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7 10:15최종 업데이트 22.09.0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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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2세 센터에서 리즈 트러스 차기 총리 내정자가 당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 그는 "세금을 낮추고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담대한 구상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영국의 새로운 총리로 리즈 트러스 외무부 장관이 결정되었다. 지난 7월 보리스 존슨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힌 터라 보수당 당 대표로 선출되면 총선 없이 총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5일 영국 보수당은 트러스 장관이 57.4%를 얻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고 발표했다.

7~8월 당 대표 선거 중 트러스 총리 내정자는 신자유주의 경제를 재차 강조했다. 그의 공약은 ▲ 2023년 법인세를 19%에서 25%로 인상하기로 한 결정 취소 ▲ 긴급 예산 확보하기 위해 사회 복지 축소 ▲ 기후 정책을 위해 에너지 고지서에 첨가된 '그린 부담금' 보류 ▲ 2.5% 수준의 국방비를 2030년 3%까지 올리기 ▲ 투자 유치를 위한 '저세금, 저규제' 지역 설정 등이다.


이런 정책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 에너지 위기와 인플레이션을 해결할 수 있을까? 현실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반강제적인 사회 개혁을 끌어냈다. 사회적 동원을 해야 하고 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기득권 위주의 정책이 불가능하기 때문으로 계급, 여성, 인종 등 사회적 관계의 재조정이 진행된다.

실제로 7~8월에 앞다퉈 감세를 외치던 보수당 대표 후보들과 달리, 영국 사회는 사회 개혁을 향해 힘을 키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노동조합, 시민단체, 노동당이 선두에서 부의 재분배, 정부의 시장 개입, 그리고 기후 정의를 외치고 있다.  
  
'더는 안 된다'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이 지난 8월 3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노동조합총회 본부에서 열린 철도해운노조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8월 31일 미국 민주당 진보 진영의 대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런던에 나타났다. 영국 철도해운노조(RMT)의 초대였다. 샌더스 의원은 15일과 17일로 예정된 철도해운노조 파업을 지지하며 영-미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호소했다. 양국이 공통적으로 겪는 경제 불평등을 이유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은 최고 부자 3명이 하위 50%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 1억 6천만 명의 재산보다 더 많은 것이다. 영국은 최상위 100명이 하위 1800만 명보다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 이는 27%에 해당한다."

샌더스 의원의 표현에 의하면 "탐욕이라는 끔찍한 중독" 상태다. 그는 1992년부터 2022년까지 기술력의 폭발로 경제 생산력이 어마어마하게 향상했지만 기득권의 탐욕으로 부의 분배가 잘못된 길로 갔고 현재는 '도덕적 관점에서도' 그리고 '경제적 관점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고 못 박았다.  

연설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의를 상상할 것을 요구했다. 소득과 관계없이 받는 대학 교육과 의료 혜택, 그리고 집을 갖는 것이 급진적인 생각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이런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소수가 아닌 모두를 위한 경제와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영국 방문 중 샌더스 의원은 '더는 안 된다'(enough is enough)라는 캠페인을 지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발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로 촉발된 생활비 위기에 맞서기 위해 노조와 사회단체, 그리고 몇몇 노동당 하원 의원이 주도한 대중 운동이다. 8월 초에 결성되어 한 달 만에 50만 명이 가입했고 70여 개의 지부가 영국 전역에 세워졌다. 캠페인 관계자도 놀랄 만큼 빠른 확산 속에 9월 한 달간 영국 전역에서 50여 번의 대중 집회를 예고했다.

이 캠페인은 '분노를 행동으로 전환해야 할 때'라며 다섯 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 실질적 임금 인상 ▲ 에너지비 인상에 한계를 둘 것 ▲ 배고픔 끝내기 ▲ 모두에게 주택을 ▲ 부자세 부과다.

생활비 위기에 초점이 맞춰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제 정의와 기후 정의가 겹쳐 있다. 장기적으로 에너지 회사를 국유화해야 하고 재생 에너지 분야 투자로 석유 회사의 권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택 개혁에서는 월세 상한제 실시 및 임대 주택 수를 늘릴 것을 요구한다. 2차대전 이후 노동당 내각 주도로 임대 주택을 전체 주택의 26%까지 끌어올렸지만, 대처 총리가 1980년대 100만 채 이상을 매각했다.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일환으로 기존 주택의 단열재 보강, 탄소 배출 감소를 제시했다.  

이 캠페인을 주도하는 노동당 자라 술타나 하원의원은 목표가 "급진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현재 영국의 억만장자 수는 역대 최고이고 회사들의 이익도 역대 최고지만 대중들의 삶만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당신의 필요냐 그들의 탐욕이냐, 이것은 정치적 선택이다"라고 주장했다. 
  
조기 총선 원하는 영국 노동당
 

지난 8월 30일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영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7~8월, 노동당은 지방단체 중심으로 개혁안을 하나씩 착수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7월 1일부터 시작한 웨일스의 기본소득 시범 계획이다. 총 3년 계획으로 2000만 파운드(약 300억 원)를 예산으로 책정했다. 18세가 되어 보육원을 떠나는 이들 가운데 500명을 선정하고 웨일스 정부가 매달 1600파운드(약 240만 원)를 2년간 제공하는 형태다. 

오랫동안 계획된 바였다. 2021년 5월 지방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마크 드레이크포드 웨일스 자치정부 행정수반은 '새롭고 용감한 아이디어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스코틀랜드가 기본소득을 시범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2017년 당시 웨일스 재무장관이었던 그는 기본소득을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과도한 사회주의적 실험'이라는 반대가 있었으나 경제 불평등을 악화시킨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최종 결심을 굳혔다.  

웨일스 정부는 실험의 급진성을 인정하며 이 시도에는 '신뢰, 자율성, 존중'이 중심에 있다고 밝혔다. '젊은 층이 인생에서 최고의 기회와 가능성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드레이크 장관은 '(청년의) 독립성을 창조하는 데 초점을 둔'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미래 세대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맨체스터 광역시도 의미 있는 개혁을 시작한다. 2017년 노동당 앤디 버넘 시장은 교통 부문을 재공영화시켜 기후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개혁안을 세웠다. 회사들과의 법정 싸움으로 지연되었으나 7월 25일 법원이 회사 측 항소를 기각하면서 정책 추진이 가능해졌다. 버스 운행 노선 및 버스비 등을 결정할 권한을 얻은 버넘 시장은 통일된 교통 체계를 만들고 5년 내 맨체스터 버스의 50%를 전기 버스로, 2032년까지 100% 교체, 공공교통의 탄소 중립을 앞당겨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버넘 시장은 지난 8월 30일 '더는 안 된다' 캠페인의 맨체스터 집회에 참가하고 공식 지지를 선언했다. 맨체스터 성당에서 가진 연설에서 그는 지난여름 어디를 가나 생활비에 대한 압박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가스, 물, 전기, 대중교통 같은 필수 영역이 민영화된 상황에서 정부가 가격을 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회사들에 보조금을 더 주는 방법밖에 없다며 필수 영역은 다시 국영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안 추진과 시민운동에도 참여하는 버넘 시장은 노동당 키어 스타머 대표의 소극성을 비판했다. 6월 철도 파업 당시 하원 의원의 파업 참가를 막았던 결정에 대해 비판이 계속되자 스타머 대표는 지난 1일 '역할의 차이'라고 답했다. 지난 5월 횡재세를 관철시켰듯이 자신의 역할은 에너지 고지서 동결 등 하원 내 정책 대결에 있고 노동당 정부가 궁극적 목표라며 조기 총선 뜻을 내비쳤다.

사흘 후인 4일 노동당 그림자 내각의 닉 토머스 시먼즈 내무장관은 조기 총선 지지를 공식화했다. "트러스가 총리직을 쓰레기로 만든 보리스 존슨의 업그레이드판인지 아닌지는 시간문제일 뿐"이고 여름 동안 보수당 대표 선거는 "현실과는 평행선을 달리는 후보들과 좀비 정부를 보여주었다"고 비판했다.   

총선은 트러스 총리가 정치적 동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하다. 2024년 말까지 임기가 보장되어 있지만 보수당 대표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약 15만 명 중 그가 획득한 것은 약 8만 표에 불과하다. 심지어 보수당 하원 의원 내에서는 리시 수낙에 밀렸다. 총선이 절실하지만 상황은 불리하다. 영국 조사기관 유고브(YouGov) 8월 조사에 따르면 현재 보수당 지지는 28%로 42%인 노동당에 15%포인트 뒤지고 있다.

조기 총선과 별도로 영국의 하반기 의제는 분명하다. 생활비 위기다. 2000년대 이후 차곡차곡 쌓인 경제 불평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문제다. 또한 이는 기후 변화 문제 해결을 위해 넘어야 하는 고비이기도 하다. 더 크게 보면 신자유주의 유지냐 케인즈주의 부활이냐 하는 시대 전환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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