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6 22:12최종 업데이트 22.11.16 22:12
  • 본문듣기

지난 14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5명 명단을 공개한 <민들레> ⓒ 민들레


'급발진'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본래 의미는 자동차 등의 이동 수단에 급격한 가속이 발생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 이다. 인터넷상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전개'를 빗대어 쓰는 신조어적인 의미도 가진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14일 신생 언론 <민들레>의 유가족 동의 없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가 이런 공감하기 어려운 '급발진'이었다. 가족을 잃은 큰 슬픔에 빠진 유가족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건은 대략 이렇게 진행된 것 같다. 이태원 참사 이튿날인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정부가 지정한 애도 기간이 종료되자 그다음 주인 7일부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일부 의원들로부터 위패와 영정이 없는 분향소와 희생자 명단이 없는 추모는 진지한 추모와 애도가 아니라는 식의 정부 비판이 나왔다.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야당으로 할 수 있는 비판이었고 유족들의 동의를 받는 등 적절한 절차를 거친 위패와 영정 설치, 그리고 희생자 명단 공개를 주장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다른 야당들도 유가족 동의 없는 희생자 명단 공개는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치권에서 논쟁이 오고 가는 중에 14일 신생 언론 <민들레>가 이태원 참사의 초기 사망자 155명의 명단을 입수해 공개했다. 유족들 동의 절차는 없었다. <민들레>는 세월호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서해훼리호 침몰, 대구 지하철 화재와 같이 구조에서 희생자 수습이 상당 시간이 소요된 과거의 참사들에서 희생자 실명이나 신원이 공개된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민들레>가 제시한 재난들은 구조와 수습이 장시간 진행되어 신원 파악과 유가족 연락이 난항을 겪는 등 이태원 참사와는 그 양상이 달랐거니와 재난 보도에서 피해자에 대한 인권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인식도 발전했다. <민들레>는 이런 부분들을 무시했다.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급작스럽고 잘못된 결정이었다.

허무하게 바래져 버린 진심

폭로하듯 일방적으로 공개된 희생자 명단에 대해 시민사회에서부터 비판이 나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희생자 유가족이 합치된 의사를 표명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동의 없는 명단 공개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유가족의 돌이킬 수 없는 권리 침해를 야기할 수 있다"며 명단공개 철회를 요구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도 이번 명단공개가 "재난보도준칙 제11조(공적 정보의 취급), 제18조(피해자 보호) 및 제19조(신상공개 주의)를 모두 위반한 심각한 보도윤리 불감증"이라고 비판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정부의 '애도 계엄령'과 맞서는 일도 중요하지만, 언론이 피해자를 호명해 일방적으로 공개한다고 진정한 추모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며 일방적인 희생자 명단 공개에 유감을 표했다.

다수의 언론이 유가족들을 접촉해 명단공개에 대한 반응을 취재했는데 대부분 당혹스러워하면서 불쾌함과 분노를 호소했다. 또한 외교부에 따르면 주한 외국 대사관 1곳에서는 자국 사망자의 명단 공개에 대해 항의했으며 참사 당시 외국인 사망자 26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하고는 유가족이 신원 공개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14일 더불어민주당은 희생자 6명의 유가족을 만나 진상규명, 책임자 엄중처벌, 재발방지책 마련 등 요구사항을 듣고 안호영 수석대변인을 통해 "진정한 추모가 되기 위해서 명단, 사진이 있는 상태에서 되는 게 바람직하나 동의 없는 명단 공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민들레>의 희생자 명단 공개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슬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에게 당혹스러움과 무력감만 안겨주고 어느 쪽에서도 공감과 동의를 받지 못하는 '급발진'한 돌발행동이 되는 모양새다. <민들레>에 명단을 비공개 해달라는 유가족 항의가 계속됐는지 결국 명단 공개 이틀째인 16일 26명의 이름을 명단에서 삭제된 상태다.

정부의 책임 회피를 질책하고 애도와 추모라는 공익적인 목적을 내세웠지만 유가족등 위로받아야 할 당사자들에게는 또 다른 폭력과 프라이버시 침해였을 수 있다. 이래서는 어떻게 정부의 책임을 묻고 정부 태도의 어떤 면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때때로 언론의 과오는 예상도 감당도 하지 못할 정도의 피해를 만든다. 언론이 가진 특유의 확산성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 파악과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증폭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때문에 보도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작은 피해, 작은 폭력 하나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유가족 항의에 일부 명단을 삭제했지만 삭제되지 않은 명단이 인터넷에 퍼져 떠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영웅주의와 무분별한 적대심,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사이 그 어디쯤에서 진심은 허무하게 바래져 버렸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