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3 18:54최종 업데이트 24.03.2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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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KBS가 보도한 [50초 리포트] “위안부는 가짜이야기” 이런 책 서평회 누가 가나 봤더니… ⓒ KBS


독립기념관의 박이택 이사가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였음을 부정하는 행사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잘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확산시키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소장을 겸직하는 그가 23일 열릴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서평회에 서평자로 참여한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반일종족주의>의 공동 저자인 주익종 이승만학당 이사가 작년 12월에 펴낸 이 책은 '위안부가 성노예라는 이야기는 좌파들이 지어낸 가짜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주익종 이사는 이 책 서문에서 2019년까지만 해도 "위안부 자체를 연구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랬던 자신이 이 책을 쓴 것은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 때문이라고 소개한다.


램지어 교수는 별다른 근거도 없이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논문을 썼다가 국제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주익종 이사는 "그 비판은 엉터리였고 인신공격에 불과하였다"라며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필자는 그 엉터리 비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램지어의 주장을 응원할 목적으로 책을 집필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처럼 램지어를 옹호할 목적을 띠는 서적의 서평자로 박이택 독립기념관 이사가 참여한다. 독립기념관 이사가 이런 서평에 참여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고, 이런 서평에 참여하는 인물이 독립기념관 이사인 것도 사리에 맞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은 램지어에 더해 또 다른 인물에 대한 지지도 있다. 주익종 이사는 제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이승만이 쓴 <일본 내막기>와 연관 짓는다. "일찍이 이승만 박사가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이 미국과의 전면 충돌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인 책이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 1941년 8월 출간)이다"라며 "이 박사가 일본의 내막을 미국인들에게 알린 것처럼 필자 역시 일본군 위안부제의 내막을 알리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친일파들의 협력 속에 조선총독부가 벌인 위안부·강제징용·강제징병 같은 일제 강제동원으로 인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가슴에 한을 쌓게 됐다. 이들의 한을 짓밟은 인물 중 하나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강제동원을 부추긴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을 가로막았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6일에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경찰을 동원해 습격했다. 이런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을 제목에서부터 깔고 있는 책의 서평에 독립기념관 이사가 나서게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침략한 핵심 동기

일본의 자금 지원까지 받으면서 식민지배 문제를 연구해온 낙성대경제연구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학문적 순수성에 기반한 듯이 주장하지만, 이들의 논문을 살펴보면 그런 주장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장인 박이택 독립기념관 이사의 연구도 마찬가지다.

박이택 소장은 일제 식민지배로 한국인들만 잘됐을 뿐 아니라 한국의 뽕나무들도 잘됐다, 한국의 누에들도 잘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작년 8월에 <경제사학> 제47권 제2호에 실린 '식민지 조선의 양잠업: 성장의 원천과 특질'에서 그는 국권이 침탈된 1910년경부터 일본 뽕나무들이 한국에 유입된 일을 언급하면서 "조선에서 전통적으로 심었던 재래 뽕나무에 비해 일본에서 수입한 개량 뽕나무는 상대적으로 재배 수지가 좋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 뽕나무 잎을 먹은 누에들이 더 많은 누에고치를 생산했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식민지 한국이 세계 누에고치 4강이 되었다고 말한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의 누에고치 생산량은 괄목할 만큼 성장하였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1910년의 누에고치 생산량을 3만 석으로 보고 1석을 8관으로 환산하면 24만 관을 생산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1939년에는 그보다 24배 많은 567만 8000여 관을 생산하게 되었다. 29년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11.5%였으며, 1939년에 조선은 세계 제4위의 누에고치 생산국이 되었다."

제국주의가 세계 곳곳을 침략한 핵심 동기는 자국 자본가들의 이윤 확대에 있었다. 이들은 더 많은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군대와 종교를 앞세워 외국을 침략했다. 이들이 식민지의 생산성을 높인 것은 현지 민중이 아닌 그들 자신을 위해서였다.

강도들이 남의 집에 침입해 밥 짓고 반찬 만드는 일을 지시했다고 해서 그 집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강도들의 강압하에 그 집 사람들이 그 집 쌀과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강도들 입속에 들어갈 뿐이다.

한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가 높은 생산성을 거둔 것을 두고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일본의 근대화를 돕는 것에 불과했다. 1910년 이후로 한국 뽕나무의 품종이 바뀌고 누에고치 생산량이 많아진 것도 마찬가지다. 이로 인한 결실이 일본 자본가들에게 돌아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제 양잠 정책에 대한 저항

한국인들이 일제 강점 9년 만인 1919년에 거족적인 3·1운동을 일으킨 것은 일제 지배로 인해 먹고 살기가 더욱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들썩인 이 운동은 일제의 지배가 한국이 아닌 일본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런 저항의 대열에 한국인 양잠업자들도 앞장섰다. 이는 일제의 산업정책이 한국인 양잠업자들의 이익과 배치됐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저항은 충북 영동군의 사례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작년 9월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16권에 실린 김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의 논문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뽕나무 재배 정책과 조선인의 대응'은 박승의 <191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3권을 근거로 "뽕나무에 대한 불만으로 면사무소 습격이 일어난 대표적인 지역은 충북 영동"이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영동 지역은 산간 지역으로 뽕나무 재배가 어려웠으나, 행정기관은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뽕나무를 배부하였고 농민들은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은 3·1운동을 계기로 표출되었고, 군중들은 4월 3일 영동군 학산면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중략) 시위를 주도한 양봉식·이기영·정하용·이건양·전만표·전재득 등은 약 300명의 군중과 태극기를 흔들며 뽕나무에 대한 불만을 연설하며 군중을 선동하였다."

일제의 양잠 정책에 대한 저항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일제가 강제로 나눠준 뽕나무 모종을 밤중에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은 "봉화군 지방에 있어서는 상묘(桑苗)의 배부에 불평을 하여 이를 수령하지 않는 자가 있고, 또는 수령하였으나 야간에 면사무소 앞에 버리고 가는 자 등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누에 알을 붙이는 종이를 집단적으로 반납하는 이들도 있었다. "영덕군 지방에서는 군청으로부터 잠지(蠶紙)의 배포를 받았으니 동민이 모두 이를 반려한 사례가 있다"고 위 책은 말한다.

뽕나무 재배가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이익이 됐다면 이런 저항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익이 되기는 됐지만 주로 일본인들에게 이익이 됐기에 이 같은 반응들이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양잠농은 잘되는데도 한국인 양잠농은 여전히 영세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불만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안목 있나
 

독립기념관 이사로 임명된 박이택 낙성대경제연구소장이 지난 2월 22일 독립기념관 겨레누리관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이택 독립기념관 이사 역시 한국인 양잠업자들이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 땅에서 양잠업의 생산성이 증가하는데도 일본인들만 잘되고 한국인들은 여전히 영세했다면 일제의 양잠 정책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도 그는 다른 데서 찾았다. 그는 그것이 한국인의 문제라고 말한다.

"조선의 양잠 규모의 영세성은 조선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조선인의 특성에 의거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조선인 양잠 농가의 특질을 규정한 것으로 조선인 농촌 가옥의 규모와 구조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일본인 양잠업자들과 달리 한국인 양잠업자들은 양잠업에 필요한 공간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전용 잠실을 갖춘 한국인이 많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한국인 양잠업자들을 영세하게 만든 "조선인의 특성"이다. 식민지 한국이 세계 4위의 양잠 강대국이 되는데도 정작 한국인 양잠농들은 영세성을 탈피하지 못한 원인을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한국인 양잠농들이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일제가 아닌 '조선인의 특성'에 있었다면, 양장농들의 시위가 3·1운동 시기에 대중적 호응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제 양잠정책이 문제라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대중적인 만세운동으로 확산됐다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그런데도 박이택 이사는 양잠업의 생산성이 증가한 것만 언급하고 그로 인한 이익이 한국인들에게 분배되지 않은 이유는 올바로 설명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안목이 있는지를 의심케 된다.

그런 그가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서평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색한 게 있다면, 그가 독립기념관 이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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