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6 11:17최종 업데이트 24.03.1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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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 ⓒ 자료사진

 
봄이 되면 4·3 이야기가 들려오는 빈도가 점점 높아진다. 제주 4·3의 주역 중 하나인 김달삼(金達三)의 이름도 더 자주 거론된다.

1948년 4·3항쟁을 주도한 김달삼은 해방 당시 스무 살이었다. 김달삼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1948년 7월 21일 자 <조선일보> 2면 좌하단은 "폭도 정예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자는 28세 되는 학병 출신으로 대정면 태생 이승진이라고 하며 김달삼·이상길 등 두 가지의 가명을 쓰고 있다 한다"라고 보도했다. 23세인 김달삼을 28세로 표기한 것은 오보였지만, 이승진이 본명이고 김달삼은 가명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김달삼이라는 이름의 원래 사용자는 이승진의 장인이었다. 지금의 <중앙일보>가 아닌 일제강점기의 <중앙일보> 1933년 2월 26일자 2면 중간은 조봉암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상하이에서 신의주로 압송된 항일투사 강문석(姜文錫, 1906~1955)을 거명하면서 그의 가명이 김달삼이라고 전했다. 바로 이 강문석이 항일운동 때 사용했던 가명을 해방 뒤에 그의 사위가 쓰게 됐던 것이다.  

장인의 가명을 이어서 쓴 사위

일제 강점 4년 전에 출생한 강문석은 지금의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출신이다. 그가 이승진을 사위로 맞이한 것은 해방 7개월 전인 1945년 1월이다. 4·3 전문가인 고 김관후(전 제주문화원 부원장) 작가가 2013년 10월 24일자 <제주의 소리>에 기고한 '김관후의 4·3칼럼' 제11회에 따르면, 이승진이 강영애와 결혼한 곳은 일본이다.

1923년에 대정읍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이승진은 주오대학 시절에 학병으로 강제동원됐다. 그런 뒤 육군예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군 소위가 됐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이승진은 해방 직후에 항일투사 출신들과 가까워졌다. 여기에는 강문석의 역할이 컸다. 강문석이 이승진과 대구 지역 항일진영을 중개해줬던 것이다.

김관후 칼럼은 "1946년 장인 강문석의 소개로 공산당 경북대표 장적우, 경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상훈, 동 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 농민연맹 경북위원장 장하명 등을 알게 되고, 특히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과 교분이 두터웠다"라고 설명한다.

이승진은 제주 4·3 이전에 일어난 1946년의 대구 10월 항쟁에도 참여했다. 미군정의 친일청산 방해, 경제정책 실패, 민족분열정책에 맞서는 이 항쟁을 계기로 그는 항일진영의 신임을 받았다. 그런 뒤에 제주 4·3을 주도하게 됐다.

제주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릴 적에 제주를 떠난 이승진이 해방 얼마 뒤 제주도민들의 무장투쟁을 지도할 수 있었던 일은 강문석의 역할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장교 출신이기는 하지만 4·3 투쟁 당시 이승진이 23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승진의 정신세계에서 강문석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승진이 김달삼이라는 가명을 계승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국무총리 소속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펴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이었던 이삼룡은 79세 때인 2002년 7월 11일에 이렇게 증언했다.

"1947년 말, 조직에서 가명을 쓰자는 말이 나왔을 때 내가 이승진에게 '자네 장인이 일제 때 김달삼이라는 가명을 썼는데 그게 좋겠다고 증언했다."

이승진은 미군정과 친일세력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하면서 아버지나 다름없는 장인의 가명을 썼다. 또래인 이삼룡의 위와 같은 제안이 없었더라도, 그런 가명을 쓴 것은 이승진이 강문석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준다. 신혼 3년 차 새신랑이 장인의 소개로 항일진영과 손잡은 뒤 장인의 가명을 썼다면, 장인에 대한 정신적 의존도가 컸으리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4월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은 유족들이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민족의 자주독립에 인생을 건 강문석

18세 때인 1924년에 대정공립보통학교를 나온 뒤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한 강문석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인정하는 능력자였다. 이 신문의 1933년 2월 26일자 7면 우중단은 "재사(才士)로, 또한 리론과 책동에 잇서 총애를" 받는 인물로 평가했다. 이론과 기획 및 실행 등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재사로 호평했던 것이다. "경성공립중학교에서 1호의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기사 내용에서도 그에 대한 높은 평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그를 범법자로 취급했다. ○ 2개에 들어갈 단어는 '독립'이나 '항일'로 보인다. 이 시절에는 기사에 이런 기호가 많았다. 이 기사는 강문석을 범법자로 취급하면서도 위와 같이 높이 평가했다. 탁월한 인재가 항일진영에 가세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강문석은 19세 때인 1925년에 모슬포에서 한남의숙을 설립하고 모슬포청년회를 무대로 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런 활동을 하면서도 경성중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던 것이다.

22세 때인 1928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의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천재적 기질을 발휘해 여러 가지를 병행했다. 학업을 하는 와중에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에 가입했다.

이 조직의 간부가 된 그는 대담한 거사에 참여했다. 김관후 칼럼에 따르면, 오사카의 한국인 노동자 3백여 명과 함께 현지의 공장을 습격하는 거사에 가담했다.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던 것이다.

위 <매일신보> 기사는 "빈한한지라 항상 세상의 불공평을 늑기는 가운데에서" 강문석이 그런 일들을 벌였다고 평했다. 이 기사의 표현대로 그 자신이 가난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본에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동포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그들과 행동을 함께했으리라 볼 수 있다.

위 <매일신보> 기사의 제목은 '도쿄·오사카에서 노동운동 계속'이고 부제목은 '상해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담, 강문석의 범행 내용'이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고자 제국주의의 반대편인 공산주의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공장 습격으로 체포됐다가 석방된 그가 상하이에 넘어간 것은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조봉암과 함께 국내로 송환된 것은 그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위 부제목은 '상해 가서 ○○운동에 가담, 강문석의 범행 내용'으로 수정해서 읽어야 한다.

강문석은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습격을 벌이고 이 때문에 체포됐다가 풀려나자 상하이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벌였다. 이런 이력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민족의 자주독립에 인생을 건 사람이었다. 국가보훈부는 그의 항일투쟁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항일 독립투사였다.

그런 강문석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이 제주 4·3의 주역인 김달삼(이승진)이다. 이 가명은 전직 항일투사가 쓰던 것이었다. 이승진은 항일투사인 장인어른을 생각하면서 이 가명을 썼다. 그리고 이 가명을 쓰고 4·3항쟁을 벌였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4·3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4·3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는 4·3이 소련과 김일성의 조종을 받은 꼭두각시들의 행동인지, 아니면 해방과 독립을 완성하기 위한 민족주의자들의 의거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단서 중 하나다.

조봉암과 함께 끌려왔다가 징역 5년 형을 받은 강문석은 일제 침략전쟁 와중인 1941년에도 예방구금 차원에서 청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45년에 해방을 맞은 그는 항일투사들이 주축이 된 조선공산당에 가담했다가 남로당 중앙위원이 되어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위해 싸웠다.

이 싸움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은 미군정과 친일세력에 밀렸다. 이는 그가 1948년에 38도선 이북으로 밀려나 북한에 가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고 조선노동당 상무위원이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그곳에서 김일성 진영과의 권력투쟁에 패해 1955년에 숙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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