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7 04:56최종 업데이트 22.10.17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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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그러니까 어떤 가치를 창조하려고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이란 건 참 극단적인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노예들이 해야 했던 것도 일이고, 중세 세금과 지대라는 명목 아래 뼈 빠지도록 몸을 굴려야 했던 것도 일이다. 무엇을 위해서든 책상 앞에 앉아서 수천, 아니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전쟁 명령을 내리는 것도 일이고, 그런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나선 병사들이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는 것도 일이다.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대부분이 본인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중한 시간과 노력의 대부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 역시 일이다. 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지고 기분이 상한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동물적 본능에 더해 인간만의 독특한 계급 문화가 착취와 노동을 섞어 버린 느낌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느낌의 일도 있다. 취미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주말농장에서 땅을 파고 물을 긷는 것도 분명 일이고, 여가나 취미로 자기만의 집을 지으려고 톱질하고 망치질을 하는 것 역시 일이다.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소중한 자기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는 것도 일이고, 각종 재난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자원봉사자들의 희생 역시 일이다.

분명 일을 하는 것인데 느낌이 좋다. 다른 동물들이 들을 수 있다면 좀 재수 없게 여기겠지만, 우리 인간만의 고귀함도 느껴지고 뭔가 뿌듯한 기쁨과 즐거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보람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아,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한마디 보태자면 계급과 착취는 나쁜 것이고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생계를 위한 일까지 그렇다고 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충분히 얻기가 그리 만만치가 않다는 걸 조금 강조했을 뿐이다.

내가 시력을 잃고 희망까지 조금씩 잃어버리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일이 가진 여러 모습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소하지만 보람있던 일, 그건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 김승재

 

그래, 이걸 아예 내 일로 삼자

방에 처박혀 혼자만의 착각과 오해 속에 궁상을 떨던 그날, 난 참으로 많은 걸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난 변한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자꾸 과거에 집착하려 했다. 툭하면 남들과 비교하기에 급급했고,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자꾸 꼰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한 일과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직업이 가진 일도 있지만, 분명 보람을 가져다주는 일도 있는데 난 오로지 앞의 것만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력을 잃음과 동시에 그런 일을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할 수 없게 된 내겐 희망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날 좁은 안방을 수십, 수백 번 오가고 또 오가면서 나는 돈을 벌고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일보다는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 된다고 몇 번이고 내게 말했지만 미련한 난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내세울 기술도 없고, 내세울 경험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사실이었지만 그에 더해 난 아니라면서도 수입을 계산했고, 상관없다면서도 남의 눈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날도 저물고, 저녁 식사 때도 지났지만 내 머릿속은 더욱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럼 지금 하는 일이라도 제대로 해보자.'

당시 난 10년 넘게 사실상의 1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력을 잃으면서 폐업을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내 눈을 대신해 줄 사람을 고용해 계속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내가 하는 일도 아니고 제대로 진행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전공이 사학이었고 역사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내게 도서 대여점을 운영하던 친구가 도움을 청한 게 인연이 되어 상당히 오래전부터 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력을 잃어가면서 조금씩 아이들과의 만남을 줄여가는 중이었다.

'그래, 이거다. 이걸 아예 내 일로 삼는 거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오던 일이고, 나름대로 보람도 있어서 내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난 곧장 거실로 나가 아내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나 아이들 역사 가르치는 걸 본격적으로 해 볼까 해서..."

너무도 즉흥적이긴 했지만 나는 나름의 계획을 아내에게 설명했고, 아내는 쾌히 동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사무실은 업무 공간이라기보다는 아이들과 웃고 떠들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폐업을 하게 되면 정식으로 역사 학원을 열어볼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초등학생 딸과 아들의 눈을 빌려 교재도 만들고 당시 아이들이 좋아했던 유희왕 카드를 모방해 역사 카드도 만들었다.

아이들은 전부터 함께하던 몇 명의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었지만, 내가 느끼는 기분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들도 내 기분을 느꼈는지 대답도 훨씬 잘하는 것 같았고, 엄청나게 똑똑해진 것 같았다.

남들은 퇴근하고 술 한잔을 하거나 가족과 식사할 시간에 아이들을 만났지만, 그래도 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고 내 맘속에서는 죽어가던 희망이 다시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어떻게 책도 안 보고 그렇게 다 아세요? 진짜 머리가 좋은가 봐요."

새로 온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가 정말 놀랍다는 말투로 물었다.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진짜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볼 수 없으니까 미리미리 좀 더 철저히 준비할 뿐이다. 그렇지만 내 입에선 절대 그런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러니까 너희한테 이렇게 역사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거지.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 다 대답해 주마. 하하하."

그렇게 다시 나의 일을 시작한 지 얼마쯤 지났을 무렵, 따스한 봄바람이 날 부추겼다.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감히 아이들을 데리고 역사 답사를 떠났던 것이다. 이때 떠난 답사에 관해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겠다. 

교육청 담당자의 조언

다음 해 내가 운영하던 회사는 결국 폐업했다. 날 믿고 회사를 맡겨주셨던 분들께는 미안했지만 시력을 잃은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래도 난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겐 나름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폐업 절차를 완전히 마무리한 후 나는 곧장 역사 학원 개원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게 맘 같지 않았다. 학원을 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원 위치도 아무 데나 되는 게 아니었고, 건물과 시설도 법이 정한 일정 규모 이상이어야 했다. 자신만만 상담을 요청했던 내가 조금씩 조금씩 풀이 죽어가자 교육청 담당자가 넌지시 조언을 했다.

"그러지 마시고요. 제가 보기엔 선생님은 그냥 교습소를 차리시면 될 거 같네요."

다른 강사 없이 운영자가 직접 강의하는 곳을 학원이 아닌 '교습소'라 불렀는데, 다행히도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꺾였던 기가 살아난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작성했고 다시 한번 으라차차 기합을 내질렀다.

'히스토리아 역사 교실(교습소)'
  

또 하나의 역사가 된 이름과 교재이지만 내겐 희망이고 보람이었다. ⓒ 김승재

 

왠지 일제 강점기 때 냄새가 풀풀 나는 '교습소'란 명칭을 반드시 넣어야 했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정해서 교육청에 등록하고, 비록 30년 가까이 된 낡은 아파트 상가 건물이었지만 작은 교실 겸 사무실도 임대했다.

그런데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생각과 달리 임대료는 물론 내부 시설과 간판 등 각종 설비를 갖추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당시 나는 지인의 도움으로 장애인으로서 취직은 했지만 수입은 형편없이 줄어 있었다. 아무리 보람을 찾아 시작한 일이지만 거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만 같았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 잘해 봐요. 혹시 알아, 자기 인기 강사 될지."

또다시 망설이는 내 등을 아내가 토닥여 줬고,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응원이 뒤따랐다. 심적·물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인분들도 계셨고,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후배라고 하기에는 25년이 넘는 세월이 좀 부담되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런 대학 후배의 도움으로 나름의 교재도 만들었다.

다행히 입소문으로 수강생이 늘어났고 큰 수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손익분기점까지 넘을 수 있었다. 코로나라는 이상한 놈이 난리를 피우기 전까지 얘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은 우리가 살 수 있는 밑천이요, 원동력이다. 그래서 때론 힘들고 고달프기도 하지만 보람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게 만들어도 준다. 아무리 휴식이 좋고, 노는 게 좋다지만 일이 없다면 쉬는 건 쉬는 게 아니고, 노는 건 재미가 사라질 것이다.

혹시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분명 보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돈도 좋고, 권력도 좋고, 재미도 좋고 휴식도 좋지만, 진짜 중요한 건 보람이다. 그래야 살아갈 밑천이 떨어지지 않고 원동력이 생긴다.

아,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내 가슴을 흥분시키는 그때의 답사 여행,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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