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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의 혈액은행 소장인 데이빗 스트론섹 박사(David F. Stroncek)
ⓒ 오기현
내피를 원하십니까?

한국에서 영어강사를 하는 캐나다인 David Dion(26)씨는 자신의 혈액형을 모른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 학생이 혈액형을 묻기에 굉장히 당황했다. 수혈을 원하는 급한 환자가 있는 걸로 착각하고 되물었다. “혹 내 피를 원하십니까?”

SBS 스페셜 팀이 지난 주 워싱턴의 한 공원에 산책 나온 시민 10명에게 혈액형을 물어봤는데, 자기 혈액형을 아는 사람은 3명이었다. 한 여성은 제왕절개 수술할 때 병원에서 알았고, 두 사람은 헌혈할 때 알았다고 했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의 혈액은행 소장인 David F. Stroncek 박사는 혈액형이 다른 사람에게 수혈했을 때 거부반응이 일어난다는 것 이외에 혈액형의 다른 의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단 혈액형과 일부 질병간에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알려진 정도라는 것이다.

실제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혈액형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력서에 혈액형 기재란이 있는 나라도 우리와 일본뿐이다. 혈액형은 수혈할 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인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인은 왜 그다지 혈액형에 관심이 많을까?

우선 ‘피’ 즉 혈연을 중시하는 전통을 생각할 수 있다. 혈액형은 유전되므로 혈액형에 단순히 수혈에 필요한 정보 이상의 그 무엇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 일본인들의 혈액형에 대한 관심은 세계에서 제일 높다.
ⓒ 오기현
대인관계를 강조하는 동양의 전통 또한 중요한 요인이다. 처음 대하는 사람의 고향, 출신학교, 가정환경 등에 관심이 많은 우리의 정서상 혈액형은 유용한 정보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혈액형이라는 비교적 간단한 자료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할 뿐 아니라 대화를 풀어나가는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

네 가지 혈액형의 분포가 비교적 균질하게 나타나는 것도 혈액형별 성격유형을 유행하게 하는 요인이다. A : B : O : AB형별 각국의 비율은 영국인 43.4 : 7.2 : 46.3 : 3.1 프랑스인 43.8 : 10.6 : 43.1 : 2.5 등으로 A형과 O형이 90% 정도이지만, 일본인 37.3 : 22.1 : 31.5 : 9.1 한국인 34 : 27 : 28 : 11로 네 가지 비율이 골고루 나타난다.

유럽인들은 대체로 A형과 O형 두 가지 비율이 압도적이어서 혈액형별 성격분류가 별 의미가 없지만, 동양인은 네 가지 혈액형의 비율이 고르게 나타나므로 혈액형에 따라 성격을 분류하는 것의 의미가 있다. 또 적당히 꿰맞춰 이야기해도 맞을 확률이 1/3∼1/4나 된다. 그래서 사주나 점에 비해서 상당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남들이 다 믿으면 내 성격이 바뀐다

▲ 버넘효과 실험에 참석한 A,B,O,AB형 혈액형 학생과 시민
ⓒ 오기현
‘당신은 외향적이고 붙임성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심한 면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니오’ 라고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당신은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이 많아서 누가 부탁하면 거절 못하는 사람이다’는 평가에 대해 단호히 'NO'라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성격특성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버넘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점쟁이들이 얼렁뚱땅하는 말을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고하는 말이라 믿는 것이 그 경우이다. 성격에 관해서 혈액형 별로 모호하게 얘기해도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버넘효과 때문이다.

SBS 스페셜 취재진이 네 가지 혈액형의 사람 각 5명씩 20명에게 혈액형별 성격특성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감추고, 실제로는 똑 같은 내용의 설문을 제시하여 자신의 성격과 일치하는지를 물어봤다. 그런데 혈액형과 상관없이 설문의 70% 정도를 자신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대답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인데도 자신의 특이한 성격을 묘사하는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사회 전체가 혈액형별 성격분류를 믿게 되면 자신의 성격이 그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서울시 강서구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발표를 시켰더니 자신은 소심한 A형이어서 남들 앞에서 발표를 잘 못한다고 했다. A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감수성 강한 한 학생의 성격을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의 강사인 사카모토씨는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가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지 조사했다. 그런데 B형의 사람이 B형성격의 특성을 알게 되면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B형처럼 되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혈액형별 성격분류를 믿는 사회분위기가 작용한 결과다.

배우자 선택에도 혈액형은 기준

▲ 혈액형성격론 반대론자인 오무라 마사오(80)교수
ⓒ 오기현
일본의 심리학자 ‘오무라 마사오’교수가 한 여자대학 1학년의 심리학 강좌시간에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면서 혈액형과 성격은 관련성이 없다는 내용의 강의를 했다. 그리고 학기말에 질문을 해 보니까 “나는 아직도 혈액형별 성격분류를 믿는다”고 대답한 학생이 344명 중 168명(48.9%)이나 되었다.

이렇듯 혈액형별 성격분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일본 하마마츠 의과대학 명예교수인 다카다 박사는 아무리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혈액형에 대한 신념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결혼정보회사 듀오에 중매를 신청하는 미혼여성 중에서 특정 혈액형은 제외시켜달라는 비율이 20∼30%에 달한다. 주로 B형이지만 AB형을 피하는 여성도 가끔 있다.

그러나 혈액형과 성격 사이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단순히 재미로 또 상대방과의 대화를 열어나가는 자료로 활용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종, 외모, 성별과 같이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선천적인 그 무엇으로 인간의 성격이나 능력을 결정짓는 것은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인종, 외모, 성별에 이어 혈액형이라는 또 하나의 유사과학이 우리사회의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과학의 시대에 비과학적인 사고가 확산될 경우 우리 사회가 입게 될 불이익과 후유증을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오기현 기자는 SBS 스페셜 담당 PD이다. 8월 20일 밤 11시에 방송되는 <혈액형의 진실> 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취재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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