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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로 이어지는 일요일인 26일 아침에도 일어나보니 <조선>과 <동아>가 배달되어 있었다. 영리적인 판단이겠지만 그 정성만은 높이 살만하다. 문제는 두 신문에 나란히 실린 사설 하나가 편안한 마음으로 명절을 조용히 지내려고 했던 기분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점이다. ‘“한국은 한·미 水平 관계의 준비가 돼 있는가”’(조선)와 ‘韓美, 수평관계 이룰 준비 돼 있나’(동아)가 그것이다.

새로 부임한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가 한 강연회에서 했다는 “미국은 한국과 수평적 관계를 이룰 의지와 준비가 돼 있는데 한국이 준비돼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을 마치 신(神)의 계시처럼 받들면서 우리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는 내용이다.

오로지 이 사설을 위해 굳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찍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선>의 망발을 들어보자. <동아>는 <조선>의 ‘붕어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권과 지지자들이 국제정치에서 ‘대등(對等)의 코스트(비용)’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 ‘대등한 부담’이 없는 ‘대등한 관계’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서 이런 천진난만하고 일방적인 동맹관계는 없다. ···힐 대사의 질문은 한국의 지도부에게 ‘대등한 관계’를 위한 부담을 떠맡을 각오를 묻는 것이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하다. 우리가 대등한 부담을 외면한 대등한 관계만을 추구하고 있는가? 정말이지 <조선>의 기자들은 한번이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보도의 ‘객관성’에 대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다. 힐 대사가 한국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수평적으로 교정할 마음으로 그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임 힐 대사의 발언은 ‘대등한 자주국가’의 비전을 역설한 노무현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한 기선제압용이었다. ‘수직적’ 관계에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로 보아야 한다. 두 신문은 이 맥락을 무시하고 미국 정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우리가 국제정치에서 대등의 코스트(꼭 이렇게 영어 단어를 동원해야 하는지도 한심스럽다)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가? 선택의 여지 없이 미국의 대량살상무기(그것도 불량품)를 구매해야 하는 비용은 천문학적 수준이다. 국민의 절대적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에 파병한 ‘코스트’는 또 무엇인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천진난만하고 일방적인 동맹관계라고 했다. 맥락을 거세하고 보면 맞는 말이다. 우리처럼 일방적으로 불평등한 동맹관계를 강요받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정직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불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조선>과 <동아>는 미국이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점이 다르다.

<조선>은 늘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를 들여다보고 평가하며, 부시와 코드를 맞추어 한미관계를 조명한다. 북한의 인권과 민주화를 유독 강조하는 힐 대사는 당연히 <조선>과도 코드가 일치한다. 물론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불행한 요인들이다.

북한 전문기자라는 김인구 기자의 25일자 칼럼 ‘위기로 치닫는 한·미 共助’도 그렇다. <조선> <동아> 기자들에게는 미국이 획책하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는 안중에 없고 한미공조(관계)의 위기만 보인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부시 정권의 불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24일치 2면 톱으로 ‘“美, 北 核 수출땐 독자 선제공격”’을, <동아>는 같은 날 5면 톱으로 ‘“美, 한국 불신땐 독자공격”’을 각각 배치했다. 미국 기업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제시했다는 한반도 6가지 시나리오를 소개한 내용이다.

“북한이 핵 장비를 수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을 때 미국이 한국에 이를 알리지 않은 채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북한의 패배로 끝난다는 것”(조선)이다.

한국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한국의 외교안보팀이 (친북세력 또는 북한에) 정보를 흘리거나, 미국의 강경 대응에 반대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동아)이라고 한다. 미국 극우분자들의 이런 황당무계한 전쟁놀음이 <조선>과 <동아>에게는 늘 주요 기사로 둔갑한다. 짝퉁 민족지 <조선>과 <동아>는 미국의 전쟁음모에 선무공작을 자임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북한에 그런 움직임이 없더라도 미국은 필요하면 일방적으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멀리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통킹만 사건이나, 가깝게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도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적의 신문이라면 미국의 음모를 경계하며 이런 황당한 시나리오를 비판해야 옳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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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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