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9 17:20최종 업데이트 22.06.1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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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들 중에는 해방 뒤에 일본인과의 연고를 활용해 적산(귀속재산, 일본인 재산)을 차지한 사람들이 많았다. 언뜻 보면 이들과 같은 부류인 듯하지만, 결이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적산을 확보한 친일파가 있다. 재단법인 상명학원을 설립하고 상명여자사범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낸 배상명이 그 주인공이다.

배상명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6년 5월 17일 출생했다. 국권 침탈 4년 전인 이때, 평양 서남쪽의 대동강 주변인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인 1923년 경성(서울) 동덕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부터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24년 4월, 경성 삼선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교사로 일하다가 유학을 떠난 그는 중일전쟁 2개월 전인 1937년 5월 도쿄고등기예학교 사범학교를 졸업한다. 이때부터 교육 행정가의 면모를 띠게 된다. 그해 11월 상명여자사범대학교의 모체가 될 상명고등기예학원을 설립하고 학원장에 취임했다. 1940년에는 이 학교를 상명실천여학교로 변경하고 교장을 맡았다.

1940년에 그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교육행정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가, 그가 세운 학교도 아직 초보 단계일 때였다. 그래서 학교 운영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을 이 시기에 그는 다른 데로도 눈을 돌린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응원하는 일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배상명 상명학원 설립자. <뉴스타파> ''민족교육자'로 변신한 친일파 87명'에서도 다뤘다. ⓒ 뉴스타파

 
친일파 교육자

<친일인명사전> 제2권에 따르면, 배상명이 친일행위로 두각을 보인 것은 교장 직함을 갖게 된 1940년부터였다. 이때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글을 써서 전쟁 협력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가담했다.

이 해 12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쓴 글의 제목은 '저금은 국가 위한 것, 채권 사는 데 씁니다'였다. 이듬해 1월 14일자 기고문인 '의식주 세 가지를 간결하고 경제적으로'를 포함해 이 당시 쓴 글들은 전시체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개선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41년 9월, 전쟁 협력을 위한 관변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이 됐다. 다음달, 이 단체 평의원에 취임했다. 이 시기에 주력을 기울인 것은 강제징용·전시근로동원 및 지원병·강제징병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학교로 모아야 할 교육자가 강제노동 현장과 제국주의 군대로 한국인들을 몰고 갔던 것이다.

1942년 5월, 지원병제보다 한층 강화된 강제징병제 실시가 결정됐다. 배상명은 5월 13일자 <매일신보>에 징병제를 환영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한국 남성들이 징병될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그가 발표한 글의 제목은 '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였다. 남편과 아들을 일본군으로 두는 군국여성이 될 기회를 갖게 됐음을 '자축'하는 글이었다. "반도 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감격해 했다.

같은 달, 조광사가 주최한 '징병령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라는 좌담회가 있었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가 이끄는 조광사가 주최한 이 좌담회에서 그는 꽤 자극적인 발언을 남겼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자식이나 남편을 출전시킬 때는 살아서는 돌아오지 마라, 죽어서도 냄새가 나지 말게 하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게 그의 발언이었다.

적산 불하

미군정은 일본인 적산을 헐값에 불하하면서 연고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했다. 이러다 보니 일본인과 연고가 있는 친일파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1933년 조선에 세워진 소화기린맥주의 취체역이자 소액주주(200주)였던 친일파 박승직이 이 회사를 불하받고 이것이 OB맥주의 번영으로 연결된 것이 그 일례다.

배상명은 집필과 강의로 친일 행적을 축적했다. 그의 직업도 학교 경영자였다. 그런데 그가 적산으로 입수한 것은 일본 종교 시설이었다. 친일파들의 일반적인 적산 인수 패턴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적산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는 그가 이북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듯하다. 그와 동향인 이북 출신들이 남한에 내려와 적산을 인수하는 대열에 그도 끼어들어 적지 않은 재산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해방 전부터 이남에 연고가 있었던 배상명과 달리, 해방 뒤에 월남한 이북 출신 대부분은 그런 연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 상당수는 남한에서 신속히 기반을 구축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여기에는 이북 출신들의 근면성·생활력이나 절박함도 크게 작용했지만, 일부 이북 출신들의 경우에는 좀 더 중요한 요인이 따로 작용했다. 미군정의 전폭 지원이 그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할 때에 관료조직과 군대, 기업들만 들어온 것은 아니다. 종교 조직도 대거 진입했다. 2020년에 <공존의 인간학> 제4집에 실린 김태훈 시코쿠학원대학 교수의 논문 '조선총독부 관보로 보는 일본계 종교 유입의 전체도'는 "각 종파별로 확인되는 포교 거점의 총수는 1453개소"라고 한 뒤 일본 불교 계열이 66%, 신도 계열이 26%, 일본 기독교 계열이 8%이며, 신도 계열 중에서는 천리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알려준다.

이 같은 일본 종교의 위세는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과 그 주변에서도 나타났다. 총독관저 별관이나 일본군 시설만 이곳에 입주한 게 아니라 천리교·출운대사교·금광교 같은 신도 계열 종교들도 들어갔다. 야스쿠니신사 분사인 경성호국신사의 경우에는 일제 막판인 1942년에 입주했다.

한국인들에 의해 1953년 설립된 천리교 고성교회가 2020년에 발행한 <고성: 천리교 고성교회보> 제297호 기사 '천리교, 한국에서 전개과정 6'은 "용산구·충무로·삼각지·도동·북창동·청운동·신당동 따위에 천리교 교회와 관련된 재산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해방 직후에 이런 재산들에 접근한 사람들 중 하나가 이북 출신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및 반공이라는 코드가 이들과 미군정의 유대를 가능케 했고, 이는 이북 기독교인들이 용산과 그 주변에서 적산을 손쉽게 입수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런 기독교인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다. 1992년 8월 10일자 <매일경제> 11면 특집 기사는 "영락교회는 미군정으로부터 일본 천리교의 적산을 이양받아 베다니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는 한경직 목사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정부는 훈장 줘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미군정 지원 하에 일본 종교시설을 접수하는 상황에 불쑥 끼어든 인물이 있다. 이북 출신 교인들과 동향 출신 배상명이었다. 종교기관이 아닌 교육기관의 경영자라서 종교시설 적산 불하를 받기 힘들었던 배상명은 용산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동향 사람들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역시 상당한 재산을 확보했다.

1945년에 세워지고 서울 용산구에 소재하는 서울성남교회의 역사를 담은 <서울성남교회 50년사>는 배상명 측이 분명치 않은 사유를 내세워 적산 불하 경쟁에 뛰어들었고 당국 역시 불분명한 이유로 그의 손을 들어줬다고 설명한다. <고성: 천리교 고성교회보>는 "중학교로 사용할 만큼 아주 넓은 삼각지 로터리에 있던 건물과 대지는 상명학원(배상명)으로 넘어갑니다"라고 설명한다.
 

1986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부고기사 ⓒ 조선일보

 

적산을 차지한 친일파들은 연고권을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배상명은 그런 데 구애받지 않고 동향 사람들의 경쟁에 뛰어들어 천리교 재산의 노른자위를 차지했다.

해방 뒤 배상명은 학교 경영자 차원을 뛰어넘어 전국적인 교육행정가로 성장해갔다. 1960년에는 서울사립중등학교장회 이사, 이듬해에는 대한사립중등학교장회연합회 이사, 1964년에는 서울특별시교육회 부회장이 됐다. 1972년에는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이사로 취임했다. 적산 인수로 불어난 재산이 이 같은 영향력 확대에도 기여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1964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고, 198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1986년 2월 17일 그는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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