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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라는 것이 나에게 구체적인 공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대충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도 힘든 벌을 받거나 매를 맞은 적은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온몸의 기운이 바닥나는 경험을 몇 번 해보게 되었다. 운동장을 돌아도 두어 시간은 돌고, 맞아도 몇 십대 이상 맞은 것이 그 때부터였다.

'원산폭격', '한강철교', 혹은 '낮은 포복' 따위 군대 냄새 물씬 나는 얼차려에 질려 널브러지거나, 넙치가 되도록 두드려 맞고 교실 바닥을 구를 때 항상 선생님들은 승리감 가득한 눈을 내리 깔며 '이 정도는 군대에서 하는 것에 대면 새 발의 피' 라는 한마디를 마침표 삼아 찍곤 했다.

선생님의 말이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게 된 것도 물론 그 무렵이건만, 군대에 관한 한 선생님의 말씀도 그냥 들어 넘길 것이 아니다 싶었던 것도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 차돌맹이 같던 외삼촌도, 또 그 대단하고 여유 만만하던 동네 형 누구누구도 신병 훈련 몇 주 만에 무너져 간신히 '새우깡' 한 개 붙이고 나와서는 인생을 새로 배운 듯한 눈빛으로 '너도 가보면 알아' 하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고는 도저히 너를 이해시킬 재주가 없다는 뜻이 온몸으로 풍겨오던 첫 외박 이등병들의 그 한마디. 그것이 그렇게 천근같이 나의 머리를 짓눌러댔다.

그 때부터는 더 이상 악몽에 귀신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옥 같은 철조망 안에서 도깨비 방망이보다 더 흉칙한 '빳다'를 들고 눈 부라리는 무시무시한 군인아저씨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대략 그 시기부터 군대는 현실 세계와 빗겨 서있는 또 하나의 세계였고, 모든 폭력과 두려움과 외로움의 원형이 되어갔다. 그리고 군대에 관한 모든 소문과 낭설은 내 머릿속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10층 높이에서 그냥 떨어지는 훈련을 받는다거나, 실전 같은 총싸움 훈련 끝에 몇 명씩 죽기도 한다는 얘기보다도 차마 믿기지 않는 소문 하나는, 누구나 군대에 가면 엄마가 보고 싶어 울게 된다는 얘기였다.

엄마와 떨어지면 과연 보고 싶을까? 그것도 울고 싶을 만큼? 학교 축제 때 늦게까지 계속되는 써클 행사 때문에 꼭 하루 외박을 하고 싶을 때도 절대 안된다고 소리지르던, 심지어 시험기간에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집에 들어가느니 학교 가까운 친구네 집에서 같이 공부하겠다고 해도 허락하지 않으시던 엄마.

그렇게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고 장애물이 되던 사람. 그래서 길러준 정은 있지만, 세상에 엄마만 없다면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보던 터였다. 그래서 부모님이 여행이라도 떠나신 이틀 사흘간, 아니면 하다못해 저녁 예배 참석하신 한두 시간이 그렇게 달콤하고 안락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보다도 훨씬 커서 술이니 담배니 여자니 세상의 재미를 마음껏 즐기던 장정들이 그래 엄마가 보고 싶어 운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는, 가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되지 않을 일을 만나면 엄마 찾으며 질질 짜는 몇몇 못난 녀석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 거라고 믿었다.

남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가는 군대를, 나는 이래저래 미루다가 또래들 예비군 훈련까지 끝나가던 스물일곱 되던 해에 비로소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들 입대 환송과 제대 환영 파티를 되풀이하고, 그 장황한 경험담을 되풀이 들으면서 악몽에 등장하는 군대도 그저 황당한 지옥 모양을 벗어나 점점 실제에 가까운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저 '빳다'만 든 채 설치던 군복 색깔의 괴물은 계급장도 선명한 중사 아니면 병장으로 변해갔고, 철조망의 구성도 대대 본부와 연대본부의 간격을 갖춰 나갈 무렵이었다.

'가족들을 향해 경례'하는 구령 소리에, 늦은 입대가 민망해 일찌감치 집에 떼어두고 온 가족들 대신 엉뚱한 사람들에게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돌아서 막사에 들어 군복을 입고 사복은 벗어 소포를 꾸렸다.

이것도 군대 다녀온 친구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군대간 아들 옷 소포 받으면 꼭 전사 통지서 받는 것처럼 복받친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그림까지 그린 쪽지 하나를 편지 삼아 동봉했다. 몇 주 동안은 편지나 전화도 마음대로 못한다지 않는가?

'지금 옷 갈아입었어요. 누가 자꾸 소리를 지르고 그래서 정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을 것 같아요. 건강히 계세요.'

씽긋 웃는 얼굴 그림까지 그려 넣은 쪽지를 동봉해서 소포를 넘기고는, 곧바로 시작된 얼차려와 고함과 이런저런 과업 때문에 정신을 잃은 듯이 두세 주가 흘러갔다.

잠들기 전 침상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내가 밖에서 뭘 하던 놈이더라 하는 데 이르면 까무룩 곯아떨어지기 일쑤였고, 또 눈감았다 뜬 듯 하면 어느새 기상시간 아니면 불침번 교대시간이었다.

그날은 웬일인지 훈련을 받으러 나가기 전에 편지가 배부되었다. 아마도 아침 식사 후에 훈련 출발까지 시간이 조금 비었던 모양이다. 길어야 오 분 안팎이었을 그 여유시간동안 동료들은 저마다 편지를 읽으며 무언가를 떠올리고, 또 무언가를 지껄였다.

나에게도 편지가 한 통 주어졌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 살면서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은 적이 몇 번 있었더라, 생각하다보니 읽기 전부터 뭔가 민망했다.

'여자친구 편지나 올 것이지, 재미 없게시리...'

궁시렁거리면서 뜯어서 확 펼친 편지. 여자친구에게서 받은 것이었다면 조금이라도 그 감격을 오래 느껴보기 위해, 행여나 결말부터 눈에 밟힐까봐 조심조심 첫줄부터 눈에 집어넣는 유난을 떨었으련만. 어쨌건 분별없이 펼쳐진 편지 한 장에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구절이 이것이었다.

'이젠 정말 네가 내 품을 떠나는가보다 싶어 가슴이 휑하다.'

정말 기특한 생각은 배우거나 쌓이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떠오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웬일이었을까, 그 구절을 읽으면서 울컥 주먹만한 물덩어리가 뒤통수 어디 쯤에선가 코밑으로 치미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편지를 수습해 윗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하마터면 울 뻔했다, 아침부터.'

아마 기억은 못해도 간밤에 무슨 슬픈 꿈을 꾸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럴까 하면서 가슴도 콩콩 두드려보고 눈두덩이도 꾹꾹 누르면서 심호흡을 했다. 그래서 바쁜 아침 시간부터 마음 약해질 짓 하지 말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점심시간에 나무 그늘에서라도 잠시 꺼내 읽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장애물 설치 훈련을 했다. 비교적 버겁지 않은 일정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던대로 점심밥을 먹은 후에는 편지 한 통은 여유 있게 읽을 시간이 주어졌다. 식판정리가 되는대로 다른 녀석들은 여기저기 만만한 그늘 밑에서 방독면을 베고 누워 짧은 토막잠을 청하고 있었다.

한 십여 분은 온전히 주어졌던 그 시간. 나도 어느 참나무에 기대어 앉아 편한 자세를 잡고는 편지를 읽기로 했다. 그리고 무심결에 올라간 손끝. 그런데 난데없이 편지를 꺼내려고 윗주머니에 닿은 손끝이 뜨끈했다. 그리고 속도 뜨끈해지고 눈 밑도, 그랬다. 나는 이래야겠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탄띠를 풀고 허리띠를 풀어 바지를 훌렁 내렸다가 다시 속옷부터 하나씩 차례차례 개어 입었다. 먼지도 새삼 털어내고 탄띠도 새로 맞춰 줄였다.

"야, 왜 그래? 누가 복장 검사한대?"

날리는 먼지통에 낮잠을 해쳤는지, 근처의 동료가 투덜댔다. 그저 아니라고 한마디 던진 다음 가만히 앉아 여기저기 시체처럼 널브러져 잠이 든 동기들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일부러 머리 속을 흐트러뜨렸다. 그 날,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지 못했다. 그 날 뿐 아니라, 각개전투와 화생방 훈련으로 이 악물고 지나야 했던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그 한 주일동안 내내 그 편지는 읽지 못했다.

인생이란, 어머니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과정이다. 탯줄을 자르고 그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젖을 떼고, 또 치마꼬리로부터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또 머리가 좀 더 굵어지면 여행길이나 행사에서도 빠지기 시작하고, 대학이라도 가고 취직이라도 하면 같은 밥상에서마저 떨어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젠가 결혼을 하고 살림을 가르고, 또 아주 멀리 흘러간다면 다른 세상으로 갈라서게 될 것이다.

아무 때고, 심지어 멀리 있어도 머리와 가슴속에 미리 심어진 통제장치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어머니. 학교에서 시험을 잘 보면 보상으로 무슨 맛있는 걸 사달라고 할까 생각하며 떠올리고, 무슨 사고라도 친 날이면 또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를 고민하며 떠올리게 되는 사람. 그래서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이나 군대 영장이 나온 날, 또 무슨 무슨 순간마다 떠올려야 했던 사람.

그러나 더 이상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 와서 해결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순간. 그리고 마치 세상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못할 고생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어머니의 편지 한 구절을 읽으며, 미처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벌써 어머니로부터 꽤 많이 떨어져 나와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착한 아들이어서도 아니고 무슨 자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도 아니지만, 내가 그에게는 몸과 마음의 한 덩어리였고 나날이 조금씩 흘러가는 한 부분이기에 내가 무엇을 이루고 어디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에게 기쁨인 동시에 또 하나 상실의 경험임을, 그래서 웃으며 눈물짓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받고 일주일이 넘게 흘러, 며칠 안팎으로 뒤바뀐 생활을 받아들일 만한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온전히 펼쳐볼 수 있었다. 그 동안 한 번도 빨지 못한 전투복 윗주머니에 엉거주춤 꽂혀있던 편지는, 그 새 땀을 타고 녹아든 노란 흙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젖고 마르고 또 젖기를 되풀이하며 무슨 대단한 고문서라도 되는 듯 주름져있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도 괜히 가슴이 허전해서 하루 종일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는 말로 시작해서, 이제는 내 품을 떠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겠다는 말로, 그리고 시간이 난다면 편지 가끔씩 달라는 말로 맺어진 어머니의 위문편지.

그날도 무슨 말간 물 같은 것이 목구멍이고 뒤통수고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이상한 느낌 때문에 괜히 일어섰다 앉았다, 걸었다 세수를 했다, 부산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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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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