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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A7면 허엽 문화부 차장의 9월13일자 칼럼 '이젠 독자마저 모독하나'를 읽었다. 열린우리당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밀어붙이려 한다는 신문법(가칭)의 내용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허 기자의 지적에 대해서는 나도 꽤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우선 밝힌다.

허엽 문화부 차장은 "이 법안을 추진하는 이들은 신문시장을 동아 조선 중앙일보가 독과점하고 있고, 사주가 편집권을 좌우해 여론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서 "3개사의 독과점은 TV와 인터넷 등 달라진 여론 조성 환경을 외면한 주장이고, 공정거래법 규정(3개사 75%)에도 맞지 않는다. 소유 지분 분산도 재산권 침해 등 위헌 소지가 다분하고 합리적인 근거도 없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허 기자가 귀담아 들을 만하다며 소개한 92년 호주의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지(紙)가 낸 성명에는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사주는 유능한(good) 편집장을 해고하고 무능한(bad) 편집장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신문의 질과 발행 부수에 영향을 미친다."

사주가 양질의 신문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려면 훌륭한 편집장을 임명하고 자율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자율성 보장 여부가 신문의 질을 좌우하고, 나아가서 판매와 경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이 사기업인 신문사의 편집권 문제에 정색을 하고 나설 이유가 없다. 편집국의 자율성 보장은 그 신문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스스로 질을 떨어뜨리고 망하는 길로 가겠다는 데야 누가 말리겠는가. 그런 신문은 퇴출되는 게 정상이다. 다만 법은 기자들을 위해 안전장치 내지는 보조장치로서 기능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허 기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허 기자는 원론에만 충실하고, 한국신문시장의 구체적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린다. 허 기자는 "독자들은 사주의 뜻대로만 만든 신문을 눈감고 받아들일 만큼 판단력이 없는 것일까"라고 반문한다. 허 기자는 독자의 판단력을 과신하고 있거나 자극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허 기자는 "언론이 명예훼손을 우려해 병역 기피 혐의 연예인들을 이니셜로 보도해도, 이미 인터넷에선 실명이 떠돈다"는 사례로 독자들의 안목을 추켜세운다. 병역 기피 혐의 연예인들의 실명이 인터넷에서 떠도는 것과, 왜곡보도를 걸러내는 판단력이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허 기자의 동료인 김순덕 기자(논설위원)는 9월11일자 칼럼 '테러리스트와의 동침'에서 "남북이 테러리스트가 돼 동거하는 기현상이 나타난 거"라며 "결국 이 나라는 북한이 원하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가는 상황이 됐다"고 선동했다. 도대체 <동아>의 칼럼과 사설들에서는 지성의 향기는 고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노력의 흔적도 발견하기 어렵다.

이 칼럼이 색깔론을 동원하여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판별할 수 있을까?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특히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40대 이상 독자들 대부분이 하나의 신문만 구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판단은 비교와 토론, 검증 등을 거쳐 나오는 법이다.

허 기자는 단호하게 주장한다. "소유 지분 제한과 편집권 법제화도 '독자의 렌즈'로 보면 어이없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주가 편집권을 전횡하는 신문은, 내부의 비효율성으로 독자가 요구하는 지면의 품질이 유지될 리 없다. 그런 지면에 구독료를 낼 독자도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소유지분 제한이나 편집권 법제화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별 관심도 없다. 단지 경험에 의해 신문지면의 품질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19%로 극격히 떨어진 것으로 조사된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그런데도 조중동의 독자들은 큰 변동없이 구독료를 내고 있다. 신문법의 취지도 바로 이런 '기현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지 독자를 모독해서가 아니다.

동아일보 지면의 품질이 유지되고 있지 않으면서도 구독료를 내는 독자들이 유지되고 있는 비밀을 허 기자도 모른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전거와 비데를 거쳐 5~7만원 상품권도 모자라 추가로 6개월 공짜 신문 구독. 돈으로 독자의 의식을 붙들어매는 꼴이다. 독자를 모독하는 게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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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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