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선생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 시절을 네 곳의 학교에서 나누어 보냈다. 인천에서 두 곳, 경기도 일산에서 한 곳의 학교를 다녔고, 졸업은 서울 불광동에 있는 학교에서 했다.

처음 입학했던 학교는 채 한 달을 보내지 못한 채, 그래서 친구들과의 헤어짐이 서운해질 만큼의 추억도 남길 여유가 없이 떠나야했었다. 기억 속에도 그 학교 이름만 남아있을 뿐, 사실은 그 교정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어느 한 곳 정을 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운 것이건 미운 것이건, 정이 없는 것은 기억도 되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처음 정을 붙인 학교는 인천 어느 변두리마을에 있었다. 대도시의 변두리 마을이란, 더구나 막 도시화의 물결이 어설픈 서민들 목구멍까지 밀려들기 시작하던 80년대 초반의 그곳이란 도시와 농촌의 경계선 위에 걸쳐진 애매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학교 뒤쪽으로 넘어가면 큰길로 하루종일 많은 차들이 몰려다니기도 했고 그 길 건너편에는 제법 건물들이 늘어서 있기도 했었지만, 또 학교 정문 쪽으로 펼쳐진 반대편에는 굽이굽이 논두렁이 이어지고 야산 언덕배기로 방아깨비 날아다니는 풍경도 이어져 있었다. 교실에는 농부의 아들과 사장의 아들이 섞여있었고, 단칸 월세방집 아들과 그 주인집 아들이 엉켜있었다. 빗물을 받아서 빨래를 하는 집도 있었고, 당시에 흔치 않았던 전자동세탁기가 돌아가는 집도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은 크지는 않아도 보기에 예쁘고 아담한 파란기와지붕의 단독주택이었지만, 바로 맞은편 산 중턱에는 거무튀튀하게 변색한 스레트 지붕과 '새마을천'으로 이곳저곳을 둘러친 작은 집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끔 가까이 가보면 연탄과 연탄재, 그리고 어디선가 흘러와 고였다가 또 어디론가 흘러가는 구정물들. 그리고 그 냄새. 왠지 기분이 깔끔하지 못한 곳이었다. 언제 철거가 된다는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흔히 어른들은 그곳을 '철거촌'이라고 불렀었다.

그래도 학교 근처나 뒤쪽의 아스팔트 깔린 동네 아이들 대신, 학교 정문을 나서면 연립주택 몇 동를 지나고 철길을 지난 다음 논밭과 야산을 하나 넘어오는 길을 같이 걸어야 했던 그 철거촌 아이들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어쩌면 나의 삶에서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곳, 인천 변두리의 그 학교에서 친구란 '힘'이고 '재산'이었다. 아이들은, 같은 반 6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 중에서도 저마다 누가 나의 친구이고 누가 친구가 아닌지를 애써 나누었다. 혹시 나머지 공부를 하거나, 벌청소를 하느라고 학교를 나서는 시간이 좀 늦더라도 기다렸다가 집에 가는 길에서 가방 들어주기 따위를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가 중요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생일파티에 데리고 올 수 있는 친구의 수가 세상 살아가는 힘과 정확히 비례했었다. 특히 아이들 생일이 절반 이상 몰려있던 오월이나 시월이면, 교실에 들어설 때부터 어제 누구 생일파티에 몇 명이나 갔었는지 화제가 만발했다. 살림도 좀 되고, 어머니의 호들갑도 좀 있는 집이라면 삼 사십 명씩 초대해서 동네 잔치 치르듯 하는 집도 적지 않았었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아무리 많은 친구들을 동원하고 싶다고 해도 여간해서는 초청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대략 코를 흘리거나 옷을 잘 갈아입지 않고 다니거나, 혹은 공부를 아주 못하는 아이들이 그 안에 포함되었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대개는 '철거촌' 아이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혹 선물 챙기는 데 별 보탬이 안돼서 그랬을까? 4학년 때였던가,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한 열댓 명을 초대했던 거한 생일파티가 끝나고 방안에 쌓인 공책 열댓 권, 연필 대여섯 다스. 그 외에도 지우개, 책받침, 필통. 그 뒤로 일년이 넘게 쓸 수 있었던 그 학용품들을 되풀이 헤아리며 얼마나 뿌듯해했던가.

그 중에도 아버지가 무슨 회사 상무라던가 하던 아이가 사 준 일제 연필은 공책에 문질러질 때마다 얼마나 부드럽든지. 그러나 반대로, 다른 아이들 눈총에도 불구하고 불러온 철거촌 친구가 한 다스나 사다 안겨주었던 연필은, 세상에 어디서 사왔는지 잔뜩 곯아서 깎아놓기가 무섭게 뚝뚝 부러져 나갔었다. 그리고 평소 옷차림도 깔끔하던 부잣집 아이 얼굴은 새삼 얼마나 흐뭇하게 떠올랐고, 철거촌 아이 얼굴은 또 얼마나 꼬질꼬질하게 느껴지던지.

딱 한 번, 철거촌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사는 동네가 동네인 만큼 잘 사는 형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차림도 깔끔하지 못했고, 공부로도 눈에 띄지 못했으며, 결정적으로는 학기 중에 어디선가 전학을 왔었기 때문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아이들도 많지 않았던 경훈이라는 아이였다. 그나마 생일날 초대를 받을 만큼 내가 그 아이와 친했던 것은 순전히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다.

"은식아. 오늘 내 생일이거든. 이따 우리집에 와."
"생일? 진짜야?"
"응."
"근데 왜 미리 얘기 안 했어?"
"그냥. 원래 파티 안 하려고 그랬는데, 엄마가 꼭 데려오고 싶은 친구 있으면 데려오라고 그래서."

생일이면 보통 한 일주일 전부터 소문을 냈다. 그래야 누구누구가 같이 갈 건지 눈치도 보고, 또 무엇보다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하긴, 간신히 나 하나 초대하는 파티에 눈치보고 계획하고 준비할 것은 또 무엇이 있었겠나. 어쨌건 집에 들어가는 대로 엄마한테 손 벌려 공책 몇 권을 사들고 경훈이네 집으로 갔다.

그렇게 앉은 생일상. 분명히 점심밥 시간인데도 어둠침침한 백열등 한 개가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좁은 골목 한구석, 대문 하나 들어가면 대여섯 가구가 오밀조밀한 콘크리트 스레트 지붕 집. 생일상에는 그 한 지붕 식구들인 코흘리개 서넛이 같이 앉아있었다.

"그래, 니가 은식이구나?"
"네. 안녕하세요."
"그래 그래, 많이 먹고, 우리 경훈이랑 잘 놀아줘라. 응?"

우리 식구로 치면 엄마보다는 외할머니 나이에 가까울 것 같던 경훈이네 엄마. 무엇을 많이 먹으라는지, 밥상 위에는 밥과 미역국과 김치, 특별히 장만했나보다 싶은 것은 무슨 생선조림이랑 계란말이 정도였다. 사과나 귤 따위 과일에다가 땅콩도 섞어 넣고 마요네즈로 버무린 샐러드도 없었고, 무엇보다 케이크가 없었다.

게다가 밥 맛 딱 떨어지게끔 동네 꼬마들 콧물 후룩거리는 소리에다가 서툰 수저질에 사방 튀어오르는 밥풀이며 김칫국물. 나는 생일상 호강은 고사하고 밥 한 공기를 채 비우지 못한 채 일어섰다. 하기야 케이크가 없으니, 밥 한 그릇 비운 다음에야 이어질 여흥거리도 없었겠다.

안 그래도 엄마는 내가 지저분한 애들하고만 어울리는 게 걱정이었다. 그래서 받아쓰기 팔십 점 이상하고만 놀라고도 하고, 코 흘리는 애들하고는 놀지 말라고도 했었다. 그래도 부득부득 받아쓰기 절반도 못 맞추는 코찔찔이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던 나였지만, 이젠 정말 잘 살고, 공부도 잘하고, 깔끔한 아이들하고만 놀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바로 그 날이었다.

2.

사실 지금은 그 순간이 아찔하다. 말로는, 혹은 스스로에게도 얕은 의식 안에서는 아니라고 우기면서, 내가 그 날의 결심을 무의식 속 어딘가에 묻어둔 채 맞춰 살아나갔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을 당했을 것인가. 기껏 잘 살거나 잘 나지도 못한 주제에, '왕년 시골동네 우등생'의 자존심과 눈높이로 세상에 개겨댔으면 얼마나 꼴사나웠겠는가 말이다. 다행이 경훈이 생일상의 꾀죄죄함보다도 비위 상하는 경험을 한 것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학교에서 보면 우리 집 반대쪽 부자동네에 사는 어느 아이의 생일날이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집에 다녀올 시간 없어 바로 따라 나서기로 했었다. 우리 분단이 청소하는 날이라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먼저 출발했고, 나는 혼자 뒤 따라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교문을 함께 나서던 경훈이가, 교문을 나서 엉뚱한 길로 돌아서는 나에게 물었다.

"야, 어디 가?"
"응? 오늘 종덕이 생일파티에 너 안 가?"
"생일?"
"응"
"글쎄…"

안 그래도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뒤꼍으로 몰래 불러내서 '오늘 내 생일이거든' 하던 종덕이. 물론 경훈이까지 초대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경훈이는 당하는 사람의 직감으로 그걸 느끼고는 움츠러드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눈치가 없던 것은 나 하나였다.

"너도 같이 가자."
"같이?"
"그래, 같이 가자."
"나는 오라는 얘기도 못 들었는데?"
"괜찮아. 나랑 가면 되지 뭐. 종덕이 착해. 가자."

착하다거나 못됐다거나,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보기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얼마 후였다. 오른팔 번쩍 치켜들고 조심조심 해가며 건널목을 건너고 또 큰 길 따라 얼마간 걷다가, 우리는 종덕이와 함께 있던 친구들 서너 명을 마주쳤다.

"어? 니네 어디 있었어?"
"오락실"
전자오락실에서 갤러그라도 한 판 하는 시간이 대충 우리 분단 청소시간과 맞았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집 찾기도 가물가물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렇지만 반가운 건 나 하나였다. 경훈이와 나란히 걷고 있던 나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종덕이 패거리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또 반대편에서는 경훈이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뻔한 사실을 굳이 나에게 물어오는 어떤 친구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니네 어디 가?"
"나?"
"응."

어디라니? 경훈이면 몰라도 내가 끼어있는데, 저희들과 곧 만나기로 되어있던 종덕이네 그 근사한 양옥집이 행선지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종덕이네 집'이라고 곧장 답하려다 말고 같이 서있던 서너 명, 그리고 종덕이의 눈빛을 차례로 살폈다. 그리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니네는 어디 가는데?"
"우리는 … 버스 타고 … 어디 갈거야. 그치?"
"응, 응"

어설픈 목소리, 어설프게 분주한 눈빛들, 미리 서 있다던 계획을 굳이 동의 받느라고 산만한 몸짓들. 이제는 그것이 경훈이와 함께라면 나도 필요 없다는 뜻임이 분명해졌다.

경훈이는 주체 못할 멋쩍음에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대고 있었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경훈이 볼 낯이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암호 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그냥 같이 가면 안돼?"
"… 우리는 우리끼리 갈래."

어딘가 뼛조각이 묻어있는 말소리에 움찔 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종덕이가 다시 썰렁한 답을 돌려줬다.

딱 삼학년, 아니면 사학년이었을 그 때. 쥐알 만한 머릿속으로 가닥 모르게 치밀던 꿈틀거림은, 지금 생각하면 분노였다. 그리고 뭔가 대단히 비위에 거슬린 불쾌감이었다. 그나마 '에라 나쁜 놈들아' 하고 주먹다짐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만큼의 자제력마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주먹에 대해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고, 나 따위가 열이 받았건 말았건 겁낼 놈 하나도 없다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파악 때문이었다.

"경훈아, 우리 집에 가자."
"그래."

우리는 냉큼 돌아서서 오른 손 높이 들고 건널목을 건넜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철길을 건너 걸었다. 둘 다 나름대로 뭐가 꿈틀거려 말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한 쪽 돌아보면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철길 앞에서 내가 핫도그를 하나씩 샀고, 우리는 그 지루하던 길을 되짚어 걸으면서 케첩부터 핥아가며 알뜰하게 아껴 먹었다.

그리고 언덕 위에 올랐을 때쯤, 이미 손톱 만하던 소시지도 빼먹은 채 물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집어던지고는 언제나처럼 두 팔을 벌리고 날 듯이 내리막길을 달렸다. 어머니가 바람 불면 사람 날아가는 곳이라고 조심하라던 그 언덕길에서 두 팔 벌리고 달려 내려오면, 정말 새가 된 것처럼 시원했다. 바람은 귓가로 입 속으로 부대껴 요동쳤고, 어떤 날은 정말 뒷꿈치가 들썩들썩 했다.

"이야아아아아"

그렇게 소리 지르고 뛰어내린 언덕길에서,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가방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곳에서 우리 집 앞까지는 언제나 우리가 가방 들어주기를 하는 코스였다.

그 날은 샌드위치맨처럼 내가 앞뒤로 책가방을 메고 느릿느릿 발을 끌었는지, 아니면 경훈이를 그 모양을 만들고서는 의기양양 집 앞까지 미리 달려가 기다렸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모양새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앞으로도 생일이 되면 경훈이는 꼭 초대를 해야겠다고, 그리고 경훈이 생일이면 꼭 다시 가서 밥 한 그릇 다 비우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싱글거렸었던 것은 생생하다.

덧붙이는 글 | 김은식 기자는

"솔직해지기 위해서, 모른 체 눈감고 살기를 좋아하는 제 머리와 싸운 흔적을 글로 남기고 있으며, 그렇게 쓴 글은 개인홈페이지 '솔직해지기 위한 투쟁'(www.kes.pe.kr)에 모으고 있습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맛있는 추억'을 연재해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에 선정되었으며, 그 글은 동명의 산문집으로 엮여지기도 했습니다. ("맛있는 추억", 자인刊)"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