나 운명의 장난인지, 우연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고 2 때 우연히 선배 집에 놀러갔다가 '세계문학전집'의 한 편인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게 된 것. 그 전까지 <삼국지>만 읽던 그에게 <분노의 포도>는 색다른 소설로 다가왔다. <분노의 포도>를 다 읽은 후 그는 다른 문학전집도 읽고 싶어, 가난한 형편임에도 아버지께 사달라고 떼를 썼다.

"지금도 몇 권 있어요. 표지가 녹두색이고 두꺼운 것…. 저 밑에 꽂혀있어요."

문순태 작가는 기자에게 보여주려 먼발치에 있는 책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결국 아들의 성화에 못 이긴 아버지는 의대에 가는 조건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문순태 작가는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막상 다 읽고 나니, 의대를 완전히 포기하고 소설가 쪽으로 맘을 굳히게 되더라고요. 아버지를 배반한 거죠. 그래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나 봐요."

애써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엿보였다. 문순태 작가는 소설에 관심을 두고 문학인으로서 사상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전남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체계화된 학문으로 다가온 철학을 접하며 그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꼈다. 그 후 조선대 국문학과로 편입한 그는 생애 첫 소설인 <호랑이 탈출>을 썼지만, 너무 관념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낙선했다. 그 후 약간 토속적인 내용인 소설 <백제의 미소>를 완성하며 문순태 작가는 소설가의 길에 첫 발을 내디뎠다. <백제의 미소>는 백제 멸망 후 도공으로 전락한 백제유민들의 이야기다.

소설가 활동의 자양분 된 신문기자와 대학교수 생활

▲ 문학의 집. 넓적한 하얀지붕이 이색적인 버섯모양 건물이다.
ⓒ 서영화
대학 졸업 후 그는 1965년 <전남매일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신문기자가 되어 마음대로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시절에는 선거 때 야당후보에게 표가 많이 나오면 보복이 많았는데, 왠지 신문기자가 되면 우리 고향사람들을 보호해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생각이 들었죠."

기자생활 4년차에 접어들 무렵,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뒤이어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언론을 심하게 검열하기 시작했다. 기사로 사회를 비판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역사의 모순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금도 신문기자를 했던 것이 소설가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역사와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만약 신문기자를 하지 않고 소설가가 되었다면,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없는 순수문학만 했을 테죠. 하지만 앞서가는 작가라면 시대정신이 있어야 해요."

문순태 작가는 1985년 순천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조교수를 거쳐 1989년에는 <전남일보>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1996년부터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며 올 8월까지 제자양성에 힘썼다.

그는 소설가 지망생들이 작가가 된 후 금방 빛을 보지 못하거나 돈을 못 벌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문학은 평생 하는 것인데. 문학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죠. 해봐서 안 된다고 금방 포기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져야해요. 문학은 자기와 벌이는 외롭고 치열한 싸움이에요. 누가 더 오래, 끈기 있게 견디느냐에 따라 승부가 나요."

진지한 눈빛으로 당부하는 문순태 작가의 모습에서 미래 소설가들을 향한 진정이 느껴졌다.

경계인, 작가와 아버지 사이에서

문순태 작가는 가끔 아는 사람이 주례를 서 달라고 부탁하면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훌륭한 작가,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훌륭한 남편, 아버지 되기가 더 힘들고 중요하다고 항상 이야기해요."

일부 문인들은 가정보다 작품 위주로 생각하며 인간과 작품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순태 작가는 남편과 아버지 역할도 충실히 하면서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렵지 않겠느냐며 그런 사람이 더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느닷없이 물어봤다. "혹시 사모님을 위해 작품을 쓰실 의향은 없으세요?" 순간 당황한 듯 문순태 작가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잘못 쓰면 안 되니까. 허허, 안 써야죠. 쓰려면 수필을 써야지." (웃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엊그제 쓴 시가 있다며 보여주었다. "도시에는 닭이 한낮에도 울고, 제멋대로 울잖아요. 그런데 여기 닭은 옛날 그대로 새벽 그 시간에 딱 울어요. 그래서 새벽 닭 울음이라는 주제로 시를 써봤어요." (웃음)

곧이어 나지막하게 시를 읊조린다. 원래 삶의 터전으로 돌아온 소설가 문순태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시와 함께 그려진다.

새벽 닭 울음

끈이 긴 두레박으로 막 퍼 올린 샘물 같은 시간
너무 맑고 적막해서 소리 지르고 싶다.
내가 이 시간에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하루를 먼저 시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시에서 더럽혀지고 오만해진 나를 칼칼히 씻어
또 다른 내 앞에 무릎 꿇리기 위해서다.
신문을 기다리는 대신 닭 울음 속에 귀 기울이는 이 시간
내 마음에도 차가운 샘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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