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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 모로(Aldo Moro),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여느 가정집과 별반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 한 아파트의 급조된 밀실에서 형이 언도되고 지금까지 복면으로 신분을 숨겨온 세 젊은이가 복면을 벗는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접사(close-up)된다. 올해 초 2월 4일, 프랑스에서 개봉돼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이탈리아 마르코 벨로치오 감독의 영화 <밤이여 안녕(Buongiorno notte, 2003)>의 마지막 장면이다.

▲ 체자레 바티스티
ⓒ 바티스티HP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 대표이자 전 총리였던 알도 모로는 1978년 3월 16일, 이탈리아의 극좌 테러단체 <붉은 여단(Brigate Rosse)> 에 납치됐다가 이로부터 54일만인 5월 9일, 정차된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옛 이탈리아 극좌 무장단체 지도자 '바티스티' 전격 구속에서 송환 판결까지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어진 2월 10일, 프랑스에서는 옛 이탈리아 극좌파 운동 그룹 <공산주의 무장 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PAC)>의 지도자이자 작가인 체자레 바티스티(Cesare Battisti, 49)가 전격 체포돼 파리 쌍떼(Sante) 감옥에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이탈리아 우파 정부의 바티스티 본국 송환 협력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0년대 말 바티스티가 이탈리아에서 조직한 PAC는 <붉은 여단>과는 다른 급진적인 소수파 무장 그룹이었다. PAC를 이끌었던 바티스티는 1978년 이탈리아 북동부 우디네에서 교도관 1인, 1979년 밀라노에서 경찰 1인, 1979년 2월 메스트레에서 네오파시스트 활동가 1인 등 총 3건의 살인과 1979년 보석상 총격 살인 미수 그리고 다수의 총기 강도 사건 등의 혐의로 1988년 밀라노 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바 있으며 이 재판은 1993년 3월 31일 열린 또 한 번의 궐석재판에서 재확인됐다.

그러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탈리아 국경을 넘는데 성공한 바티스티는 1991년, 프랑스로 망명해 파리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또 지금은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세리 느와르(Serie Noire, 갈리마르 출판사의 추리 소설 시리즈) 작가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바티스티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항의 여론이 빗발쳤다. 프랑스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바티스티 지지 운동에 동참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누보 누보로망의 선두 주자 필립 솔레르, 베르나르-앙리 레비, 한국에는 보엠 시리즈로 알려진 단 프랑크를 비롯해 사회당, 녹색당, 프랑스공산당과 함께 극좌 정당들도 바티스티의 편에 섰다.

이와 동시에 시작된 '바티스티 석방 촉구' 서명운동에는 순식간에 2만3천여 명이 참여했고 다양한 항의시위도 벌어졌다. 프레드 바르가스가 쓴 <바티스티에 대한 진실(La vérité sur Cesare Battisti)>이라는 책은 초판 1만부가 금세 바닥이 났다. 이렇게 해서 바티스티 사건은 프랑스 사회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론의 입김때문이었을까. 지난 3월 2일 파리 법원은 바티스티의 석방(불구속 재판)을 결정했고 당일 오후 8시, 바티스티는 법정 감독 하에 쌍떼 감옥을 나섰다. 그러나 4월 7일부터 시작된 바티스티 송환 심리가 이어질수록 바티스티의 미래는 어두워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달 30일, 파리 법원은 바티스티의 본국 강제 송환을 판결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달 2일 열린 제 23차 프랑스-이탈리아 정상회담에서 자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바티스티 사건을 언급하며 이라크 전쟁으로 빚어진 양국간의 반목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길’에서 양국의 협력을 다짐했다. 바티스티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켜온 시라크 대통령은 여기서 "이탈리아의 바티스티 송환 요청에 답하는 것은 프랑스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말했다.

"과거와 절연한 활동가들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지 않는다"

"극좌 과격 무장 단체 활동 전력이 있는 1백여명 이상의 이탈리아인이 프랑스에 정착했다. 과거와 단절을 선언하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이들은 본국 강제 송환을 통한 모든 종류의 탄압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라고 나는 이탈리아 정부에 통보했다."

1985년 4월 20일, 사회당 소속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이와 같이 발표한 바 있다. 이름하여 <미테랑 독트린>. '치욕', '불공평' 등의 수사를 달며 현 프랑스 정부의 태도를 거세게 비난하고 있는 바티스티 지지자들이 기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프랑스의 약속'이다.

프랑스의 형사소송법 제 368항은 '어느 누구도 동일 사건으로 두 번 재판받을 수는 없으며 이것은 신성 불가침의 원칙'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84년 이탈리아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바 있는 옛 <붉은 여단> 단원 세르지오 타르나기의 경우, 이탈리아 송환에 반대하는 그의 소송이 1986년 파리 공소국(公訴局)에서 기각됐으나 1998년 보르도 공소국은 형사소송법 조항을 근거로 타르나기의 석방을 결정했다. 결국 이탈리아 정부의 재요청으로 다시 수감됐지만 말이다.

그러나, 2002년 8월 옛 이탈리아 공산주의연합 전투원이었다가 프랑스로 망명, 파리 8대학의 강단에 섰던 파올로 페르시체티의 본국 송환때 부터 프랑스 정부는 <미테랑 독트린>을 역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프랑스에 있는 이탈리아 망명자 모임은 바티스티의 운명이 또 다른 십여 명의 옛 활동가에 미칠 영향에 대해 깊은 우려를 숨기지 않는다.

'죽음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 무장 혁명의 실패로 인해 수천 명이 투옥됐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망명한 1백여 명의 이탈리아인은 특수한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극단적인 빈곤 상황에서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과거는 과거로 남지 못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 것이 이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빚이 된 것이다.

영화 '밤이여 안녕'은 <붉은 여단> 조직원인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 시아라의 눈으로 이탈리아의 70년대를 되돌아 본다. 영화 후반부에서 시아라는 동료 3명의 식사에 수면제를 타고 알도 모로에게는 동료들이 갖다주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쪽지를 숨겨 보낸다. 이윽고 동료들이 잠든 사이 알도 모로는 시아라가 열어놓은 밀실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시아라의 소망이고 꿈일 뿐이었다. 알도 모로를 죽인 것도, 그리고 비록 꿈 속이긴 하지만 알도 모로를 끝까지 구해내고 싶어한 것도 시아라였다. 시아라는 70년대를 헤쳐온 이탈리아 젊은이들의 혼란스러운 초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혼돈의 시대', '죽음의 시대' 이탈리아의 1970년대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 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그 강렬함이나 폭력적 측면에서 그리고 10년간이나 지속된 기간면에서도 다른 유럽 국가와는 이질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이탈리아는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학생 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교육 민주화와 대중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학생들은 정통 가톨릭교와 경제 기적으로 변형된 사회에 격분했고 좌파 그룹의 이데올로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이탈리아공산당(PCI)에 비판적인 동시에 적극 가담했다.

1966년 로마와 토렌토의 대학을 시작으로 1967년에는 밀라노에서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서 파업과 시위, 건물 점거 등의 반체제 물결이 폭발했다. 좌파와 네오파시스트 사이에서 학생과 경찰 사이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이와 같은 정치 사회적 불안은 1970년대를 관통했지만 그러나 1968년 봄을 전후해서 학생운동은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특수성은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한다. 파업과 시위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운동이 속속 전개됐고 폭력은 여전했다. 극우파 그룹이 조직되고 극좌를 맹공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69년 12월 12일에는 밀라노의 폰타나 광장에 위치한 국립농업은행에서 폭탄이 터져 16명이 사망하고 1백여 명이 부상하는 대규모 테러까지 발생했다. 일차적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온전히 혐의를 뒤집어 썼지만 결국 이것은 장차 극우파가 주도하게 될 연쇄 테러의 서막이었음이 밝혀졌다. 네오파시스트와 연계된 정부 기관들이 여기에 결탁됐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969년 부터는 극좌파들의 무장 행동이 벌어졌고 1970년 드디어 장자코모 펠트리넬리를 필두로 유격대 그룹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어서 공산주의 혹은 가톨릭에 경도된 단원으로 구성된 이른바 극좌 과격단체 <붉은 여단>이 결성됐다.

사회 불안이 잠잠해지기 시작한 1972년 3월 3일 <붉은 여단>이 처음으로 정부 요인을 납치하면서 무장 투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리고 이로부터 12일 후 펠트리넬리는 밀라노에서 폭탄을 설치하다 사고로 사망한다. 다른 테러 단체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붉은 여단>이 가장 급진적이고 잘 조직된 그룹이었다.

1975년 <붉은 여단>의 두 지도자가 체포됨으로써 이탈리아 정부는 민중 봉기를 진압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테러 물결은 제 2단계로 접어들었을 뿐이다. 1976년에서 1977년 이탈리아공산당과 절연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체제 운동이 이탈리아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1977년 로마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가 대표적으로 가두 투쟁이나 총격전도 심화됐다.

한편, <붉은 여단>은 1976년 7월 8일을 시작으로 정부 주요 인사 암살에 돌입했으며 표적은 특히 인드로 몬타넬리를 비롯한 저명 언론인들이었다. 1978년 한 해가 갖가지 테러로 얼룩졌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앞서 언급한 알도 모로 피살 사건이었다.

전쟁과도 다를 바 없는 혼란을 틈타 제노바에서, 밀라노에서 <붉은 여단>의 암살이 계속되는 가운데 법은 갈수록 엄격해졌고 재판은 신속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1980년대 초 마침내 <붉은 여단>을 비롯한 일련의 테러 조직들은 소탕됐다.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1969년에서 1980년 사이 극우파 주도의 테러를 포함해 각종 테러가 총 36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통계를 발표했으나 1971년에서 1988년까지 극좌파의 총탄에 무너진 생명도 128명에 이른다.

이같은 폭력의 악순환을 이해하는데는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주효하다. 극좌파들은 1960년대부터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기독교 민주주의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배신자로 비난받던 이탈리아공산당과 차별화하기 위해 폭력이라는 수단에 열광했던 것이다.

극좌파들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와 남미 무장 투쟁에서 양식을 구했고 이것은 혁명 신화와 이탈리아 좌파의 급진적 성향에 불을 당겼다.

기민당이 1947년부터 권력을 잡으면서 이탈리아공산당을 무력화한 것이 배경이었다. 1973년부터 쿠데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이탈리아공산당은 칠레에서 진행된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맹공하며 기민당과의 동맹을 제안한다.

결국 두 거대 정당의 ‘역사적 결탁’은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의 야합 시도는 공산주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으며 극좌파들로부터는 버림받았다. 이것은 무장단체들에게 공산당도 장차 표적 중의 하나가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자본주의 체제와 가톨릭, 교회, 기민당, 공산당에 항거해온 학생, 노동자들 특히 밀라노 소재 공장으로 이주한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공개적으로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호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20년여 년이 훌쩍 지난 뒤에도 이탈리아는 테러와의 관계를 종결짓지 못했다. 새로운 <붉은 여단>은 최근에 조직원들이 체포됐지만 1999년과 2002년, 노동부 인사들을 살해하면서 테러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은 이탈리아의 70년대를 '혼돈의시대', '죽음의 시대'라고 이름 지으며 이탈리아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 위 내용은 바티스티 체포와 관련해 프랑스 TV뉴스와 일간지, 주간지에서 보도한 자료를 토대로 조사하고 확인한 내용들입니다. / 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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