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7 19:56최종 업데이트 22.07.1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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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열린 부산겨레하나 주최 부산수요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강제징용 민관협의회 철회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김보성


윤석열 정부가 기존 방식의 한일관계를 복원하고자 만들어낸 것이 강제징용 민관협의회다. 그런데 이 기구가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지난 4일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 주재로 발족한 이 민관협의회는 전범기업이 아닌 한일 국민과 기업들의 성금을 모아 피해자 측에 위자료 1억씩을 대신 지급하는 '대위변제'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


강제징용 범죄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전범기업들이 아닌 법률상 제3자들의 돈을 모아 배상금 아닌 위자료를 지급하는 이 방식은 피해자 측의 분노를 초래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시절에 체결된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와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과거를 확실히 털어내는 새로운 방식의 한일관계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민관협의회 출범 당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이 만나 논의를 하는 것이 순리"라며 대위변제 방식을 거부했다. 열흘이 지난 14일에는 징용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와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민관협의회 불참을 선언했다.

그런 방식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은, 윤석열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박철희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스기야마 신스케 전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 등이 참여한 13일의 아시아 리더십 콘퍼런스에도 반영됐다. 이 자리에서는 '강제징용·위안부 문제를 한 번에 풀려 하지 말고 8월 안에 양국 정상이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취지의 조언들이 나왔다고 보도됐다. 윤석열 정부의 방식이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언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같은 전범기업이 아니라 포스코(포항제철) 같은 한국 기업이 금전적 부담을 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5월 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포스코처럼 일본 자금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징용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엉뚱한 해법을 내놓았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으니 대위변제라는 발상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기업이 전범기업을 대신해 징용 피해를 배상할 이유는 없다. 포스코 같은 기업들이 1965년 청구권 자금(경제협력 자금)을 사용했고 대일 종속적 경제체제를 형성하는 데 가담했다 해도, 이 기업들이 전범기업을 대신해야 한다는 발상은 상식과 이치를 한참 벗어난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책임져야 할 게 있다면 그것은 미쓰비시 등과 다른 원인에 기인하는 책임일 것이다.

그러나 '전범기업을 대신해서'는 아니지만 '전범기업과 함께' 징용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한국 기업들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식민 지배에 편승해 이윤을 축적했을 뿐 아니라 징용을 부추긴 한국 기업들이 있었다. 그런 기업들의 재산을 찾아내 전범기업과 함께 책임을 물리는 것은 상식과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친일파의 거두 한상룡

일제강점기 막판에 조선인 갑부로 꼽혔던 친일 기업인이 있다. 2005년 언론인 리영희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집 <대화>에서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에 세 사람의 거부가 있었어요"라며 "친일파의 거두였던 한상룡과 박흥식 그리고 최창학이야"라고 말할 때 거명된 한상룡(1880~1947)이 바로 그다.

이 한상룡의 행적을 살펴보면, '전범기업과 함께' 식민지 한국인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한국 기업과 기업인이 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한상룡은 고종 임금이 '조선이 러시아를 방어하고 독립을 지키려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방러+친중·결일·연미)'는 메시지를 담은 '조선책략'을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지 닷새 뒤인 1880년 10월 16일 출생했다.

이완용의 조카인 그는 출생 5일 전에 채택된 '결일' 정책을 일제강점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충실히 실천했다. 한국 청년들을 징병하는 일제 정책을 선전하는 일은 물론이고 한국 노동자들을 징용하는 정책의 홍보에도 앞장섰다.

한상룡을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중추원 참의, 기업인'으로 소개하는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1943년) 9월, 민간 차원에서 근로정신을 계몽해 태평양전쟁에 협력한다는 목적으로 징병·징용 등을 위한 근로동원에 앞장섰던 국민동원총진회의 고문을 지냈"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와 협력해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하고 공짜로 착취한 전범기업들도 나쁘지만,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며 한국 노동자들을 징용으로 내몬 한상룡 같은 기업인과 그들의 재산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1999년 7월 23일 자 <조선일보> 19면 전체를 차지한 기사는 '외세자본-권력층 손잡고 은행 세워'라는 제목이 붙은 '이규태 역사 에세이' 칼럼이다. "외세가 남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펴는 데 두 가지 공식이 있다"라며 "하나는 빚으로 얽어매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군대를 제 편으로 만들어놓는 일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러시아가 차관을 빌려주는 방법으로 대한제국을 유인하려 하자 일본이 이렇게 대응했다고 설명한다.
 
"이 러시아 차관을 막는 수단으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본국과 상의하여 한국인 경영의 은행 하나를 만들고 부산에 있는 일본계 제일은행 지점으로 하여금 자금을 대게 하여 원격 조정하는 일을 서둘렀다. 이 한국계 은행 설립을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촌인 종친 이재완이 맡았다. 러시아 차관의 방지책도 되곤 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 1897년 대관을 역임한 김종한이 운영해오던 한성은행을 인수한 것이다."
 
러시아의 경제 침투를 막고 일본의 조선 독점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성은행의 총무·전무 등을 지내면서 일본을 대신해 경영자 역할을 맡은 인물이 관립외국어학교에 다니다가 3년간 일본 유학을 했던 한상룡이다.

한상룡이 대한제국 시대와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역사에 끼친 영향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경제적으로 보조했다는 점이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김경일 덕성여대 교수의 기고문인 '식민지 예속경제의 첨병'은 한상룡의 롤모델과 관련해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 과정에서 '재계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였던 시부자와(澁鐸榮一)를 본받아 그는 자신이 식민지에서 제2의 시부자와가 되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인수하고 경부철도를 개통시켜 한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시부사와 에이이치처럼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1999년 7월 23일 자 <조선일보> 이규태 역사 에세이 '외세자본-권력층 손잡고 은행 세워' ⓒ 조선일보

 
윤석열 정부, 발상부터 바꿔야

한상룡은 일본 제일은행 자금으로 한성은행을 경영했을 뿐 아니라 상당히 인상적인 자금 동원 방식까지 동원해 그렇게 했다.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점에 협력한 친일파들에게 준 상금을 자기 은행에 예치시키는 아이디어도 동원했다. 친일파가 친일파를 이용해 자기 은행 금고를 불렸던 것이다. 뛰는 친일파 위에 나는 친일파 있었던 것이다. 김경일 기고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일제에 로비를 하여 '합방 유공자'에게 일제가 준 이른바 은사공채를 한성은행의 자본금으로 흡수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세간의 인식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친일파들이 대한제국을 팔아 상금으로 받은 돈을 자기 은행에 끌여들이는 이 행위는 한성은행이 비약적 발전을 거듭해 식민지 한국 최대의 은행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고 기고문은 말한다.

그는 다채로운 방법으로 친일을 했다. 일반적인 친일 기업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행적도 연출했다.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그는 서울 용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관저를 찾아갔다. 우쓰 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의 용산 관저를 방문한 것이다.

위 기고문에 따르면, 그는 3·1운동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한국인도 일본인과 같은 성씨를 사용하도록 해줘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게 하면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제안이었다. 1940년에 시행될 창씨개명을 선구적으로 창안했던 것이다.

그는 한성은행 이외의 여러 기업 경영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기업 브로커 활동도 함께했다. 일본 기업인의 한국 진출과 한국 기업인의 일본 진출을 중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그의 도움에 힘입어 일본 자본의 한국 진출이 촉진됐으니, 그 촉진으로 인해 일본이 이익을 얻었을지 한국이 이익을 얻었을지는 뻔히 드러나는 일이다.

그는 일제 침략자들을 기념하는 사업에도 열정을 발휘했다. 침략을 주도한 일본인들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주도했다. 시부사와뿐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등을 기리는 활동 등이 그것이다. 그에 더해 일제강점 막판에는 강제징병과 강제징용을 받아들이도록 홍보하는 강연 활동에도 열성을 보였다.

그런 활동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상도 받고 상금도 받았다. 그가 보유한 친일 재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경제침략을 돕는 방법으로 기업 활동을 했으므로 한성은행 경영을 비롯한 각종 기업 활동으로 발생한 수입은 기본적으로 친일 재산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상룡처럼 강제징용을 비롯한 식민지 수탈에 간여한 기업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의 재산은 해방 이후로도 계속 승계되고 있다. 전범기업과 함께 강제징용 문제 해결에 참여해야 할 주체가 있다면 그런 기업을 계승했거나 그런 기업의 자산을 승계한 집단 혹은 개인이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전범기업이 아닌 한국 기업에 책임을 지우려 하는 그 발상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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