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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질랜드에서는 두 명의 무슬림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는 두건 부르카(burqa)를 착용하고 법정 증언에 나서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7월 28일 오클랜드 지방 법원에서 차량 절도 사건으로 기소된 압둘 라잠주(39)에 대한 피의자 심리가 열렸는데, 여기에 증인으로 나선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파라이바 라잠주(20)와 파우쟈 살림(34)이 부르카를 쓴 채로 증언하기를 고집하여 문제가 된 것.

무슬림 여인들, 부르카 착용 끝내 고집

▲ 부르카를 쓴 채 법정 증언에 나선 무슬림 여인들
ⓒ 뉴질랜드 헤럴드

피의자측의 콜린 아메리 변호인은 "두 여인들이 부르카를 쓴 채로 증언한다면 법정이 그 진술의 진실성을 올바르게 가늠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증인들이 부르카를 벗고 증언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지 변호인으로서 내게 주어진 임무를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나는 증인의 바디 랭귀지나 다른 특징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것이 필요한데, 얼굴 가리개를 하고 있으면 그러한 것들을 거의 감지할 수가 없지요. 판사들은 종종 배심원들에게 증인을 유심히 관찰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증언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증언이 말해지는 방식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증인들은 부르카를 벗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경찰 측에서는 법정을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오직 판사, 경찰, 아프가니스탄 통역자 그리고 변호인과 피의자의 앞에서만 부르카를 벗는 방법을 증인들에게 제안했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뉴질랜드에 왔으면 그들은 이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우리나라(뉴질랜드)에 있고 우리나라 법은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복장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피의자 심리를 주재한 러셀 캘랜더 판사는, 증인들의 부르카 착용 여부는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말하면서, 피의자의 변호인이 제기한 이러한 요구에 대한 즉각적인 결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캘랜더 판사는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의견 개진을 듣고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오는 10월 26일까지 이 건에 대한 심리를 휴회하기로 했다.

▲ 이번 사건을 풍자한 시사만평. "봐라, 네 의뢰인이 우리가 얼마나 편의를 잘 봐주기를 바라는지를."
ⓒ 뉴질랜드 헤럴드
인종문제위원회의 조리스 드 브레 위원장은 이번 사례는 뉴질랜드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일로서 법원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의 인권법 제20장은 자신이 믿는 종교와 믿음을 사적으로 또는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는 문제라고 그는 지적했다.

<시민의 자유를 위한 뉴질랜드 변호사 모임>의 마이클 보트 의장은, 증인들이 종교적 실천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의자 역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 두 권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절충안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 헤럴드> 지는 7월 30일자 사설을 통해, 경찰이 증인들에게 제안했던 내용이 바로 그러한 절충안이 될 수 있었는데도 증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몹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종교적 자유와 사법적 정의, 어느 것이 우선인가

또한 <뉴질랜드 헤럴드> 지는 8월 2일자 시사만평에 이번 사건을 풍자하는 만화를 게재하여, 법정에 선 증인이 얼굴을 가린 채 증언을 하게 되면 판사와 변호인과 배심원 등도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게 되어 올바르고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이슬람 동맹 협회의 자브드 칸 대표는 부르카를 착용하는 것은 중동 특히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여인들에게는 매우 일반적인 관행임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한 나라들에서는 증인들이 장막으로 가려진 상태로 증언을 하거나 또는 서면으로 증언을 하는 경우도 자주 있기에, 부르카 착용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아프가니스탄 협회의 시라즈 살라르지 대변인 역시, "법정 증언에 나선 무슬림 여인들에게 부르카를 벗도록 한다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면서 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즉, 부르카를 벗고 증언을 해야만 한다면, 무슬림 여인들은 얼굴이 노출된다는 염려 때문에 범죄에 대한 정보 제공을 꺼리게 될 수도 있고, 이는 뉴질랜드의 치안과 사법 시스템에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누가 되었든 간에 그들(무슬림 여인들)에게 얼굴 가리개를 벗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큰 모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굴 가리개를 하는 것은 무슬림 여인들에게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관습임을 지적하는 그의 말처럼, 이슬람 국가들에서 차도르나 부르카 같은 가리개(히자브)로 얼굴과 몸을 가린 여성들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의 증인들이 살았던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이슬람 강경노선을 취한 탈레반 정권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도 카불에서는 지금도 절반 이상의 여인들이 부르카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카불을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에서 만나는 여인들은 거의 모두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도 조금씩 변화의 물결이 있어 최근에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최초로 두 명의 여성이 국가 대표 선수로 올해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할 예정이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100미터 달리기에 참가하는 로비나 무킴야(15)와 유도 선수로 출전하는 프라이바 레자이(17)가 바로 그 주인공들.

그러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비이슬람교도들에게 얼굴과 신체를 드러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강한 비난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타협안을 내서, 무킴야의 다리가 보이지 않도록 긴 바지를 입고 100미터 달리기에 출전하기로 했다.

여권과 운전면허증을 둘러싼 논란

▲ 부르카를 쓴 채 찍은 사진이 붙어 있는 운전면허증(유고슬라비아)
ⓒ 뉴질랜드 헤럴드
이처럼 타협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지난 해 미국의 플로리다에서 있었던 한 사건은 타협이 불가능한 것으로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무슬림 여인인 술타나 프리맨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그녀의 운전면허증에 쓸 사진 촬영을 부르카를 착용한 채로 하겠다고 고집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녀는 이 문제를 법원에 정식으로 제기했지만, 법원은 그녀의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법정에서 부르카를 착용한 채로 증언을 했다.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뉴질랜드도 사정은 비슷해서, 특히 여권 발급 주무부서인 내무부와 운전면허증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육상교통안전청의 경우에 무슬림 여인들의 부르카와 관련하여 곤란함과 번거로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뉴질랜드의 운전면허증도 운전자의 실제 얼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진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어서 부르카를 착용한 상태로 촬영된 사진은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머리에 두르는 터번이나 스카프는 허용이 된다고 육상교통안전청의 앤디 낵스테트는 밝혔다.

또한 여권에도 안전상의 이유로 정면을 향하고 있는 큰 얼굴 사진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종교적 또는 문화적 이유로 인하여 남자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은 여성들을 위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내무부의 토니 월러스 대변인은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입장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은 그들의 얼굴이 모두 드러나는 사진을 우리에게 제공해야 하긴 하지만, 우리는 그 경우에 오직 여성 직원들만이 그러한 정보를 취급하고 처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헤럴드> 지가 사설과 시사만평 등을 통하여 이번 사건에 조심스럽지만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견지에서이다. 즉, 이번 사건이 기본적으로 종교적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지만, 그 한계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양보나 패배에 의해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협을 위한 여지나 상식의 통용이 이번 사건을 풀어나가는 열쇠가 될 것임을 지적하면서 <뉴질랜드 헤럴드> 지는 지난 주 유럽인권법원에서 있었던 판결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스탄불 대학교에 재학중인 터키의 한 대학생이 정학 조치를 당했는데, 그것은 종교적 이유로 그녀가 쓰고 다니는 머리스카프가 학교의 복장규칙을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불복한 그녀는 유럽인권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공립학교에서 이슬람의 머리스카프를 금지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민주적 가치와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신앙의 자유로운 표현을 다소 제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유럽인권법원의 이 판결은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이번 부르카 착용 법정 증언 사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뉴질랜드 헤럴드> 지는 밝히고 있다.

개인적인 종교의 자유와 공정한 법의 집행이라는 사법적 가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오는 10월 26일 오클랜드 지방법원에서 재개될 예정인 이번 사건의 심리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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