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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장 제1조 제1항이다.
웬 뜬금없는 소리냐고 눈흘기지 말기 바란다. 하릴없이 헌법을 들춰야 할 풍경이 버젓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기실 뜬금없기로 치면 단연 신문권력이 으뜸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앞다퉈 `대한민국 정체성'을 들고 나서지 않았던가. 참으로 궁금하다. 감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어기겠다고 누가 나서기라도 했던가.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왜일까. 유력 언론들이 갑작스레 정체성을 거론하고 나선 까닭은 도시 무엇일까.

`정체성'은 이회창 총재와 <중앙일보>가 만났을 때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 총재는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민국의 정체성 양보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북한측이 정상회담을 거부하며 내세운 원칙과 조건이 국가보안법 폐지, 외세와의 공조폐기, 친북인사 활동보장 세 가지였다”며 정체성을 주장한 이유를 밝혔다.

이틀 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 나섰다. 김대중칼럼은 “북한은 지난 십수년간 남북한 당국간 대화의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남한 내 연북세력의 자유로운 활동을 내세워왔다”며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는 그 어떤 양보'도 `묵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총재의 말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놓은 듯한 그의 칼럼은 이어 예의 감정적인 선동에 나선다. “북한 비위 맞추기 따위의 기회주의성 발언이 자제돼야”한단다. 주필임을 과시하고 싶어서일까. 같은 날 사설제목은 `북한 비위 맞추기의 시작인가'다. 도대체 누가 `북한 비위맞추기'에 나서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김대중 주필보다 더 희극적 인사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다. 그는 이회창 총재와 만나 정체성 지키기를 약속했다. 우리 모두 냉철할 필요가 있다. 다음 달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은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 첫 만남이다.

남북 모두 응당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거니와 무릇 대화는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잣대만을 고집한다면 도대체 남북정상회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과연 국가보안법이나 주한미군이 곧 대한민국의 정체성인가에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보안법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수치'가 된 지 오래다. 민주공화국의 헌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악법 중의 악법이다. 신문은 물론 텔레비전이 눈감아온 주한미군의 지위 문제 또한 이제 우리 내부에서 마땅히 공론화할 때다. 지구상에 아직도 미군이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보안법과 주한미군의 지위 문제는 대한민국 스스로 민주공화국 이름에 걸맞게 추스려야 할 과제들이다. 정체성을 위해 덮어둘 사안이 아니다. 정반대다. 정체성을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할 쟁점이다.

문제는 다시 수구언론이다. 얼마나 노련한가. 정상회담을 이용해 되레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과 민족자주성 확립에 발목을 잡는 발빠른 모습을 보라. 보안법 폐지나 주한미군 지위문제를 거론하면 언제든지 친북 또는 연북세력으로 몰아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정체성에 목청을 돋우는 자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를 물어야할 까닭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민주공화국임에도 바로 그 민주주의를 짓밟은 자들이 정체성 운운하고 나서는 현실은 소가 웃을 일이다. 민주공화국을 학살자들이 피로 물들일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민주주의의 바탕은 사상의 자유다. 유럽의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진보정당이 집권하거나 집권할 수 있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다. 수구언론·수구정당의 여론몰이는 이 나라가 영원히 저들의 공화국이길 꿈꾸는 자들에겐 놓칠 수 없는 `무기'이다.

하여 오늘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나라로 착각하는 무리들에게 대한민국 정체성이란 말을 꼭 돌려주고 싶다. 모쪼록 되새김질하기 바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겨레 5월4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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