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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책은 내 책꽂이에서 제일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다. 표지는 네 변을 따라 닳다 못해 매캐한 속살이 하얗게 뒤집어지고 있고, 앞뒤로 수도 없이 꺾인 속지는 각기 접착제를 떨어져나와 낱장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처음 사는 날에는 헌책이라고는 해도 유난히 멀쩡했던 이 책이 이렇게까지 부서지고있는 것은, 또 그만큼 내가 바지런히 꺼내 읽었다는 뜻이 되겠다. 다시는 쳐다볼 것도 없이 묻어두었어도 '책값 뽑을' 걱정은 전혀 없었을테지만, 또 이 책만 쳐다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흐뭇해서 한번씩 뽑은 김에 잡고 읽곤 했던 것이다.

여느 책과 비슷한 점이겠지만, 이 책도 '미장센'과 '몽타쥬'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장을 읽기까지는 그것을 제외한 다른 재미있는 부분들을 질리도록 읽는데 필요했던 최소한 몇 달이 걸려야 했다. 나에게 이 책이 진정 유용했던 것은, 영화잡지 연재글을 묶어놓은 책답게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 10', '80년대 최고의 영화 100편' 식으로 순위를 매겨놓은 글이 많다는 점이었다.

나에게 영화란 차근차근 밟아나가 성취하고 싶은 학문적 대상이기 이전에, 어쨌거나 볼거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구구한 이론적 설명 이전에 '이것을 보아라'는 지침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비디오가게에서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 역시 영화의 기원, 편집기법, 혹은 <시민케인>이나 <라쇼몽> 따위 비디오가게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영화들에 대한 극찬으로 대부분을 채우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써먹기에 따라서는 유용한 정보가 꽤 있었던 셈이다. 특히 '할리우드'라는 코너에서는 웨스턴, 멜러, 코미디, 호러 등으로 구분한 장르별로 설명과 더불어 말미에는 '추천영화 10'같은 식으로 모범답안을 제시해주곤 했던 것이다.

내가 <보니와 클라이드> <스카페이스> <블레이드러너> 따위 영화들을 비디오가게에서 뒤져다가 보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이 책의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영화보기는 이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 만든 또 다른 영화, 저 배우가 출연했던 또 다른 영화 하는 식으로 이어져 새로운 욕구와 관심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가게 했다.

물론 그것은 <스카페이스>의 알 파치노나 <블레이드러너>의 룻거 하우어같은 배우의 카리스마가 내 머리를 단번에 잡아채서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체관람 영화를 뺀다면 개봉관에서 본 영화가 그때까지의 내 삶에서 딱 두세 편 밖에 되지 않았을 내가, 심지어 동네 비디오가게 아저씨를 다그쳐서 <시민케인>과 <전함포템킨>을 주문해다가 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뿐인가, 그 때만 해도 일본영화에 대해서는 전면 수입이 불허되던, 그리고 일본문화개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해도 그것이 관료건 학자건간에 1면 톱을 장식해야 했던 때인지라 <라쇼몽>이니, <감각의 제국>이니 하는 영화에 대한 소개는 괜한 호기심에 불을 질러 결국 PC통신을 통해 불법복제 비디오테이프 수십 개를 사들이도록 만들기까지 한 것이다.

그 비디오테이프가 도착한 날, 나는 구로자와 아끼라, 오시마 나기사, 오즈 야스지로 등등 대가들의 고전으로부터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레터에 이르기까지, 스무 개 정도의 테이프를 비디오 데크에 번갈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즐거움을 만끽했었다.

역시, 소심한 사람이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식당에서 음식 한 그릇을 먹으면서도 이 한 그릇 원가가 얼마일까를 따져보곤 한다. 목욕탕을 나설 때는 내가 쓴 물값이 얼마일까 궁금해하고, 신문지 여행광고를 볼 때도 비행기값과 숙박료에 물려 계산을 하느라 가지도 않을 여행에 괜히 정신이 번잡하다.

흔히 책을 읽을 때도 내가 책값을 하는지 떠올려보곤 한다. 그런데 적어도 이 책은 책값이랄 것이 없다. 오천원을 내고, 이 책 한 권과 현찰 만원을 돌려받았으니 굳이 값을 따진다면 마이너스 오천원이다. 그런데도 최소한 수백 번은 읽고 곱씹어 영화라는, 세상 사는 재미 하나, 아니 세상 보는 눈을 하나 더 얻었으니 아직까지도 책꽂이에 꽂힌 이 책만 보면 가슴떨리게 흐뭇하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정말 행운은 만원짜리 한 장 얻은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하필 곱씹어 읽어도 별 손해날 것 없는 책에 끼어있다가 내 눈에 띄어, 그 기분에 진하게 읽힌 것 자체가 작지 않은 행운이다.

꽤 몇 년이 되었는데, 아마 꽤 많이 문을 닫았을테지만 간만에 또 그런 행운이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조바심이 난다. 다음 주말에는 청계천으로 나가볼 작정이다.

덧붙이는 글 | 김은식 기자는

"솔직해지기 위해서, 모른 체 눈감고 살기를 좋아하는 제 머리와 싸운 흔적을 글로 남기고 있으며, 그렇게 쓴 글은 개인홈페이지 '솔직해지기 위한 투쟁'(www.kes.pe.kr)에 모으고 있습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맛있는 추억'을 연재해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에 선정되었으며, 그 글은 동명의 산문집으로 엮여지기도 했습니다. ("맛있는 추억", 자인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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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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