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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있어요, CD 필요하세요?"
조그맣게 속삭이는 한 사내에게 CD 5장정도 필요하니 가져와달라고 했더니 멀지 않은 곳에 물건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한다. 가깝다던 그의 비밀 지하창고는 그 곳에서 10분 정도 거리로, 미로 같은 길을 따라 걸은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중관촌(中關村)을 거닐다 보면 어렵지 않게 불법 CD를 판매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 중관촌 CD지하 창고의 입구이다. 겉은 그냥 일반 CD가게와 비슷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면 창고에 각종 CD가 보관되어 있다.
ⓒ 김대오
후난(湖南)에서 왔다는 리롱(李榮)이라는 24세의 이 사내는 3년째 이곳에서 불법 CD를 팔고 있다고 한다. 그가 안내한 지하창고에는 컴퓨터 프로그램부터 음반, 영화 DVD까지 종류별로 없는 것이 없었다.

윈도XP와 포토샵 8.0의 가격을 물으니 원래 한 장에 10위엔(1500원)인데 8위엔에 주겠다고 한다. 이런 물건들은 어디서 가져오고 원가는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근처 공장에서 가져온다고만 하며 구체적인 대답은 피하는 눈치다. 영화 DVD는 4장을 샀는데 한 장에 6위엔씩 셈해 주었다.

실제 이들의 주 고객은 DVD 또는 음반 상점인데 도매로 대량 넘기다 보니 이윤이 적어서 한편으로 호객 행위로 개인고객에게도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공장에서 은밀하게 대량 제작하는 CD 한 장의 원가는 1~2위엔밖에 하지 않는다고 하니 시중에서 10위엔에 유통되는 CD는 중간 유통과정을 거치더라도 충분히 이윤이 남는 장사가 되는 셈이다.

리롱은 단속에 걸려서 벌금 1500위엔을 낸 적이 있다고 하며 단속을 피하기 위해 물건이 있는 지하창고와 호객행위를 하는 곳을 이원화하고 창고도 수시로 위치를 바꾼다고 알려줬다.

중관촌에서 만난 불법복제물 판매상 '리롱'

▲ 베이징의 한 DVD가게에 진열된 CD들, 전부가 다 다오반이다. 한 장에 10위에 팔고 있다.
ⓒ 김대오
물론 중국에서 판매되는 다오반(盜版 불법복제CD)이 모두 이렇게 은밀하게 거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공개적으로 다오반이 유통된다는 것이 이상스러울 지경이다. 베이징에 있는 음반이나 DVD를 파는 가게에서는 정판을 구입하기가 더 어려운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오반을 파는 상점과 그것을 단속해야 할 공안(公安) 사이에 모종의 거래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추측도 제기된다.

왕징의 한 DVD 가게에 공안 차량이 자주 오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단속을 눈감아 주는 조건으로 상점에서 모종의 거래가 오가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허가증까지 갖춘 많은 CD가게들이 어떻게 한결같이 다오반을 버젓이 진열해 놓고 팔 수 있단 말인가.

2003년 국제음반협회 통계에 따르면 중국시장에서 음반 정판은 1.1억장, 다오반은 25억장이 유통되고 있으며 다오반의 가치가 200억 위엔 상당에 이른다고 한다. 유통되는 CD의 4.4%만 정판이고 나머지는 모두 다오반인 셈이다. 12월 6일 <법제(法制)신문>에 중국영화국 부국장이 소장한 CD도 모두 다오반이라는 것이 기사화 된 적이 있는데 중국인들의 반응은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이다.

중국과 중국진출 외국 콘텐츠산업 관계자들은 중국 정부의 소극적인 다오반 단속만 기대하고 있을 수 없어 대부분 자체적으로 반해적판기구를 결성하여 단속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투자비용에 비해 기대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 내 유통되는 시디 중 95.6%가 '다오반'

▲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서병문원장과 중국판권협회 천런간이사장이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한 한중양국의 공동 노력을 내용으로 하는 협약에 조인하고 있다. 12월 6일 베이징 쿤룬호텔.
ⓒ 김대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산업 업체들도 중국 다오반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고 있다. 지난 12월 6일, 제3회 한중문화산업포럼이 베이징 쿤룬(昆侖)호텔에서 개최되어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과 중국판권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포럼의 주제가 '저작권산업과 문화산업 발전'이었기 때문이다.

천런간(沈仁干) 중국판권협회 이사장은 축사에서 “지적 결과물로서 저작권 자체가 선진 생산력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된다”고 전제하고 “중국은 2001년 WTO에 가입하면서 '무역과 관련한 지적재산권협정'을 이행하고 있으며 중국판권협회 산하에 반해적판위원회를 발족시켜 저작권 보호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포럼에 참석한 한국문화산업 관계자들의 발표내용에 따르면 중국 내에서 저작권을 제대로 보호받지 않아 한국기업이 입은 손해가 적지 않았다.

시엘케이오(CLKO) 김성훈 실장이 밝힌 마시마로(Mashimaro)의 저작권 침해 피해는 연간 도서 해적판으로 500만 위엔, 모바일 다운로드에서 300~500만 위엔, 완구문구영역에서 5000만 위엔 이상이었으며 2001년 이후 2년간 총손실액은 대략 1억 위엔을 넘는다고 한다.

웨마데(Wemade) 박상열 CEO도 2000년 중국 게임시장에 진출하여 중국S사와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지적재산권 침해 문제로 로열티 송금이 중단돼 법적 소송에 휘말렸으며 결국 라이센스 계약을 해약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문화상품의 생명력이 길지 않은 콘텐츠산업에서 장시간 소요되는 법적 소송은 결과에 관계없이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고충을 털어 놓기도 하였다.

한국문화산업 피해도 적지 않아... 중국정부, 다오반 구실-해악 저울질

중국시장에 진출한 우리 문화상품이 한류다, 뭐다 요란하지만 경제면에서 실속을 차릴 수 없는 구조적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다오반이다. 이날 포럼에서 한중 양국이 처음으로 지적재산권보호문제를 함께 토론하고 또 협약을 체결하여 공동 협력하자는데 의견을 모은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적재산권 보호가 열악한 중국 시장에서 우리 문화상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지켜내기는 여전히 쉽지가 않아 보인다. 우리 상품에 대한 법적 등록을 우선 하고 중국의 법률환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하는 방법 외에 현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 실정이다.

중국으로서는 다오반 덕분에 고가의 선진 소프트웨어와 문화상품을 저가로 환원하여 유통시킴으로써 경제 손실을 많이 줄일 수 있던 것도 사실이다.

▲ 길거리에 좌판을 벌리고 다오반DVD를 팔고 있는 한 노점상의 모습이다.
ⓒ 김대오
다오반이 중국 경제발전에 톡톡히 그 역할을 해 왔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할 것이다. 또 중국정부가 지금이라도 강력한 단속을 펼친다면 다오반이 이렇게까지 기승을 부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중국정부는 지금 다오반의 구실과 해악을 저울질하며 강력한 단속의 시점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선진 문화상품을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고가로 수입하느냐 아니면 자국의 IT, 문화산업 발전이 더뎌지더라도 좀더 현 체제를 유지하느냐를 놓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WTO 가입 이후 지적재산권 보호에 대한 선진국의 압력이 커져 감에 따라 제도는 마련하고 있긴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교묘하고 비밀스럽게 다오반을 제작해 단속이 어렵다는 엄살을 떨며 시간을 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3년 중국의 소프트웨어산업은 GDP의 1.4%를 차지하고 업체 8737개, 종사자 62만 명이 있으며 수출액 20억 달러를 기록하는 급성장을 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자국의 문화산업보호를 위해서라도 언제까지 다오반을 눈감아 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중국으로서는 자국의 문화상품 경쟁력이 생길 그 날이 오길 기다리며 다오반과 불편한 동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너 없이도 너와 함께도 살 수 없다'는 모순된 현실속에 오늘도 다오반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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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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