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9 11:32최종 업데이트 22.10.0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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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 사고 ⓒ 셔터스톡


지난 2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초안)'은 지침 명칭에 공급망이란 말이 들어있지 않은데도 흔히 '공급망실사법'으로 불린다.

인권 환경 등 기업의 지속가능성 요소를 실사하는 지침(이후 EU 내 각국이 지침 원칙 아래 법제화)이지만 EU 내 특정한 기업뿐 아니라 그 기업에 연결된 납품·협력업체가 인권과 환경 등을 침해했는지를 조사하여 문제가 발견되면 시정케 하고 그 내용을 공시하게 하는 전 공급망에 걸친 제도이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법안 도입 계획이 발표된 후 역내 기업 등의 반발과 EU 규제검토위원회(RSB)의 부적합 평가 등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번에 초안이 마련돼 EU 의회와 이사회를 통과하면 2024년 발효된다.[1]

다국적 기업의 분업화, 외주화 체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개별국가의 법으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공급망의 최상층에 있는 기업이 환경, 인권, 산업 안전보건 침해에 대한 책임을 하위 협력업체에 돌리고 면피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유럽, 미국의 의류 브랜드들이 현지 업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방치하여 1129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2013년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 사고가 대표적이다.[2]

기존 실사 지침 한계 보완하기 위한 조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가능경영을 확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급망 전체를 포괄하는 실사가 제시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8년 발표한 '기업 책임경영을 위한 OECD 실사 지침'과[3] 국제노동기구(ILO)의 '다국적 기업과 사회정책에 관한 삼자선언', 유엔의 기업과 인권 이행 지침(UNGPs)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ILO는 인권 부분을 주로 강조하고 유엔과 OECD는 기업의 인권, 환경, 윤리적 책임을 함께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4] '기업 책임경영을 위한 OECD 기업실사 지침'은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의 하위 이행지침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기존 국제 원칙과 실사 지침은 법적 구속력 없는 권고 사항으로, 기업의 자발적 참여에 크게 의존한다.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이 위반에 관한 분쟁해결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다른 국제 규약과 차별되지만, 이것 역시 각 수락국에 설치된 국내연락사무소를 통하여 기업의 '위반'에 대해 이의신청을 하거나 위반 사항을 OECD 홈페이지에 게재하여 기업의 평판에 영향을 주는 정도에 그친다.[5]

프랑스, 독일 등 일부 EU 회원국은 공급망 실사를 국내법으로 제도화하였으나, 회원국 간 기준이 상이하여 법적 불안전성이 발생하고 행정 비용이 증가하며, 규제 대상 기업의 대외 경쟁력이 약화한다는 것 등이 문제점으로 거론됐다.[6]

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로, 기업이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 또는 환경 훼손 사례를 조사하고 문제에 대해서 시정,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노동자와 자회사의 행동강령, 실사 접근방식, 이행 프로세스 등의 실사 내용을 기업 정책에 반영하고 매년 업데이트 해야 한다. 이해관계자 대상 고충처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제도화해야 하며, 부정적 영향의 식별, 예방, 최소화 등의 조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최소 연 단위로 모니터링해야 한다. 공시는 매년 4월 30일까지 자사 홈페이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7]
 

공급망 실사 지침 적용 대상


지침의 적용 대상은 고용인원과 매출 기준을 충족하는 역내·외 대기업과 고위험 산업의 중견기업이다. 고위험 산업은 섬유, 광물, 농업·임업·수산업 등이다. EU 역내에서는 노동자 500인을 초과하고 전 세계 연간 순매출이 1억 5000만 유로를 초과하는 대기업과, 노동자가 251~500인이고 전 세계 연간 순매출이 4000만 유로 이상의 고위험(순매출액의 50% 이상이 고위험 산업군에서 발생) 중견기업이 대상이다.

역외 기업에 대해서는 노동자수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매출만 적용하며, 이때 매출은 전 세계 순매출이 아닌 EU 내 연간 순매출을 뜻한다. 이에 따라 EU 내에서는 전체 기업의 약 1%에 해당하는 약 1만 3000개 사, 역외에서는 약 4000개 사가 지침 적용 대상이 된다. 논의 과정에 포함된 중소기업은 최종적으로는 제외되어 범위가 축소되었다.[8]

집행위의 지침은 기존 결의안에서 기후변화를 제외했고, 공급망 전 과정에서 인권과 환경의 잠재적 위험 요소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예방, 완화, 제거, 최소화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기후변화는 실사 대상에서 제외된 대신 대기업에 전략 수립 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수정됐다.[9] 업계는 데이터 처리와 증거 수집의 어려움을 내세워 기후변화대응 실사의무 부과가 과도하다고 반발했다.[10]

적용 대상과 내용 측면의 완화를 두고 기업들의 눈치를 살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알베르토 알레만노 프랑스 고등상업학교 유럽연합법 교수는 이것이 업계의 강력한 로비에 따른 결과라고 비판했으며, 미국 공인재무분석사회와 세계자연기금(WWF) 등은 중소기업 제외에 유감을 표하고 보다 강화한 법안의 필요성을 언급했다.[11]

위반 시 제재, 민사상 손해배상 핵심
 

벨기에 브뤼셀의 EU 본부 앞 EU 깃발 ⓒ 셔터스톡


기업이 실사 의무를 위반할 때의 금전적·행정적 제재는 회원국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과징금은 기업 매출액에 비례하는 규모로 부과하며, EU 집행위는 각 회원국의 감독기구로 구성된 감독기구연합회를 설립하여, 감독기구 간의 협력 및 조사, 제재 등에 관한 협의를 강화하고 지원할 예정이다.

제재에 있어 민사상 책임제도는 주요 쟁점 중 하나다. EU 집행위는 회원국이 실사의무를 위반한 기업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추궁할 수 있게 하여 집행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이전에 피해를 발생시키고도 회피할 수 있었던 기업에 대해 앞으로는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기업의 자체 활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정적 영향이 협력사로 인한 것일 때도 그 기업에 민사소송을 낼 수 있다.[12]

단 기업이 공급망의 업체들과 계약을 체결해 EU 기업의 행동강령을 이행하고 있음을 증명하면 민사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유럽기업정의연합(ECCJ) 등의 시민단체는 이 조항에 대해 공급사에 대한 책임 전가와 실사 의무 수준의 약화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이전 의회 결의안에는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기업이 모든 적정주의의무를 다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입증책임이 담겼으나, 지침에는 빠졌다.[13]

EU의 공급망 실사 지침의 공식화와 일부 역내 회원국의 공급망 실사법안 채택에 따라 글로벌 기업들의 선제적 대응이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 의류업체 H&M은 모든 의류 공급자의 정보를 제공하고, 공급사의 등급별 기준을 마련하여 거래 기간 등에 따라 플래티넘, 골드, 실버, 기타 등으로 분류한다. 업계 최초로 이루어지는 등급화 조치다. 소비자는 웹사이트를 통해서 생산지, 공급자, 생산공장 이름, 주소, 노동자 수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막스앤스펜서는 전 세계에 얽힌 복잡한 공급망 매핑 데이터를 온라인으로 제공한다. 상품 형태, 주소, 노동자의 남녀 성비, 조합 유무 등의 정보를 공급사가 직접 제공하면 막스앤스펜서가 검증한다. 공급망이 널리 퍼져 있는 때 참고할 수 있는 사례로 언급된다. 

독일 소재의 화학기업 바스프는 자사와 공급사의 경제, 환경, 사회적 영향을 금전적 가치로 평가하는 '사회를 위한 가치 실현(Value-to-Society)' 모델을 2013년 개발하여 매년 평가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기업 활동의 영향을 실용적이면서도 투명하게 검증 및 계량 가능한 수치로 환산하여 기업의 지속가능성 정책을 보여주는 도구로, 기업의 이익, 세금, 임금, 인적자본, 대기오염, 온실가스, 수질오염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영향평가를 실시할 수 있다.[14]

국내 수출기업 대응 미비
  

ESG 실사 대비 필요성 ⓒ 대한상의


이대로 법이 발표된다면 지침 발효일을 기준으로 대기업은 2년, 중견기업은 4년 후부터 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15]. 법의 직접적 적용 대상인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물론, 중간재를 납품하는 협력사 등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대비 수준은 미흡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6월 국내 수출기업 300개 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수출기업의 공급망 ESG 실사 대응현황과 과제' 조사에 따르면 52.2%의 기업이 ESG 경영 미흡으로 고객사(원청기업)로부터 계약·수주가 파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느꼈다. 'ESG 실사 대비 수준' 항목에는 '낮다'는 응답이 77.2%(매우 낮음 41.3%, 다소 낮음 35.9%)로 나타났다.

실사 단계별 대응 수준에 대해서는 '대응체계 없음'이 58.1%였다. 이어 '공급망 ESG 실사 관련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내부 전문 인력 부족'이란 응답이 48.1%로 가장 많았고, '진단 및 컨설팅·교육 비용부담'이 22.3%, '공급망 ESG실사 정보 부족'이 12.3%로 뒤를 이었다.

대기업과 중견·중소 기업 간의 ESG 경영 격차가 크다는 사실도 문제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영준 지속가능경영원장은 "대기업은 비교적 ESG경영을 잘 수행하며 협력업체들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편이지만 공급망 중간에 위치한 중소·중견기업은 여전히 ESG 준비가 미비한 상태"라며 "고객사의 ESG 요구에 대응하면서 하위 협력업체까지 관리해야 하는 이중고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인력 부족과 비용부담 등이 공급망 ESG 실사 대응에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16]

EU 차원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기업에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직접 규제 대상은 아니지만, 간접적 영향권 아래에 있으므로 각 회원국이 중소기업 전용 플랫폼·웹사이트를 구축하게 하고 재정 및 대응 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한편 집행위원회는 실무 가이드라인 마련을 준비 중이다. [17]

국내에서도 이에 맞춰 다양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관계부처와 각 분야 전문가,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반영하여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면서도 우리나라 기업이 활용 가능한 'K-ESG' 가이드라인을 도입했다. 글로벌 동향을 반영한 K-ESG 가이드라인 개정판을 1~2년 주기로 발간하고 업종·기업규모별 가이드라인도 2022년부터 마련할 계획이다.[18]

산업통상자원부는 무역보험공사·한국무역협회·코트라(KOTRA) 등과 함께 '수출 중소·중견기업 ESG 지원협의회'를 발족해 중견·중소 기업의 ESG 경영 내재화를 돕는다.[19]

'우루과이 라운드'처럼 'ESG 라운드'가 도래할 것이란 예상이 점점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ESG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국가경쟁력을 가늠하는 핵심 잣대가 되었다. 윤리적 요청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의제로 바뀌는 중이다. 만일 준비가 부족하다면 서둘러야 할 시점인 건 분명해 보인다.

글: 안치용 ESG코리아 철학대표, 지예림·장가연·이주현 바람저널리스트, 이윤진 ESG연구소 연구위원
덧붙이는 글 [1]브뤼셀 무역관 김도연,(2022.03.28), ”EU 집행위, 기업 공급망 실사법안 초안 공개”, kotra 해외시장뉴스
https://dream.kotra.or.kr/kotranews/cms/news/actionKotraBoardDetail.do?SITE_NO=3&MENU_ID=90&CONTENTS_NO=1&bbsGbn=244&bbsSn=244&pNttSn=193460

[2] Christophe Clerc.(2021).EU의 공급망 실사법 입법 동향.국제노동브리프,9.

[3] https://www.motie.go.kr/motie/py/sa/oe/guideline/oecdguide.jsp

[4] 대신경제연구소, (2021.12.24) 「EU 공급망 실사법 제정과 기업대응(사례)」,3

[5] 조인호, 편정호.(2021).ESG 관리를 위한 공급망 계약과 사례 연구 : ABA 모델 계약 조항과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중심으로.무역상무연구,92, 204

[6] Keip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강애림, (2021) EU 의회 기업실사지침안의 주요 내용과 시사점, 2,5

[7] 산업통상자원부 (2022.03.09) 글로벌 공급망 인사이트 제2호 컨텐츠, 12

[8] 브뤼셀 무역관 김도연,(2022.03.28), ”EU 집행위, 기업 공급망 실사법안 초안 공개”, kotra 해외시장뉴스

[9] 브뤼셀 무역관 김도연,(2022.03.28), ”EU 집행위, 기업 공급망 실사법안 초안 공개”, kotra 해외시장뉴스

[10] (2022.02.11) “EU 공급망실사 의무에 '기후대응' 포함 여부 논란”,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 /KBA Europe 제공.
https://kba-europe.com/board/kba-daily-hot-line/?mod=document&uid=11228

[11] Monika Pronczuk (2022.2.23) “Companies in the E.U. could be held liable for violations along their supply chain.”, The NewYorkTimes
[12]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 강노경 (2022) EU 공급망실사지침(안) 주요내용과 기업사례, 5

[13] 브뤼셀 무역관 김도연,(2022.03.28), ”EU 집행위, 기업 공급망 실사법안 초안 공개”, kotra 해외시장뉴스

[14]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 강노경 (2022) EU 공급망실사지침(안) 주요내용과 기업사례, 11-14

[15] 박상영 (2022.07.17) “공급망에 불어닥친 ‘ESG 태풍’ 수출기업은 속수무책” 경향신문

[16] 대한상의보도자료(2022.07.18) 수출기업 ‘공급망 ESG실사’ 대응 현황과 과제 조사

[17] 브뤼셀 무역관 김도연,(2022.03.28), ”EU 집행위, 기업 공급망 실사법안 초안 공개”, kotra 해외시장뉴스

[18] http://www.motie.go.kr/motie/ne/presse/press2/bbs/bbsView.do?bbs_cd_n=81&cate_n=1&bbs_seq_n=164932)

[19] 산업통상자원부(2021) K-ESG 가이드라인 ( http://www.motie.go.kr/motie/gov3.0/gov_openinfo/saj유엔/bbs/bbsView.do?bbs_seq_n=631&bbs_cd_n=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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