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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 국경일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인 전택부 선생(왼쪽)이 28일 오후 서울 구의동 자택에서 이대로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와 함께 고 건 총리가 보내온 '한글날 국경일 제정 건의문에 대한 회신'을 보면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숱한 사람들이 창씨 개명을 했지만 나는 거부했습니다. 일본 신학교에서 유학할 때에 한글을 탄압하는 일본과 타협하기 싫어 자퇴를 했습니다. 나쁜 놈들과 손을 잡으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젊은이들도 밥 먹고 잘 살기 위해 굽신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을 버리면 안됩니다."

6월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2동 아차산 자락의 자택에서 오리 전택부 선생(88 와이엠시에이 명예총무-한글날 국경일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한글운동에 헌신하는 오리 선생의 열정과 신념을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오리 선생은 "생애의 마지막 소원은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어 달력에 빨간 글씨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인류사의 기적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찬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 시절 노는 날이 너무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했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올 9월 정기국회에서 한글날이 반드시 문화 국경일로 제정돼야 합니다."

1915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난 오리 선생은 한국 YMCA의 산 증인이자 한국 기독교계의 원로다. 기독교 학교인 함흥 영생고보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뒤 도쿄 일본신학교에서 기독교 신학을 전공하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대한 항의로 자퇴를 했다. 해방 직후엔 함흥에서 초-중등 교사들을 상대로 한글 강습을 하던 중 인기가 치솟자 공산 자치위원회로부터 반동분자로 몰리는 바람에 월남을 했다.

선생은 해방 후 <새벗>과 <사상계> 등 잡지의 주간으로 일하고 서울 YMCA 총무를 맡아 20여년 간 YMCA 운동을 이끌었다. 서울 YMCA의 명예총무와 '그리스도와 겨레문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한글날 국경일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 오리 전택부 선생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아호 '오리'는 전택부 선생의 이름인 못 택(澤) 자, 오리 부(鳧) 자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 오리 선생의 부모가 귀엽다는 이유로 "오리야, 오리야"라고 불렀는데 이를 그대로 아호로 썼다. 한자로는 '나의 동리'라는 뜻으로 '吾里'로 적는다.

오리 선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한글운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03년 6월 30일자 크리스찬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하늘나라를 위해서는 YMCA 운동을 했고, 이 나라를 위해서는 한글운동을 했다. 이것이 내가 평생 걸어온 두 개의 주 노선이다"라고 밝혔을 정도다. 한글학자가 아니었는데도 한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외솔상(80년)을 받기도 했다.

"15세부터 함흥에 있는 기독교 학교를 다니면서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도 성경책과 찬송가와 밑반찬과 함께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이라는 잡지를 10여권 챙겼을 만큼 한글을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주시경 선생이 펴낸 <우리말본>도 탐독했습니다.

1940년 일본신학교 예과(3년)를 마치고 본과(3년)에 재학 중일 때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항의를 하다 자퇴를 하고 귀국했습니다. 조선총독 미나미(南)가 한국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고, 학교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고, 가정에서도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그 자를 죽이고 나도 죽자'면서 도쿄의 번화가를 미친듯이 뛰어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게 될 일입니까? 화병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한글을 못살게 구는 것을 보면 참지 못했습니다. 문익환, 장준하 같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나만 졸업장이 없어요."

오리 선생의 한글 사랑은 1954년 '한글 간소화 방안(흔히 '한글 파동'으로 부름)'에 항의한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 방안'을 발표하자 <사상계> 초대 주간이었던 오리 선생은 이를 비판하는 특집기사를 그 해 4월호에 게재했다. '독립투쟁 사상에서 본 한글운동의 위치'라는 특집으로 전체 지면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대서특필했다. 오리 선생은 인터뷰 도중 당시 <사상계>에 실렸던 기사의 목록을 보여 주면서 "<사상계>에서 여론을 주도한 끝에 한글 간소화 방안이 철회됐다"고 밝혔다.

▲ 오리 전택부 선생이 언어 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왼쪽은 신향식 기자.
"<사상계>에 특집 기사가 실린 뒤 외솔 최현배 선생이 사무실로 찾아 왔습니다. 여직원에게 '전택부 선생이 누구냐'고 묻더니 내 자리로 오셔서 90도 각도로 깎듯이 인사를 하시더군요. 정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나보다 20년 연상인 분이 말입니다."

'한글 파동'을 계기로 오리 선생은 외솔 선생과 교분을 쌓았고 한글운동에 더욱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YMCA 운동을 하면서도 오늘날까지 한글운동의 현장을 지켜온 것이다. 한글문화협회 부위원장(74년)과 한글전용국민실천회 회장(75년), 국어순화추진협의회 위원(76년),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부회장(87년, 현 고문), 세종국제공항 명칭 추진위원회 위원장(97년),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위원장(2000년-현재),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위원장(2002년-현재)을 맡았다.

오리 선생은 2001년 6월 임시국회 때에는 날마다 국회 의사당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국회에서 전체 위원회가 열릴 때에는 한글운동가들과 함께 회의장 밖에서 시위를 하곤 했다. 신기남 의원(민주당) 등 국회의원 33명이 '한글날 국경일 지정을 위한 법률안'을 발의하여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 중개정 법률안'을 상정했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행정자치부가 '일하는 날이 줄어들면 경제 성장에 지장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재계의 눈치를 보고, 많은 국회의원들이 여기에 동조를 하는 바람에 이 법률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지난 46년부터 공휴일로 지내오던 한글날은 90년 11월 노태우 대통령 당시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된 이후 13년째 '3급 법정 기념일'로 밀려난 것이다.

오리 선생은 2001년 9월 정기국회를 한달 앞두고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다. 손숙과 배기호가 진행하는 서울방송 프로그램 '아름다운 세상'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했다. 이를 전해 들은 김 전 대통령이 비서관을 통해 '잘 추진을 하라'는 지시를 하자, 오리 선생은 직접 청와대를 찾아가서 감사와 부탁의 말씀을 전하던 도중 팔다리에 마비 증세가 왔다. 곧바로 서울 중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CT 촬영을 한 결과 뇌출혈로 판명되었다. 지금도 지팡이에 의존을 하지만 기력을 많이 회복하였다.

"차라리 그 때 청와대에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죽었더라면 신문에도 크게 보도가 되고, 한글날도 빨리 국경일로 제정이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치료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는 했지만 '이 모양으로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리 선생은 요즘 불편한 몸을 마다않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할 것을 각처에 호소하고 있다. 지난 19일엔 66개 시민운동 학술단체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국무총리,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박관용 국회의장 등에게 '한글날을 문화 국경일로 승격시키라' 내용의 건의문을 전달했다. 기자와 인터뷰를 마친 뒤에도 자택으로 찾아온 이대로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회장과 함께 고건 총리가 보낸 회신을 검토하며 향후 대책을 협의했다.

다음은 오리 전택부 선생과 나눈 일문일답.

▲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 간소화 방안'을 비판했던 <사상계> 54년 4월호 목차 부분.
- 한글에 쏟는 애정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우리는 세계에 내세울 게 많지 않습니다. 박찬호와 박세리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한국을 해외에 알리고 있고, 축구대표팀이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올라 국위를 떨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만큼 세계에 자랑한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한글은 인류사의 기적과 같은 문자입니다. 세계인이 놀라는 일로서 유네스코와 UN에서도 인류의 기록문화로 기리고 있습니다.

2500개의 민족이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을 구성하는 일부 민족은 고유의 문자도 없는데다 한자도 몰라 문자생활을 못합니다. 모택동은 '한자로는 백성들을 깨우치기 어렵기 때문에 한글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한글은 모든 언어의 발음을 모두 낼 수 있는데다 배우기가 쉽습니다.

일본은 명치유신 때 의회에서 '과학적이고 배우기 쉽다'면서 한글을 쓸 것을 제안했으나 보수파가 반대를 해 무산된 적이 있답니다. 일본은 가다가나와 히라가나, 한자 등 세가지 문자를 섞어 쓰거든요.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몇 개월 전에 조선일보에서 본 기사가 생각납니다. '한글도 이제는 수출 상품'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만에서 공부를 한 한문학자가 중국의 어느 약소 민족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지요. 서울대 언어학과 이현복 교수가 태국의 어느 오지 민족에게 한글을 가르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도 여러 사례가 있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문자가 없는 민족의 언어를 한글로 적으면 좋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한글은 우수한 문자입니다."

- 한글날이 13년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됐는데 무척 속상하셨겠지요?
"한글이 과학적으로 인간의 발음을 거의 표기하는 것은 세계적인 언어학자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문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글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법정 공휴일에서 한글을 뺐는데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한글 만으로도 우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세종대왕은 21세기를 내다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 같습니다. 한글은 정보화 시대에 딱 맞는 문자거든요. 그런데도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뺀 사람은 정신이 빠진 사람입니다. 딱한 일이지요. 자랑거리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진주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소중함을 모르니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 오리 선생이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 간소화 방안'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은 54년 4월호 <사상계>의 목차 부분을 펼쳐 들고 있다.
- 다른 문자와 한글을 비교할 때 어떤 점이 우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본 유학 시절에 대만 학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루는 대만 원주민 출신 학생이 영어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길래 영어를 잘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대만 원주민은 말은 있어도 문자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한자를 모르다보니 영어 알파벳으로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지요.

그런데 영어도 불완전한 문자입니다. 'knight(기사)'를 한번 보십시오. 'K'는 써 놓고도 발음을 하지 않습니다. 'a'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아, 에, 애, 어 등으로 발음이 왔다갔다 합니다. 이에 반해 한글은 하나의 철자가 한 가지만 표현을 하지요. 또한 한글 24자로 인류의 모든 말소리를 거의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이게 되지 않습니다. 'Seoul'을 봐도 그렇습니다. '세울'이라고 발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어는 불완전한 문자인데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 언어를 지키지 않는 민족은 발전할 수 없겠지요?
"대만 사람들은 문자가 없다보니 이젠 중국 본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3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만주족)는 언어와 문자가 있었지만 청나라를 세운 뒤 공용 문자를 한자로 하면서 차츰 쇠퇴한 것입니다. 서울 잠실 길거리에 비석이 하나 숨겨져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와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굴복을 했습니다. 그 때 청태종 송덕비를 세웠는데 한자어와 만주어로 똑같은 내용을 함께 썼습니다. 그런데 고유 문자가 있었는데도 한자를 공용 문자로 하다보니 만주 문자는 물론 만주족까지 사라졌습니다.

세종대왕이 500년 전에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중국에 흡수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문자가 중요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영어 때문에 사라지는 문자가 무척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문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한글을 기리는 한글날을 천대하니 어찌 얼빠진 민족이 아닙니까? 노태우 대통령은 정말 기가 막힌 일을 한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훌륭한 문자를 지은 것을 고마워하지는 못하고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빼다니 말이 됩니까?"

- 4대 국경일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있는데요.
"정부는 삼일절과 광복절, 제헌절, 개천절보다도 한글날을 더 못한 것으로 천대하고 있습니다. 한글날이 4대 국경일보다 뒤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통일이 되면 제헌절을 없애든지,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에서 비롯됐는데 이젠 음력을 양력처럼 하여 기념을 합니다. 음력으로 따져서 기념을 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음력 4월 8일인 석가탄신일은 음력에 맞춰 해마다 날을 정하는데 개천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노태우 정부가 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 올 9월 정기국회에서 한글날이 문화 국경일로 승격될 수 있을까요?
"정확하게 전망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한글날을 국경일로 해야 할 줄로 알 겁니다. 몇 년전에 한글날이 국경일이 될 수 있었는데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노는 날이 많아 생산활동에 차질을 빚는다고 주장을 하는) 경제계의 눈치를 보다 일을 그르쳤습니다. 행정자치위원회에서 공청회를 열기로 하고서 열지도 않고 있습니다. 경제 우선 원칙에 반대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선 문화 문제부터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영국이 '인도는 내 줄 수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내보낼 수 없다'고 했듯이 문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문화를 모르는 나라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저는 한글학자가 아닌 상식인입니다. 한글을 생명처럼 사랑하다보니 동지들이 생겼습니다. 한글날을 문화 국경일로 만드는 데 문화인들이 협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도 한글날의 국경일 제정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고건 국무총리도 우리의 뜻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고 건 국무총리가 6월 23일 전택부 한글날 국경일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낸 '한글날 국경일 제정 촉구 건의문'에 대한 회신.
- 이승만 대통령 시절 오리 선생께서 `한글 간소화 방안'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그 일화를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사상계> 초대 주간을 할 때에 '한글 간소화 방안'이 발표됐습니다. 이를 흔히 '한글 파동'이라고 부르지요. 이승만 대통령이 단지 어렵다는 이유로 한글 철자법을 무시하고 소리나는대로 간편하게 적도록 훈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나는 <사상계>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반대하는 내용의 특집 기사('독립운동 사상에서 본 한글운동의 위치')를 실었습니다. 신문 기사들과 국회 속기록까지 게재하여 특집호로 꾸몄는데 반향이 컸습니다. 당시엔 대통령의 말 한마디면 다 되는 시절이었죠. 그런데 거기에 정면으로 맞선 것입니다. 특집기사가 실린 뒤 이승만 대통령과 이선근 문교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소리나는대로 한글을 적자는 주장을 거둬 들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이 원로 기독교인들을 경무대로 초청하여 다과를 주재하던 도중 "한글 철자법이 어려운데 성경처럼 소리나는대로 쓰면 좋지 않으냐"고 하자 아부를 잘하는 목사들이 "그래야죠"하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당시 저는 30대였는데 "젊은이들과 학자들은 한글 맞춤법에 따르는 게 더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상계>에 특집기사가 실린 뒤 종로 종각의 사무실로 최현배 선생이 찾아오셨습니다. 여직원에게 '전택부 선생이 누구냐'고 묻더니 제 책상 앞에 와서 거의 90도 각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하더군요. 마치 소작인이 지주에게 하듯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바람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당시 저는 30대였고, 최현배 선생은 50대였습니다."

- 영어 학습 열풍이 불면서 한글의 입지가 좁아지는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민족의 얼은 고유 언어에 담겨 있습니다. 문자가 없으면 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좋은 말도 문자가 없어지면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의 얼에서 문화가 생깁니다. 때문에 한국인의 얼을 지키기 위해 한글을 사랑해야 합니다. 외국어를 숭상하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 영어 때문에 한글이 훼손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는 수질오염과 공기오염으로 골치를 썪고 있습니다. 환경 문제로 지구가 망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언어오염에 대해서는 떠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얼을 썪게 하고 죽이는 것인데 왜 이를 자각하지 못합니까?

미국인들은 미인의 표준으로 키와 엉덩이, 가슴둘레 등 7-8개의 조건이 있습니다. 한국의 미인상은 맵씨, 솜씨, 글씨, 말씨, 마음씨입니다. 말씨는 좋은 탤런트의 말씨를 잘 들으면서 배우면 됩니다. 설교도 말씨로 하면 허사입니다. 언어 오염의 주범은 목사들입니다. 말을 팔아 먹는 자가 정확하게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언어 교육을 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오염은 영혼을 죽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언어를 잘 써야 합니다."

- 이 시대의 어른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요즘 삼강오륜, 인의예지신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미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만 나는 친미도 반미도 한 적이 없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창씨 개명을 했지만 나는 거부했습니다. 일본서 유학할 때에 일본 사람들과 타협하기 싫어 신학교를 중퇴했습니다. 장준하 강원룡 김철승 문익환 등과 같이 공부를 했는데 나 혼자 졸업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대학이 대학입니까? 돈만 내면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나는 나쁜 놈들과 손을 맞잡지 않았고 타협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밥 먹고 살기 위해 굽신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을 버리면 안됩니다."

- 연세가 많은데도 정정하신 비결은?
"우리 나이로 여든 아홉입니다. 아홉고개를 넘을 때마다 힘이 듭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맨땅에 앉아 있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습니다. 의사의 말을 잘 지키는데 지금도 자기 전에 걷는 운동을 합니다. 아침에도 누워서 지압의 원리로 허리와 이마 운동을 하지요. 낮에는 산책을 주로 합니다. YMCA는 다른 기독교와 다릅니다. 기독교 단체이면서도 신체를 중요시합니다. 완전한 인간은 체력을 잘 다진 인간이어야 합니다."

"나랏말이 죽으면 나라도 죽습니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해 주십시오"
오리 선생이 서울방송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띄운 편지

김대중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서울방송 손숙, 배기호의 '아름다운 세상' 방송)

김대중 대통령님,

우선 정중하게 인사를 드립니다. 100년에 한 번 있는, 1000년에 한 번 있는 21세기의 첫 대통령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감축 드립니다. 21세기 벽두에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입니다. 미래학자들에 의하면 21세기는 도덕과 경제 사이의 구별도 없어지고, 노동과 여가 사이의 구별도 없어지는 세기라고 합니다. 인종과 인종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구별도 없어지는, 그야말로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그런 세기라고 합니다. 이런 세기에 대통령께서 우리나라 첫 대통령이 되셨으니 세세무궁 존경받는 문화 대통령으로 길이 남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걱정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말은 많이 들어도, 너 때문에 내가 잘 산다는 그런 말은 좀처럼 듣기가 어렵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불평불만 투성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돈 한 푼 안내고도 햇빛을 마음대로 쪼이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돈 한 푼 안내고도 마음대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다 창조주의 은덕 때문입니다. 하기야 세상만사가 다 너 때문이고, 나 때문인 것은 하나도 없다면 무슨 보람으로 살리오 마는, 그래도 인간이란 고마운 것은 고마운 줄도 알고 은덕을 입었으면 보답할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과 감사할 줄 모르며 사는 사람의 삶의 질적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하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10년 전 노태우 대통령 때에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빼버리는 바람에 세종대왕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세종대왕이 어떤 분이십니까? 한국문화를 꽃피운 성군이 아니십니까? 정치 경제뿐 아니라 천문, 음악,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신, 반만년 역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기신 어른이 아니십니까? 그 중에도 한글 창제는 인류사의 기적으로 평가됩니다. 유엔 기구의 유네스코도 한글을 인류의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이런 한글을 우리 자신이 무시하다니요, 참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를 보고 참다못해 92명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서명날인을 마친 뒤, 작년 10월 2일 신기남 의원 등 34명의 국회의원들이 공동명의로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위한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은 이때껏 통과되지 못하고 계류 중에 있습니다. 주무부처인 행정자치부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우리는 지난 5월 8일 행자부장관을 방문했더니, 공휴일 하루가 더 는다 해서 흔들릴 정도로 우리경제가 허약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만 한글날은 독립이나 국권수호와 직접 관계가 없는 날이므로 신중을 기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만약 세종대왕이나 일정 때 한글 지키기 투쟁을 했던 우리의 선열들이 들었다면 크게 통탄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행자부 관계자들은 우리가 현행 국경일 제도의 기본 틀을 깨자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리어 현행 제도를 더 강화하고 그 내용을 더 충실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격하된 한글날의 위상을 원상복구 시키고, 박탈당한 기득권을 되찾게 하자는 것뿐입니다.

가령, 우리 민족을 하나의 인간으로 비유해 볼 때 개천절은 민족의 탄생을 의미하고 삼일절, 광복절, 제헌절은 오장육부와 팔다리에 해당합니다. 인간이란, 으레 머리도 수려하고 육체도 잘 생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머리 속에서 얼이 빠져나가고 그 육체 속에서 피가 잘 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한 민족의 말과 글자는 인간의 얼과 피와 같은 존재이기에 말입니다.

일찍이 언어학자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이르기를, "나랏말이 살면 나라도 살고, 나랏말이 죽으면 나라도 죽는다"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 선생은 이르기를 "민족이란 인간의 얼인 혼과 영토와 주권인 백(魄)으로 이루어졌으니, 영토와 주권은 잠시 없어졌더라도 얼이 살아 있으면 그 민족은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얼마 전에 대통령께서는 주 5일 근무제 실시를 지시한 바 있습니다. 선진 제국이 다 그 제도를 채용하고 있고, 대통령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순순히 따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경제논리를 가지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이번에는 어떤 논리를 가지고 나올지. 휴일을 52일이나 더 늘리면서 한글날 국경일 하루 휴일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님, 21세기는 지식정보화시대입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이런 시대를 미리 내다보시고 한글을 창제하신 것이 아닌가 하며 찬탄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컴퓨터는 단 두 개의 숫자 "0"과 "1"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되풀이하는 것인데, 한글의 경우는 28자의 유한 수와 몇 가지의 규칙만으로 무한 수에 가까운 천지만물의 소리를 만들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글입니다. 한마디로 한글은 다른 어떤 글자보다도 과학적이며, 현대 첨단과학의 산물인 컴퓨터의 원리와 잘 부합되는 글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이야말로 우리의 국보 1호이며 세계 문자문화유산 1호이며, 머지않아 한글날이 세계문자의 날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글자입니다. 이런 한글을 우리가 멸시하다니 참말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약 15년 전 제가 대통령님을 모시고 KBS 사랑방중계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잘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 대통령께서 야당 총재로 계실 때입니다. 당시 KBS는 시청료 거부운동 때문에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는데 대통령께서 한마디 말씀을 해주심으로써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글날 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씀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종대왕에게서 받은 은덕에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다해야 할 마땅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간절히 부탁하옵고,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2001년 8월 14일

한글날 국경일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 전택부 드림

"먹칠을 한 채 죽어있는 10월 9일 한글날, 벌겋게 타올라라"
오리 선생이 <에세이 문학 2001년 겨울호>에 실은 수필

현대판 각설이타령

- 이보오 벗님네야 이내 말 들어보소 -

SBS 라디오 '손숙, 배기환의 아름다운 세상'으로부터 원고 청탁이 날아왔다.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이어지는 방송이라 한다. 그 중에 각 분야의 명사들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코너가 있는데, 나더러 아무나 원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때마침 나는 한글날이 국경일로 제정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나는 국회의장부터 찾아갔다.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 등 3당 대표들도 찾아가 그 당위성을 강조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중 국회의장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밀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 법률안이 정식으로 상정되면 틀림없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국회의장이 적극 나선다고 해도 소관위원회가 그 법률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나는 행정자치위원들을 찾아 다녔다. 한때는 매일 국회의사당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찾아다녔다. 전체위원회가 열릴 때에는 10여 명의 동지들과 같이 우르르 몰려가서 회의장 밖에서 시위를 했다. 90이 다된 노인이 시위를 하다니! 시위를 해야 통한다고 해서 하기는 했으나 나도 별 수 없는 데모꾼이 되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실망이었다. 6월 임시국회 때에는 통과되리라고 믿었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소관 부서인 행정자치부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아, 어찌하여 국회의원들은 행정부의 눈치만 보며 사는 것일까? 90여 명의 여야 의원들의 서명 날인과 30여명의 여야 의원들의 공동 명의로 발의된 이 법률안이 이처럼 맥없이 무너지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나는 미리 행정자치부 장관을 찾아가 만났었다. 마치 신하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릴 때처럼 최대의 경의를 표하면서 부탁을 했었다. 그런데도 이 모양이 되고 마니 나는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던 것이다. 맥을 못 쓰는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는 분노마저 느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를 포기하고 말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하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대통령을 찾아가 만나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을 국회의원이나 신문사 편집인들을 방문할 때처럼 막 쳐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방송국에서 원고 청탁이 날아왔던 것이다. 나는 무릎을 탁 치면서, 옳지 바로 이거다.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자 해서 썼던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대통령께서는 문화의 세기라 일컫는 21세기의 초대 대통령이 되셨으니 문화의 대통령이 되어 주십시오. 21세기 벽두에 노벨평화상을 타셨으니 한글날도 살려 주십시오!" 이런 내용이었다.

다행하게도 대통령께서 이 방송을 들으셨던 것이다. 청와대의 행정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대통령께서 한글날에 관심을 가지시고 자기에게 잘 추진하라는 분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반가워서 당장 그 비서관을 청와대로 찾아갔다. 8월 25일이었다. 우선 감사의 말씀을 전해 줄 것을 당부하고, 몇 가지 필요한 참고 자료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얘기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에 나의 한쪽 팔다리에 마비가 왔던 것이다. 같이 갔던 친구들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비서관들이 나를 등에 업고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곧바로 서울 중앙병원으로 이송되었던 것이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즉시 MRI를 찍어 봤다. 두 번이나 찍었으나 별 이상이 없었다. 나중에 CT를 찍었더니 뇌출혈로 판명되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나도 이제 나의 외삼촌처럼 중풍으로 죽겠구나. 나의 어머님은 9·28 수복 때 입성하는 국군들을 보시고 만세를 부르다가 쓰러지셨는데 나는 한글날 때문에 죽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치료는 받아야만 했다. 뇌출혈임이 확실시되었으므로 신경과 병실로 옮겨졌다. 조금 차도가 나기 시작하자 재활의학과 병실로 옮겨져서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치료를 받는 동안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차라리 청와대에서 죽어서 나왔더라면 나도 좋고 한글날도 좋았을 걸! 치료하면 나을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 모양으로 살아서는 무엇 하나! 주 5일 근무제가 불거져 나왔으므로 한글날 문제쯤은 뒷전으로 밀려나갈 것이며, 국정감사니, 특검제니, 미국 테러 사건 등 큰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는 바람에 9월 정기국회 때에도 통과될 가망이 없었다. 게다가 몸은 아프고 , 마음은 울적하여 앞날은 갈수록 캄캄했다.

그래도 나는 명색이 신앙인인데 낙심해서는 안 되지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찬송가를 불렀다. 나 혼자만의 병실이었으므로 마음놓고 찬송가를 불렀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363장)."

아침에 일어나서는 "지난밤에 보호하사 잠 잘 자게 했으니, 고마우신 주의 은총 감사 찬송합니다(1절). 성령께 비옵나니 오늘 우리 생활을, 맡아 주관하여 주사 온전하게 하소서(4절)."을 불렀다. 밤이 되어 자기 전에는 평소 하던 것처럼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를 불렀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나의 아내를 위하여! 나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니 위로해 주십사 라고! 내가 남들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지 않게 해 달라 기도를 했다.

퇴원을 하기 약 열흘 전부터는 물리치료를 받았다. 치료실에는 나 같은 뇌졸중 환자만 아니라, 교통사고 환자들, 언어장애 환자들, 치매 환자들이 수두룩했다. 거의 모두 팔다리가 마비된 환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난들 사람 구실을 바로 할 수 있을까? 신세타령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가 옛날 어릴 적의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해마다 봄이 오면 찾아왔던 한 거지 생각이 났다. 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팔다리를 흔들거리면서, 대문 밖에서 구걸을 하던 그 모습이!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나 않고 또 왔네" 타령을 하던 그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을 보시고 어머님께서는 밥 한 상을 차려서 먹여 보내곤 했던 것이다.

이 거지는 이 장 저 장 찾아다니면서 똑같은 장타령을 불렀다. 그러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것을 연상하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각설이 타령을 지어 부르게 되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나 않고 또 왔네
엄동설한 혹한에도 죽지나 않고 또 왔네

북망산으로 간다더니 병원 신세가 웬 말이오
가야 할 길이 구만린데 도중하차가 웬 말이오

품바 품바 품빠빠 품바 품바 품빠빠

험한 준령이 험난하니 쉬었다 가라 그 말인가
세상만사가 하수상하니 피했다 가라 그 말인가

품바 품바 품빠빠 품바 품바 품빠빠

이 보오 벗님네야 이내 말 들어 보소
제발 한번 들어 보소
나는 죽어도 한이 없으니 한글날은 살려 주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환난질고 물리치고 영생복락 주옵소서

품바 품바 품빠빠 품바 품바 품빠빠

죽거나 살거나 내 팔자 내 팔자가 상팔자라
죽거나 살거나 내 팔자 각설이 신세가 내 팔자

품바 품바 품빠빠 품바 품바 품빠빠
얼씨구나 좋다 품빠빠 절씨구나 좋다 품빠빠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라...
품바 품바 품빠빠 품바 품바 품빠빠...


나는 이 각설이타령을 찬송가 삼아 불렀다. 기도 삼아 불렀다. 그 속의 '북망산'은 '하늘나라'의 대명사이고, '벗님네'는 '대통령'의 대명사이고 '신령님'은 '하느님'의 대명사라 해도 좋겠기에 말이다.

듣자 허니, 현대그룹의 왕회장 고 정주영씨도 나와 꼭 같은 병으로 7년 간이나 고생했다고 한다. 그도 물리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도 받고 집에서도 받았다. 1천 마리 소 떼를 끌고 북한으로 갈 때에도 병원의 물리치료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죽고 말았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다. 그는 자기가 만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죽었고, 나는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그는 남 좋은 일만 해 놓고 죽었구나 싶어 그에게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졌던 것이다.

어쨌건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병신구실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밥만 처먹으며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구걸 행각을 계속해야 한다. "물질 대신 정신을 주십시오! 나 대신 한글날을 살려 주십시오" 하면서! 병신 육갑을 하네 하며 사람들이 비웃을지라도 나는 팔다리를 흔들거리며 얼굴을 씰룩거리면서 타령을 계속해야 한다.

어느덧 9월이 지나 10월이 됐다. 달력을 보았더니 1일과 2일 추석 연휴, 그리고 3일 개천절은 빨갛게 빛나고 있는데, 9일 한글날은 시꺼멓게 먹칠을 한 채 죽어 있다. 아, 언제야 10월 9일 한글날이 되살아나 벌겋게 타오를 수 있을 것인가?

〈에세이 문학 겨울호〉권두 에세이 2001

오리 선생과 그의 부인이 만난 애틋한 사연
전택부 선생의 수필 '한 폭의 그림'

나는 1915년 2월 12일 함경남도 문천(文川)에서 전현석(全賢錫)과 홍범식(洪範植) 사이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내는 1923년 8월 1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한명환(韓明桓)과 도양숙(都良淑) 사이의 1녀 3남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나는 택부(澤鳧) 즉 연못의 오리로 태어났고, 내 아내는 춘학(春鶴), 봄의 학으로 태어났다. 나는 을묘년(乙卯年) 토끼띠로 태어났다. 내 아내는 계해년(癸亥年) 돼지띠로 태어났다.

나와 아내와의 만남은 전혀 타의에 의한 만남이었다. 나는 30이 다 되도록 장가들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때 신병으로 사내구실을 할 자신도 없었고, 언제 학병으로 또 징용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판국에서 "장가"소리만 들어도 겁이 났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신부감을 정해놓고 선을 보라고 하면, 일부러 딱지를 맞기 위하여 흉측한 차림을 하고 선을 보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님께서 호령을 하다시피 함흥에 좋은 신부감이 있으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2백리 이상이나 떨어진 먼 곳까지 가서 선을 보게 되었다. 1944년 6월이었다. 그날도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바보스런 차림을 하고 갔다. 모시 두루마기에 헌 모자를 눌러쓰고 지팡이 대신 양산을 들고, 마치 시골 영감 같은 차림을 하고 갔다. 신부감은 함흥에서 미인 소리를 듣는 방년 22세의 귀여운 외동딸이라고 하니, 나를 보면 으레 질겁을 하고 달아나리라 생각하며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를 보자 첫눈에 들더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녀는 나보다 8년이나 연하인 앳된 여자인데도 오랜만에 만난 10년 지우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둘은 부랴부랴 날을 잡아 신방을 차렸던 것이다. 석 달 후인 9월 28일에!

나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화백을 무척 존경했다. 그 어른은 우리의 결혼을 축복하는 뜻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려 주셨다. 백복지원(百福之源)이란 글귀를 넣어서 오리와 학이 연못 속에서 만나 동일한 방향으로 행진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그런데 학의 몸집은 크고 우아한데 비하여 오리의 몸집은 학의 반도 못되고 모습도 초라하다.

학은 오리 따라 꽃가마 타고 오리가 사는 연못에 당도해 보니 모두가 생소하다. 신선한 충격이 아니라 암울한 충격이었다. 학은 항시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다가 비좁고 지저분한 연못에 내려와 앉아보니 답답해서 숨이 막힐 정도이다. 산수 좋고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별유천지 비인간의 경지에서만 살던 송학이 지저분한 속세에 내려와 앉아보니 기가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학은 머리를 수그리고 물 속을 들여다본다. 미꾸라지 송사리 올챙이 같은 온갖 잡어들만이 우굴거린다. 오리는 그런 잡어들을 잡아먹으려고 머리를 빳빳이 쳐들고 연못을 휘졌고 헤엄쳐 다닌다. 어떤 때는 머리를 물 속에 꽂아 넣고 다리를 팔딱거리며 거꾸로 서있는 것을 보면 저러다가 숨이 막혀 죽지나 않을까 겁이 난다. 또 어떤 때는 논 속에 들어가 휘졌고 다니면서 벌레를 잡아먹다가 온 몸에 흙탕 칠을 하고 뒤뚱뒤뚱 걸어 나올 때는 두 번 다시 오리를 보고 싶어지지도 않는다. 정이 떨어진다.

그러나 오리가 친구들을 데리고 천진난만하게 연못 속에서 노는 것을 보면 귀여워서 웃음이 저절로 난다. 그럴 때는 옛 동요작가의 노래가 생각나서 노래를 불러보기도 한다.

오리 오리 동동, 물오리가 동동
오리 오리 동동, 물오리가 동동
스르 스르 흘러간다, 라라 동동
스르 스르 흘러간다, 라라 동동

오리 오리 갈갈, 물오리가 갈갈
오리 오리 갈갈, 물오리가 갈갈
정다웁게 속삭인다, 라라 갈갈
정다웁게 속삭인다, 라라 갈갈

그리고 오리는 연못을 떠나 훨훨 망망대해로 날아가기도 한다. 오리는 옛 시인이 말했듯이 부경만리파(鳧耕萬里波) 즉, 오리가 밭을 갈 듯이 물살을 헤치면서 창해를 헤엄쳐 간다. 또 오리는 토끼띠가 되어서인지 토끼에 친근감을 느낀다. 옛 시인이 말했듯이 토용천산설(兎 千山雪), 즉 토끼가 방아를 쪘듯이 천리 눈 산을 깡충깡충 뛰어 다니는 것을 상상하며 제멋에 겨워 흥겨워 한다.

학은 오리의 이런 광경을 보면 감탄을 한다. 오리는 재주도 많고 용감하다고 감탄을 한다. 그러나 저렇게 흥겨워 하다가 한데서 죽어서 돌아오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다. 학은 올해 들어 팔순(八旬) 80세가 되고 오리는 미수(米壽) 88세가 된다. 둘을 합산하면 168세를 같이 산 셈이다. 그런데 오리는 작금 양 년 사이 병이 나서 기동이 불편하다. 간혹 외출을 하거나 병원으로 갈 때는 학은 반듯이 오리의 손을 꼭 잡아주고 같이 걸어가 준다. 마치 웨딩마치를 하듯이! 오리는 그 때처럼 고맙고 행복한 때는 없다. 그래서 오리는 "여보, 우리 이 모양으로 하늘나라까지 같이 갑시다" 한다. 그러면 학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허나 그게 우리 맘대로 되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는 학에게 "당신 사랑해요"란 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는 그대 없이는 난 못살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지만 학을 맞대놓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고 고생한다고 손 한번 따뜻이 쥐어준 적이 없다. 오리는 본래 성미가 멋대가리 없는데다가 어쩐지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이 도리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게 여겨져서 말이다.

어쩌면 학과 오리는 이당 선생이 그려준 한 폭의 그림처럼, 그 그림을 조석으로 쳐다보면서 살고 있다. "백복지원",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천생연분을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 전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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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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