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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쯤 무심코 달력을 쳐다보다가 되풀이하는 일이 있다. "응? 입춘이 지났네. 그럼 봄이잖아, 벌써" 하고 중얼거리면서 창문 밖 공기를 심호흡해보는 것이다. 그래봤자 꼭 몇 초도 못 견디고 창문을 다시 꼭꼭 다져 닫으면서, 무슨 봄이 이렇게 추우냐고 이죽거리지만, 그래도 벌써 그새 찬바람을 타고 온 봄의 예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봄이란, 그냥 말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초등학생이라면 이때쯤이 대충 봄방학 기간과 맞을 것이다. 요즘에는 학교에 따라 봄방학 없이, 새 학기 전까지 겨울방학을 연장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마도 겨울방학 개학부터 봄방학 전까지의 일주일이 어차피 학업에도 도움이 안될 바에야 내쳐 방학으로 삼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겠다.

내 기억 속에서도 그렇게 봄방학을 기다리는 일주일과 봄방학 일주일은 방학도 아니고 학기도 아니었다. 그 두 주는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여름방학보다 길어서 두 달 가까이 되던 겨울방학. 너무 길어서 그랬는지,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는지, 여름방학과 달리 겨울방학은 끝나갈 때쯤 되면 좀 지겹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래서 까맣게 잊고 지냈던 먼 동네 사는 짝꿍은 뭘 하고 있으려나 궁금해질 무렵 개학날이 돌아왔다.

그래도 막상 개학 바로 전날이면 뭔가 아쉬운 마음에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허전한 방학숙제 가방 걱정에 칭얼대다가 엄마한테 한 대씩 쥐어박히기도 했지만, 그런 찜찜한 시간은 길어야 다음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서 반 친구들을 만날 때까지면 충분했다.

두 달만의 만남이 어느 만큼은 서먹할 만도 하지만, 그 때는 하루 지나 만나는 것과 조금도 다른 느낌이 아니었다. 소리소리 질러가며 인사도 나누고, 대보름날 불깡통 마냥 신발주머니도 빙빙 돌려대며 한달음에 한 오리 길을 달려가며 도착한 학교. 운동장엔 이곳저곳 쓸어모은 눈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겨울방학이 끝난 그 날부터 봄방학까지의 한 일주일동안은 참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방학식날에야 물론 '방학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학습의 연장'이라는 둥, 귀에도 들어오지 않을 소리를 늘어놓으며 만일 방학숙제를 조금이라도 빼먹으면 개학날 곡소리 날 줄 알라고 협박도 해대지만, 또 정작 이날이 되면 깐깐하게 숙제검사 해가며 잔소리하는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

"자, 방학동안 숙제 해온 것들 중에서 이건 자신 있다, 이건 친구들 보여줄 만 하겠다 싶은 것 있는 사람 손들어봐. … 아니, 아니, 방학책이나 일기장 말고, 공작품이나 붓글씨나 그림 같은 거."

사실 웬만한 숙제들은 해왔건 아니건, 분단별로 걷어간 다음 별 소식도 없었다. 그나마 좀 부모님 손 품이 들어간 작품들이 특별히 걷어져 교무실 앞 복도에 한 두 주동안 전시될 수 있었다.

그랬다. 생각 해보니 그랬다. 봄방학 전까지의 일주일동안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치는 선생님은 없었다. 수업시간도 대개는 그리 빡빡하지 않았었다. 각자 방학동안 있었던 일을 발표하다 보면 반나절이 갔고,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노래나 춤 따위 장기자랑을 했었다.

분명히 반팔 입고 다니던 어느 땐가는 앞에 나온 녀석들도 온통 교회에서 배운 율동이나 해댔고, 불려나온 여자아이 하나는 울음보를 터뜨리는 바람에 이왕 시작한 장기자랑을 마치고도 종이 울릴 때까지 한참동안 빡빡한 수업을 들어야만 했는데. 그 새 육십 명 가까이 되었던 아이들은 이 복작복작한 교실에서 일 년을 함께 보냈던 것이고, 어느새 조용필 노래를 부르고 이주일 걸음을 보여줄 만큼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핸가는 영하 삼 도 이하인 날만 불을 붙이는 조개탄 난로가 아직 빨갛게 물든 교실 중간쯤 심사위원 석에서, 정년 앞둔 담임선생님이 꼬박꼬박 졸고 있는 동안에도 한 녀석은 '시골영감 기차놀이'를 부르며 개다리춤을 추고 있었다.

봄방학을 하고 나면, 이별이었다. 새 학년이 되면 새 교실, 새 책, 그리고 새 친구, 새 선생님과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봄방학은 이별의 순간이었고, 봄방학 전의 일주일은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일분단부터 맨 앞사람 나와라. 나와서 국어책을 받아가서 나눠줘라.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나와서 산수책…, 야 이놈들아 떠들지 말고. 책은 나중에 천천히 보고, 먼저 다른 친구들 것부터 나눠주란 말이야."

봄방학을 하루쯤 앞둔 날, 새 책을 받는 날만큼 기분이 새롭고 들뜨는 날이 있었을까? 빳빳하고 깨끗한 표지 속, 몇 페이지 넘겨보면 풍겨 나오는 새것의 냄새.

"야 이놈들아, 너희들 한 달 만 지나면 읽기 싫어서 지긋지긋하다고 할거다."
일년 내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만큼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이 이것저것 들춰보고 재잘대는 동안에도, 선생님은 큰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은 채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하면, 선생님 입장에서야 어쨌거나 평생 수십 번 같은 일정을 되풀이하는 직장에서, 무엇 그리 새삼 서운할 것이 있었을까. 육십 명씩 들어차, 그나마 좀 포악한 놈이 책상에서 의자만 조금 느슨하게 빼 앉아도 한 줄 전체가 달박달박 부대낄 만큼 빼곡했던 교실. 그 속에서 하나 가득,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조잘대는 말썽쟁이들이 무엇 그리 그리울 거라고. 어쨌거나 우리 아이들 중 아무도 모르는 사이 선생님은 평소 같지 않게 너그러운 표정, 너그러운 음성으로 가닥도 없이 '인생'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인생은 말이야, 마라톤 같은 거야. 백 미터 달리기가 아니고, 사십 킬로미터를 달리는 경기란 말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그 중에서 이제 막 한 … 백 미터쯤 온 거지…."
"사람은 말이지, 공부만 잘하는 게 다가 아니야. 일제시대 때 친일파 하던 놈들도 사실은 다 공부 잘한 사람들이었거든.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친구들 위할 줄 모르고, 약속 안 지키고 그런 사람은 친일파처럼 나쁜 놈이 되는 거야…."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야. 선생님 친구중에 아주 똑똑한 놈이 있어. 젊은 나이에 아주 출세를 했지. 그런데 이 친구가 결혼을 잘못하는 바람에 말이야, 아주 패가망신을 했지 …."

그 뒤로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또 군대와 에비군 훈련장에서 되풀이 반복해서 듣게되는 바로 그 이야기들. 아마도 저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원형은 봄방학 전 일주일동안 주워들은 것들이 아닐까?

글쎄, 그런 이야기를 왜 하시는지는 잘 몰랐다. 좀 어릴 때는 맥락이건 무엇이건 따지지도 못했고, 한 사오 학년이라도 되어 머리가 좀 굵은 다음에는 선생님도 수업하기 귀찮아서 딴소리를 하나보다 하고 삐딱한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득 되짚어 생각해보니, 꼭 졸업시키는 날도 아니지만 그 일년의 악다구니 같은 부대낌 끝에 보내는 자리가 또 그 시간만큼은 감개무량하고 비장해서 그렇게 빙빙 돌아가는 사설이 길지 않았나 싶다.

그 시절에서 이십 여 년을 지나, 이제는 계절 구분 없이 사람을 만나고 또 떠나보내며 살고 있다. 일 때문에도 만나고, 취미 때문에도 만나고, 혹은 이런저런 명분 때문에도. 그렇게 한 달도 만나고 꽤 몇 년 부대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학교 졸업한 뒤로는, 그리고 군대 제대한 뒤로는 더 이상 준비하거나 가슴 울렁이며 이별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봄은, 말만으로도, 그 발음되고 남은 울림만으로도 따뜻하다. 그런데 또 영하의 공기 속에서도 떠오르는 그 따뜻함 한자리에는 뒤통수 어딘가 새겨져 있다가 이십 년 지나 다시 눈에 밟히는, 봄방학 기다리던 며칠간의 선생님의 싱숭생숭한 몸짓과 눈빛과 음성의 추억이 녹아있지 않나 싶다.

2월은 아직 추워도 봄방학 철이다.

덧붙이는 글 | 김은식 기자는

"솔직해지기 위해서, 모른 체 눈감고 살기를 좋아하는 제 머리와 싸운 흔적을 글로 남기고 있으며, 그렇게 쓴 글은 개인홈페이지 '솔직해지기 위한 투쟁'(www.kes.pe.kr)에 모으고 있습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맛있는 추억'을 연재해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에 선정되었으며, 그 글은 동명의 산문집으로 엮여지기도 했습니다. ("맛있는 추억", 자인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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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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