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들 때문이다. 요즘처럼 유럽의 섬나라 영국 소식이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게 된 까닭 말이다. 지난 해 7월 프리미어리그의 명문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단박에 주전자리를 꿰찬 박지성 선수. 최근 그에게 쏠린 국민적 관심 덕에 하루라도 영국발 뉴스가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가 됐다. 박지성에 이어 이영표 선수 역시 프리미어리그의 토트넘 홋스퍼에 입단, 축구 종가의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불과 몇 달 만에 그들의 소식은 우리에게 중요한 뉴스로 자리 잡았다. 이런 이유로 영국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층 친숙한 외국으로 다가오게 됐다. 박지성과 이영표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기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런데 시선을 영화로 돌린다면 과연 영국영화는 우리에게 얼마나 친숙할까?

탄광 노동자의 아들 빌리 엘리어트

 <빌리 엘리어트> 포스터
ⓒ UIP
거친 욕설이 난무하고 각박한 삶이 보편적인 영국의 한 탄광마을. 열한 살 소년 빌리(제이미 벨 분)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광산노동자인 아버지와 형과 함께 산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반항끼 다분한 형이지만 빌리에 대한 속정은 깊은 이들이다.

빌리는 여느 광산촌 소년들과 다름없이 아버지로부터 사내다움을 강요받아 권투장갑을 끼게 되었다. 문제는 빌리가 발레에 관심과 소질이 있었다는 것. 아버지는 빌리의 춤추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 충격을 받고 만다. 자기 아들이 계집애처럼 타이즈를 신고 춤을 추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영국 출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2000년도에 연출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 북부의 탄광마을을 무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2001년 초에 국내에서 개봉했었고 이후 비디오 및 DVD로 출시됐으며 몇 차례 공중파에서도 방영되었던 영화다.

허나 같은 영국영화라 할지라도 워킹 타이틀의 <네 번의 장례식과 한 번의 결혼식> <러브 액추얼리> <브리짓 존슨의 일기> 등에 비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국내 흥행도 워킹 타이틀 작품에 비해 형편없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한 장면
ⓒ UIP

사실 <빌리 엘리어트>는 별다른 경쟁력(?)이 없어 보이는 영화다. 어린 소년이 주인공이고 예쁜 여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암울해 보이는 탄광촌에는 늙수그레한 남자들의 거친 말투만 가득하다. 포스터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꼭 보라던 선배의 추천을 한 귀로 흘려버렸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덕분에 내가 본 가장 좋았던 영화 1순위이자 극장에서 놓친 가장 아쉬운 영화 1순위에 <빌리 엘리어트>를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개인과 사회의 고민을 동시에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빌리가 발레에 재능을 보여 스승의 헌신적인 지도와 가족의 희생, 그리고 본인의 노력 끝에 영국왕실 발레학교에 입학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만 보면 얼핏 평범한 '성장영화'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빌리는 탄광노동자의 아들. 귀족과 평민, 사용자와 노동자로 갈린 영국사회에서 빌리는 발레를 하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평민이자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었다.

길지 않은 상영시간이지만 <빌리 엘리어트>에는 영국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 중 영화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80년대 초반 영국 광산의 대규모 노동쟁의였다. 70, 80년대 산업합리화로 영국 철광산업은 쇠퇴의 기로에 선다. 그 직격탄을 맞은 것은 광산노동자들.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사용자들에 맞서 광산 파업을 주도한다. 하지만 빌리의 아버지는 동지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다. 이런 아버지를 보는 빌리의 형은 고개를 떨구고 만다.

<빌리 엘리어트>가 감동적인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생존권이 달린 심각한 파업현장이 영화의 배경으로 쓰이지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사태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좌우 한쪽의 시각만을 담지 않았다. 발레를 하고 싶다는 소년의 고민이 결국 사회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때로는 씁쓸하게 때로는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한 장면
ⓒ UIP

즉 한 소년의 '성장영화'라는 외피 속에 80년대 영국사회의 첨예한 갈등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노동자나 사용자, 귀족이나 평민, 한 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담기보다 그 상황 자체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판단에 맡긴다. 예컨대 우리나라 영화 <파업전야>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 방식이었다.

시나리오를 썼던 리홀은 70, 80년대 영국 북부에서 자란 자신의 경험과 시나리오 취재 중 만난 로열발레단의 댄서 필립 말스덴(Philip Marsden)에게서 영감을 받아 각본을 완성했다. 필립은 영화 속 빌리처럼 실제로 영국 북부 출신으로 광산 파업 투쟁을 하던 가족이 있었다.

영국 개봉 당시 에딘버러 영화제에서 웨스트엔드 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의 역사적 배경인 광산 파업사태를 잘 모르는 영국 젊은이들도 즐겁게 보며 한편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영화로 평가받았다. 한 시대의 대립과 갈등이 다음 세대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치환된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지닌 또 다른 의미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빌리'는 없었을까

요즘 한국영화를 보면서 '80년대 같은 분위기에서 감히 <그때 그 사람들>이나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가 나왔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사회 내 금기가 깨어지고 그것이 표현의 영역으로 흡수되었다. 이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우리 영화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정작 80년대 한국 사회의 치열한 분위기와 갈등을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 방식처럼 보여주는 영화를 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좌파들의 전유물(?)로 평가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계급간의 대결을 자극하지 않는다. 영화는 어떤 이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이념들이 상충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 와중에도 영화적 재미와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있다.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한 가장 근본적인 동인은 바로 영국사회가 경험했던 80년대의 갈등이었다. 그 갈등이 영화적인 소재로 승화되어 <빌리 엘리어트>같은 명작이 탄생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80년대도 지나간 시간이라며 단순히 후일담류로 치부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가만히 묻혀두기에는 우리의 80년대 면면이 너무나 극적이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한 장면
ⓒ UIP

새삼 <빌리 엘리어트>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나라 역시 이와같은 영화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격동의 시기였던 80년대. 그 질곡의 시간속에 우리에게도 빌리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소년들이 있었다. 자신의 삶보다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수많은 아버지들이 있었다. 그런 과거를 영화로써 지금의 젊은 관객에게 다시금 환기할 수 있다면 분명 한국영화의 또 다른 경쟁력 형성과 의미가 될 것이다.

지금 충무로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 그들에게 허락된 소재 선택과 표현의 자유가 과거 80년대 빌리의 아버지 같은 이들의 희생 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침내 왕실발레단의 대표 무용수로 무대를 박차고 오르는 청년 빌리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영화가 탄생하길 간절히 바란다. 아직 그런 영화를 보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남들에겐 졸작, 내게는 불후의 명작] 응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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