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8 11:16최종 업데이트 22.11.08 11:16
  • 본문듣기
 

우영우와 이준호가 불 꺼진 아파트 복도에서 키스하고 있습니다. 낭만적이긴 하지만 아파트 복도가 저렇게 어두우면 위험하진 않을까요? ⓒ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신 분들이라면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을 겁니다. 아파트 복도에서 우영우와 이준호가 첫 키스를 하는 장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어두운 복도에서 키스하는데 둘의 움직임에 따라 복도 천장의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 합니다. 그 장면이 참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이 드라마는 싱가포르에서도 넷플릭스에서 한동안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주변의 싱가포르 친구들도 다들 재미있게 봤는데 유독 그 장면만큼은 처음에 좀 이상했다는 반응입니다. 복도는 무서울 만큼 어둡고, 전등은 고장이 난 것처럼 자꾸 꺼졌다 켜졌다 하는 게 어색했다는 겁니다.

싱가포르의 모든 아파트는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복도와 계단에 불이 켜집니다. 아파트마다 주차 빌딩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불이 들어옵니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서 전 국민의 90% 이상이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거의 모든 가구의 복도와 계단에 불이 들어온다고 보면 됩니다. 싱가포르에서 이 드라마를 찍었다면 불이 깜빡이는 어두운 복도에서 키스하는 장면은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안전이 최우선인 나라
 

싱가포르의 모든 아파트는 밤이 되면 복도와 계단에 불이 환하게 밝혀집니다.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 이봉렬

 
이건 물론 안전 때문입니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복도 끝에 누가 숨어 있는지 몰라 불안해한 경험 다들 있을 겁니다. 싱가포르에선 최소한 내가 사는 아파트에선 불안하지 않습니다. 거리에도 육교에도 대부분 전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환경은 밤늦은 시간에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줍니다.

물론 밤에도 꺼지지 않는 불은 환경에 좋지 않고 전기료도 많이 듭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면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 섬나라 싱가포르라 환경보호에 진심이지만 그보다 국민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게 싱가포르의 원칙입니다.

이런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의 느낌으로는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인구 대비 CCTV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지하철 출입구 및 통로마다 설치된 CCTV를 보면 과해도 심하게 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CCTV는 관리의 사각지대를 없애줍니다. CCVT로 에스컬레이터에서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던 범인을 잡았다는 뉴스를 종종 보게 됩니다. 지하철이나 버스터미널에 무장한 경찰이 수시로 순찰을 도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됩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1) 지하철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경찰, 2) 범죄가 발생한 현장에 놓이는 표지판, 3) 테러 방지를 위한 대민 홍보 포스터, 4) 지하철역 입구에 있는 수많은 CCTV ⓒ 이봉렬

 
그렇다고 아예 범죄가 없는 건 아닙니다. 대신 싱가포르에서는 범죄가 발생하면 발생한 장소에 표지판을 하나 세웁니다.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했는지 알리고 주의를 환기하는 겁니다. 살인 사건 같은 중범죄부터 사기나 절도 같은 사건도 모두 게시됩니다. 자주 보지 않았으면 하는 표지판이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경찰이 범죄 발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뭔가 최선의 노력을 하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싱가포르 하면 다들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화장실을 사용하고 물을 내리지 않는 경범죄자를 사복경찰이 단속하는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물론 사복경찰 앞에서 경범죄를 저지르면 조치를 취하긴 하겠지만 앞서 언급한 경범죄 적발을 위해 사복경찰이 투입되는 건 아닙니다.

사복경찰은 범죄예방 활동 및 범죄자 체포를 위한 활동을 주로 합니다. 사복을 입은 여자 경찰이 공공장소에서의 성범죄 등 수사에 투입되어 큰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싱가포르와 아시아 주요국의 인구 10만 명당 살인범죄율 ⓒ Our world in data

 
이러한 싱가포르 경찰의 활약은 범죄율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90년 싱가포르의 인구 10만 명당 살인 범죄율은 2.1명로 한때 한 나라였던 말레이시아의 1.8명, 한국의 1.8명에 비해 크게 높았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2019년 기준으로 싱가포르는 0.4명으로 줄었습니다. 말레이시아 1.8명의 4분의 1수준이며, 1.4명인 한국에 비해서도 3분의 1이 채 안됩니다.

이 밖에도 싱가포르 정부는 SG시큐어(SGSecure)라는 민간인이 참여하는 테러 대응조직을 구성하여 테러 발생 시 일반 시민이 취해야 할 행동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역별로 돌아다니며 테러 발생 시 대처 요령, 심폐소생술(CPR) 등을 시민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배운 행동 요령은 예기치 못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언론도 국가 안전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때 싱가포르 대표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는 이 소식을 일 면 기사로 크게 보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웹사이트에는 사건 발생 전후 사정을 텍스트와 그래픽, 동영상까지 더해 인터랙티브 기사로 만들어 올려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번 참사의 경우처럼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위협을 느낄 때 취해야 할 행동 역시 정리해서 보도했습니다. 서울에서 발생한 참사를 타산지석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이태원 참사를 보도하는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인터렉티브 기사 중 일부. 참사 원인부터 대처 방안까지 자세하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 스트레이츠 타임즈 보도화면

 
이러한 노력은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3위, 아시아 1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은 세계 주요 60개 도시의 안전도를 "개인, 건강, 인프라, 디지털, 환경" 등 다섯 가지 주제로 보안 점수를 매겨 순위를 발표합니다. 2021년 보고서에는 덴마크 코펜하겐이 1위, 캐나다 토론토가 2위를 차지했고, 그 뒤로 싱가포르가 3위를 차지했습니다. 한국의 서울은 25위였습니다.

서울보다 앞선 아시아 도시는 싱가포르를 포함해서 도쿄, 홍콩, 오사카, 타이페이 등 다섯 개나 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그리고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고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뽑은 세계 주요 60개 도시의 안전도 순위. 2021년 기준 싱가포르는 3위, 서울은 25위입니다. ⓒ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

 
윤 대통령의 상반된 지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22일 원전산업 협력업체 간담회에서 함께 참여한 정부 관계자들에게 "지금 여기 원전업계는 전시다. '탈원전'이란 폭탄이 터져 폐허가 된 전쟁터다. 비상한 각오로 일감과 선발주를 과감하게 해달라. 그러지 않으면 원전 업계 못살린다. 전시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란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관련기사: "원전, 안전중시 사고 버려라" 윤석열식 '관료 길들이기' http://omn.kr/1ziwz).

해당 발언 이후 넉 달 만에 이태원 참사가 발생해서 156명의 무고한 시민이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 네 달 사이에도 강남지역 침수, 아울렛 지하주차장 화재, 아연 광산 매몰사고, 항공기 불시착, SPC 노동자 사망 사고를 비롯한 각종 산업안전 사고로 인한 사상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안전에 대한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지 않다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이후에야 지난 1일 국무회의에서 "관성적인 대응이나 형식적인 점검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책임감을 갖고 꼼꼼하게 점검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관련기사: 윤 대통령 "행사 주최자 따질 것 아냐... 철저 대책 마련" http://omn.kr/21fea).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상반된 지시를 내릴 땐 그전에 했던 지시에 대해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은 후에 새로운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이건 리더가 갖춰야 할 기본 중 기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대통령의 말대로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를 버린 공무원들이 안전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7일에는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책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정히 그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번 참사에 대한 최종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책임져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책임만 묻겠다 하니 실소만 나올 뿐입니다.

대통령의 국민 안전에 대한 철학이 이러하니 행정안전부 장관이 참사 후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라는 망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고, 주무 장관의 수준이 그 지경이니 그 밑의 경찰들이 참사가 발생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시민이 죽어 가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도 죽어 가는 시민을 살리지 못한 것 아닐까요? 같은 당 소속 용산구청장은 참사 후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했다"는 후안무치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이태원 압사 참사 관련 유실물센터가 마련되어 옷, 신발, 가방 등 유실물들이 놓여 있습니다. ⓒ 공동취재사진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헌법 제34조 제6항)

싱가포르에 살면서 이 헌법 조항을 떠올릴 일은 없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건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이 헌법 조항을 정부더러 지키라고 요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게 국민들의 요구입니다.

하지만 참사의 책임자들이 아직도 자리를 유지하며 연일 망언을 쏟아 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총리는 외신 간담회에서 농담하며 웃음 짓는 걸 보면 이 정부는 이 헌법 조항을 지킬 의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국민을 보호하는 그런 정부를 갖게 되기까지 각자도생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근조, 대한민국.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7,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 압사 참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