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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매연에 찌든 서울 시내에도 수북히 쌓이더니, 곧 이어 몰아닥친 한파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일간신문의 만평들은 앞다투어 꽁꽁 얼어붙은 한반도에 '정치광풍'을 맞으며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불쌍한 국민들을 그려내기 바쁘다.

이렇게 썰렁한 새해맞이에 가슴이 시린데 또 하나 우울한 풍경을 접하게 되었다. 지난 14일(일) 밤10시 50분 SBS <뉴스추적> '충격보고! 겁 없는 초등학생들'이 그것.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을 같은 학교 5, 6학년 남학생 서넛이 집단 성폭행한 사건과 동네 할머니에게서 돈 1000원을 뺏으려고 각목까지 동원해 구타한 사건, 단지 욕을 했다는 이유로 6살난 동네 꼬마를 살해하고 신원을 알 수 없도록 발가벗겨 강물에 유기한 사건을 차례로 소개한 <뉴스추적>은 이제 겁없는 10대보다 충격적인 '겁없는 초등학생'을 보여준다.

특히 첫번째 소개된 집단 성폭행 사건의 경우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냉정한 어른들의 그릇된 인식 때문에 8살 어린 피해자는 전문의의 치료를 요하는 우울증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 사건 모두 가해자가 형사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고 피해자측의 고소도 기각되었다고 한다.

<뉴스추적>에서는 이처럼 청소년 비행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지만 정작 가해자인 아이들은 반성할 줄 모르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보고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12세 미만의 아동에 의한 범죄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어서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형사미성년자 연령을 낮추어서 처벌의 폭을 넓혀야 된다는 보수적인 주장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며 청소년 범죄의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한다.

한편으로는 형사미성년 범죄의 피해자들도 아이에 대한 처벌보다는 교육을 통한 재발 방지를 원하고 있다며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므로 처벌보다는 선도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도 전한다.

그러나 'TV 꼬집어 보기'를 연재하고 있는 기자에게는 초등학생들 범죄의 배후조종으로 TV가 지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니는 초등학교 관계자의 인터뷰 중에 "5,6학년 학생들은 호기심을 갖는 거야... 애들 불장난이죠. 꼬마애들. 그리고 성행위 자체를 그렇게 안다라기보다는 이거 재미있는 거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데... 한번 해 보자... 그런 식이었던 것 같아. 내 느낌이..."라는 지적이나 팔순 할머니를 집단 폭행한 아이들이 "저랑 00이랑 계속 때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한 30분 뒤엔가 때리다가 말고 인제 우리도 지치잖아요, 때리면서... 그래서 우리가 30분 뒤에 나갔어요", "그 다음날에는 또 인제 새벽 5시에 갔거든요. 이만한 거 몽둥이 하나 갖고 왔어요. 우리 둘이요. 그 걸로 막 때리고요. 할머니 못 일어서게요. 발로 밟았어요."

반성의 빛을 보이기보다는 무용담처럼 폭행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이들이라는 기자의 나레이션은 아이들의 폭력 선생으로 TV를 지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TV의 선정, 폭력성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란은 오래된 것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되고 있을 만큼 확실하게 그 영향이 입증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TV는 청소년들의 폭력성을 증가시키는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 범죄나 일탈에 관한 뉴스가 전해지면 순진한 청소년들을 물들인 '나쁜 친구들'로 TV를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연초에 베를린에서 날아든 다음과 같은 소식을 보면서 TV는 청소년들에게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본다. 제대로 '꼬집어 보기'만 한다면...


TV가 아이들을 유순하게 만든다

(베를린=연합뉴스) 송병승 특파원= TV가 아이들을 공격적으로 만든다는 통념과는 달리 실제로는 아이들의 폭력성과 반사회적인 성향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한 연구조사 결과 나타났다고 독일 일간 디 벨트가 4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한 대서양 남부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TV가 보급되기 이전과 이후의 아이들의 태도를 장기간 관찰한 결과 이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전했다.

5600세대가 거주하는 세인트 헬레나에는 95년에야 비로소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영국의 한 연구팀은 이 지역에서 TV 보급 이전과 이후의 아이들의 놀이 방식과 상호관계를 관찰했다. 연구팀을 이끈 토니 찰튼 교수는 이 지역이 고립된 지역이며 최근에서야 TV가 보급돼 TV의 영향력이 극명하게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TV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측정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말했다.

2년간에 걸친 관찰 결과 통념과는 달리 TV가 보급된 이후 세인트 헬레나의 아이들은 행동이 더 유순해지고 서로 사귀는 방식과 언어도 순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찰튼 박사는 이번 연구 결과를 토대로 TV가 아이들을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만든다는 기존의 통념은 다른 여러 요인을 무시하고 TV에 잘못을 전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TV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현대 도시에 사는 아이들의 생활 환경이 문제라는 것이다.

현대 도시 아이들은 점점 더 고립돼가고 있다.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부모가 있더라도 맞벌이하는 경우가 많아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과 같이 대가족이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도시에서 이웃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기회도 거의 없다. 이같은 환경에서 혼자 TV를 보는 아이들은 나이에 부적절한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고 이같은 방치된 환경이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세인트 헬레나의 경우 마을 사람 모두가 서로를 알고 지내는 공동사회가 형성돼 있으며 이것이 아이들의 TV 시청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게 하는 요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팀은 세인트 헬레나의 경우를 통해 정서적인 유대가 강한 공동사회에서 어른들의 관심과 보호아래 아이들이 TV를 시청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사회적 관계 형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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