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4월 23일 밤, 일본 수상 고이즈미를 대면한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의 표정은 시종일관 싸늘했다. 대면 후 첫 악수를 나눌 때에도 그는 예의상 웃는 '외교적 미소' 조차 짓지 않았다. 회담 이후, 중국인터넷 게시판에는 "후 주석의 그 싸늘한 표정이 정말 죽여줬다"는 '찬사'들이 터져 나왔다. 표정만으로도 일본 고이즈미를 주눅 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양국 정상의 '싸늘한 회담'후 발표된 회담내용은 이전보다 진전되었거나 혹은 달라진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이 개최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만난 양국의 두 정상은 이날 밤 무려 55분간 긴 대화를 했지만 모든 문제해결은 역시 '대화뿐'이라는 원칙적인 결론만 합의하고 헤어졌다.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일관계가 나아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일본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우선 양국간 급한 상처를 봉합한 셈이다.

중국 정부 "반일은 이제 그만!"

▲ 16일 중국정부의 "시위 엄단" 경고를 무시하고 상하이에 보인 수천명의 반일시위대.
ⓒ 연합=AP
3주간 중국을 달구었던 반일열기도 차츰 봉합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 16일과 17일 상하이, 선양(瀋陽), 센젠(深천(土+川)) 등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반일시위 이후 중국정부는 불법시위 엄단 등을 선포하며 반일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각종 '작업'에 들어갔다.

일례로, 16일과 17일 베이징 내 반일시위를 주도했던 반일단체 주요 관련자들은 베이징 외곽의 한 위락시설에서 당국의 감시아래 이틀간의 특별 무료 휴가를 즐겨야만(?) 했다. 이들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원래 반일시위가 예정되었던 베이징 톈안먼 광장 주변은 시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경찰 경비가 매우 삼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작업'은 주로 <인민일보>와 <중국 중앙텔레비전 방송>(CCTV) 등 관방언론의 '안정과 이성, 법치 이데올로기' 유포로 나타나고 있다. <인민일보>가 주축이 된 정부기관지들은 한결같이 중국인의 이성적인 행동자제를 촉구하며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 "작은 일로 큰 것을 잃지 말자"고 주장한다.

지난 17일 이후 관방매체의 각종 사설과 논단, 방송내용의 주요 골자는 "아직 중국은 발전이 지상과제로서 사회 안정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때문에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것만이 가장 훌륭한 애국심의 표현이다"로 정리할 수 있다.

<중국 중앙텔레비전 방송>은 매일 오후 7시, 전국에 동시 방영되는 종합뉴스 시간에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노동자, 대학생,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매일 한 꼭지씩 내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상품 불매운동의 우매성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거리 인터뷰와 전문가들의 경제적 '설명'을 내보내며 "맹목적인 일본상품 불매운동은 '기초적인 경제상식도 모르는' 우매한 발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일본과의 교역량과 무역액 수치 등을 자세히 제시하면서 일본상품 불매운동은 결국 중국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고 강조한다.

▲ 22일 중국 베이징의 일본대사관 맞은편 길에서 중국 군인들이 훈련하고 있다.
ⓒ 연합=AP
중앙정부 차원에서 꾸려진 긴급 정세 선전단은 각 대학가와 대규모 사업장 등을 돌며 '중일관계 정세보고대회'라는 것을 열고 있다. 지난 1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처음으로 열린 리 쟈오싱 외교부장의 중일관계 보고대회 이후, 베이징과 톈진, 상하이, 광저우 등 반일 시위가 발생했던 주요 도시의 대학가에서는 이러한 보고대회와 함께 애국심을 표현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교육도 열리고 있다.

이렇게 '어르고 달래는' 교육과 함께 중국 공안부는 불법시위 엄단을 발표하며, '반일시위 강력 단속'이라는 강경정책을 선포했다.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 공안부는 "열정은 이해하나 허가되지 않은 시위에 참여하지 말라"고 함으로서 사실상 반일시위를 불허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러한 발표 이후에도 24일 중국 광저우 주하이(珠海)에서 약 1천여 명이 참가한 반일시위가 벌어지자 공안부는 시위를 강제해산 시킨 것은 물론 주모자급 수 명을 체포했다. 그동안 반일시위 계획을 알리고 주도했던 인터넷 반일 사이트들에 대해서도 선별 폐쇄하는가 하면 반일관련 격문들이 자주 올라오는 각 사이트 토론방도 폐쇄했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은 최근 이러한 정황에 대해 "반일여론을 꺾기 위한 정부차원의 이러한 각종 조치들은 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거의 처음"이라며 "당시에는 물론 이보다 더 했지만 지금 정부가 취하고 있는 일련의 방법들을 보면 그만큼 중국 내 반일시위 파급효과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칫 반일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같다"면서 "평소에는 제대로 시위를 할 수도 접할 수도 없는 중국의 특성상 이렇게 한번 물꼬가 터지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중국 정부의 반일열기 식히기, 그 속사정

▲ 4월 16일, 상하이 일본영사관 앞의 반일시위 모습.
ⓒ 김원식
중국정부가 반일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 정치적 함수들이 내재되어 있다.

첫 번째는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이다. 반일시위가 자칫 그동안 대일관계에 유화적이었던 중국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방향을 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위가 각 지역으로 파급되면서 반일 외에 실업문제나 부정부패, 빈부격차 등 각종 사회적 불만을 담은 이슈들이 한꺼번에 표출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실업자 수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 동북지방이나 민공(농촌에서 올라온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심한 광저우, 센젠 같은 도시에서 일어난 반일시위에 이들 실업자들과 민공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이러한 우려는 단순히 기우만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더군다나 지난 1월 19일 숨진 자오쯔양(趙紫陽)의 장례식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5·4운동 85주년과 6·4 톈안먼사건 16주년을 앞두고 있다는 것 역시 중국 정부를 부담스럽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흥분한 반일시위대가 반정부 시위대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경제적 이유다. 중국 내 반일시위가 자칫 중국의 혼란으로 비쳐져 대 중국 투자가 줄어들고 기존의 투자자들이 발길을 돌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중국 외자투자 기업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자본의 경제적인 '파워'를 고려했을 때 더 이상의 반일은 득이 될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인민일보>등 관방매체는 일본제품 불매가 일본에서의 중국제품 불매로 이어지면 양국 모두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상무부부장 보시라이도 반일이 결코 경제적인 측면에서 합리적인 애국이 아니라고 말했다.

▲ 시위대가 던진 돌에 유리창이 부서진 상하이의 일본식당.
ⓒ 김원식
세 번째는 사회주의시절 사라졌던 중국인의 시위문화가 자칫 반일시위 보도로 되살아날 것에 대한 경계다. '먹고사는 문제' 이외에 별 관심이 없는 중국인이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조금씩 정치의식도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시위 보도가 자칫 중국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시위문화를 일깨울 수도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잦은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빈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시위가 자칫 시위문화 부활에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 내 여론 분분 "그럼 무엇으로 반일을 하나?"

중국 정부의 이와 같은 반일여론 식히기 작업에 대해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각종 의견이 분분하다. 베이징 반일 시위를 주도했던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학생들은 대체로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는 반응이다.

베이징대 인문학부의 한 남학생은 "중국은 발전단계이고 대 중국 투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경제건설과 안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반일시위 참여를 유도하고 각종 사회적 불만의 목소리를 싣는다는 이유로 대학생들의 인터넷 커뮤니티(각종 대학 BBS)에 대한 통제가 심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 베이징대학 100주년 기념관 옆의 삼각지. 학생들의 관심은 높았지만 반일시위 관련 대자보는 찾아 볼 수 없다.
ⓒ 김대오
한편,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정부의 반일여론 통제 작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들도 쏟아지고 있다. 23일 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의 중일 정상회담이 끝난 후 인터넷 <신화왕>의 여론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올라왔다.

"최근 며칠동안 텔레비전 등에서 대학생들에게 안정이 어떻고 하는 것을 설교하던데, 이것은 일본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워졌을 때 호적 같은 부류들이 학생들의 책임은 오직 학문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별이 있는가? 외교부의 외교는 단지 유화정책만 있지 원칙은 없다."

"언론은 일본에 대해 이성을 가져야 하고 중국의 국력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다 맞는 말이다. 근데 왠지 정부가 민중들의 애국열정을 억눌러서 일본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 같다. 이건 실질적으로 일본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거다."

"정부는 효과적인 대일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민중들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반일 무기인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가 진정으로 민의를 존중한다면 방법을 제시해서 민중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 상하이 반일시위대.
ⓒ 김원식
일주일 뒤, 중국은 5·1 노동절 휴가를 맞는다. 원래 노동절 휴가기간 동안 베이징 등 전국에서는 5월 1일과 5·4운동 기념일인 4일에 대규모 반일 시위를 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시위는 이미 '불법'으로 간주되어 개최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하지만 24일 주하이 등에서 자발적인 반일시위가 재현된 것처럼 전국 각지에서 앞으로도 당분간은 소규모의 산발적인 반일시위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일정상회담 등을 통해 양국이 우선은 대화와 관계개선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중국 내 반일여론을 잠재울만한 실질적인 '행동'들이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반일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인터넷 등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각종 여론은 '아직 식을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반일시위는 억제되고 있지만, 중국정부의 근심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국의 한 시사매체 국제전문기자의 분석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번 반일시위는 단순히 일본에 대한 분노로만 폭발한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을 격노하게 만든 '근본원인'을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그동안 마음속에 쌓여있던 각종 분노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사회에는 빈부격차, 관료부패 등 각종 문제들이 누적되어 왔지만 정부의 통제로 인해 민중들은 그러한 분노를 외부로 발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중략) 분명한 것은 반일시위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반드시 반정부 시위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중국정부가 최근 반일시위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일관계로 인해 수많은 근심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중국정부 역시 지금 집정능력에 대한 심각한 시험에 직면해 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