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29 19:55최종 업데이트 22.05.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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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과거에 매우 유명했던 친일파가 있다. 1957년 10월 23일 자 <경향신문> 3면 중간에 "친일파 거두"로 언급된 박중양(朴重陽)이 바로 그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활동했던 시기에 발행된 1949년 7월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에는 "반민(反民) 거물"로 언급돼 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57년, 그는 경무대(청와대)에 보낸 <신년 소감>이란 책자로 인해 명예훼손 수사를 받았다. 만 83세인 그가 집필해 각계 인사들에게 무료 배포한 그 책자가 이승만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해 9월 15일 자 <동아일보> 3면 하단에 따르면, 그 책자에 "쏘련이 우세, 미국인이 퇴거하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은 보찜 싸노라고 분망할 것이라"라는 글귀가 있었다. 소련이 강해져 미국이 나가게 되면 이승만이 짐 싸들고 분주하게 도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책을 경무대에도 보냈던 것이다.

그 책에 그런 내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9월 17일 자 <경향신문> 3면 좌상단은 "그 내용인즉 현세를 비방하며 행정 수반인 이 대통령을 모독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는 것인데"라고 소개했다. 해방 이후의 시대 흐름을 비판하고 이승만을 모독하는 것에 더해 친일적 주장까지 담은 책자였던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는 조사 과정에서 박중양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됐다. 10월 23일 자 <경향신문> 3면 우중간 기사는 "(부장검사는) 박(朴)이 84세나 된 고령 관계로 밀우어 혹 정신이상에서 온 것이 아닌가 보고 소(蘇) 정신병원장에 박의 정신감정을 의뢰하였다"라고 보도했다.

무소불위의 자유당 독재 시절에 대통령을 폄하하는 책자를 경무대에 보낸 것도 당시 사람들이 볼 때는 정신이상을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박중양이 평소에 일제 식민지배를 황당하게 찬양한 사실들을 감안하면, 그런 모습 때문에도 부장검사가 정신이상을 의심했을 수 있다. 너무 황당하게 일본을 찬양하니 그런 의심을 할 만도 했다.
  

3.1 운동 당시 시위를 진압하려고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 Wikipedia Public Domain

 
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1권에 수록된 김도형 계명대 교수의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에 따르면, 대한제국이 존속하고 있을 때인 1908년 12월 박중양은 일본인들을 모아놓고 어이없는 친일 발언을 입에 담았다.

경북관찰사인 그는 일본인들 앞에서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의 지도편달에 달려 있습니다"라며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일본인들이 스승의 책임을 느끼며 한국인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발언을 일제 강점 이전에 공개 석상에서 했던 것이다.

그는 해방 4년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을 때는 "크게 본다면 일소(一笑)에 불과한 희비극이다"라며 대수롭지 않은 일을 겪는 듯이 웃어넘겼다. 또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발언도 했고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는 발언도 했다. 평소에 즐겨하던 이런 식의 발언들을 대구지검 검사 앞에서 했다면, 그것 때문에도 그 검사가 정신이상을 의심할 만했다.

1957년의 그 사건은 불기소로 끝났다. 정신이상이 인정된 결과였다. 그렇지만 정신병원 입원은 무산됐다. 그가 완강히 거부한 결과다.

일본 군대 보고 충격 

만약 담당 검사가 그의 과거 이력을 조사했다면, 그가 스무 살 때 '문명의 충격'을 겪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정신이상을 근거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검찰의 결론에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박중양은 1874년 5월에 출생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이 최초로 외국을 침략한 타이완 침공(대만 출병)이 있었던 달에 태어난 것이다. 구한말 기록인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그가 지방 아전으로 언급된 것을 보면, 그의 아버지 역시 아전 출신이었을 확률이 높다. 지방 아전 직은 세습되는 게 보통이었다.

박중양이 문명의 충격을 받은 해인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상륙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제압한 뒤 여세를 몰아 동학혁명군까지 진압했다. 바로 그 일본군을 박중양은 한양 동소문 근처에서 우연히 조우했다. 서울 대학로 인근에서 일본군과 부딪혔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외국 군대를 보고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동경의 눈빛으로 일본군을 바라봤다. 2019년에 <일본공간> 제26호에 실린 이형식 고려대 교수의 논문 '친일 관료 박중양과 조선 통치'는 우연한 조우를 계기로 박중양이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모했다고 설명한다. 박중양은 일본군이 청나라를 꺾고 승세를 타는 소식에 매료됐고, 신흥 강대국 일본을 모방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는 일본인을 닮고자 외모도 스스로 바꾸었다. 위 논문은 "일본인 이발소에서 상투를 자르고 일본인과 술을 마시면서 필담하는 등 일본인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라고 설명한다. 그 시절 조선 땅에서 일본인 헤어스타일을 갖고 싶어 일본인 이발소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단발령을 강요할 필요도 없는, 못 말리는 친일파가 될 조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중양, 1932년 3월 ⓒ Wikipedia Public Domain

 
그가 일본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자기 재산을 팔아 일본에 건너간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유학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답을 방매하고 1896년 10월 게이오기쥬쿠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라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일본이 좋아서 부동산까지 팔았던 것이다. 그가 떠난 뒤에 한국에는 부인과 두 아들이 남았다.

그가 가족과 재산을 과감히 등지고 그렇게 한 데는 신분제에 대한 불만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일본을 기회의 나라로 높이 평가한 사실은 자신을 제약하는 아전 신분에 대한 불만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노비가 아니면 누구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아전 신분으로는 출세하기 힘들었다. 그가 일본을 평등 사회로 높이 평가한 데는, 조선보다 강력해진 나라이자 자신의 신분이 무의미한 그곳에 가야 미래가 열릴 수 있으리라는 판단도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탁월한 일본어 실력과 광범위한 인맥을 쌓고 러일전쟁 때 돌아왔다. 전쟁 발발 1년 전인 1903년부터는 야마모토 마코토(山本信)라는 일본 이름까지 사용했다. 그에게는 창씨개명을 권유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라는 소문

그 후 그는 자신이 일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증명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러일전쟁에 통역으로 자원했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경상북도관찰사가 됐을 때는 일본 상인들을 위해 대구 성벽을 밀어버리기까지 했다. 한국인들이 구축한 견고한 상권 때문에 대구성 내에 진입하지 못하는 일본 상인들을 위해 아예 성벽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친일파 99인>은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는 도로로 만들었다"라며 "오늘날 대구의 동성로·남성로·북성로·서성로가 바로 그 길"이라고 설명한다.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의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1906.10.01일 자 ⓒ 대구근대역사관

 
또 일본인들이 부동산을 쉽게 매수해 돈을 벌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섰다. 이를 위해 공권력도 과감히 사용했다. 190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순시할 때 일장기를 걸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구 수창학교 폐교를 추진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직접 부대를 조직해 진압군 행세까지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은 "대구자제(自制)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했다"라고 한 뒤, 3·1운동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오늘날로 치면 국회 부의장 비슷한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하고,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도 역임했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해 군수품 제작에도 관여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정부에 "한국에서 가장 좋은 관리는 오로지 박중양이다"라고 강추한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이토의 사랑을 받다 보니 그가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까지도 나게 됐다.

일본의 위세를 빌려 고위 관직도 역임했고, 고액 연봉이 보장되는 중추원 부의장도 지냈고,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도 지냈다. 일본 유학을 위해 매도한 전답보다 훨씬 많은 대가가 그에게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는 물질적 대가를 기대하고 친일을 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상당수의 친일파들은 일제 패망 뒤에 한국 국가기관에 취직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해방 당시에 71세였으므로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 패망은 그에게 재산상 손실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여전히 일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승만은 친일파들과 제휴하면서도 반일 노선을 표방했다. 그는 외형상 반일 대통령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그런 이승만에게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신년 소감>을 발송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세상의 시선이 무서워 친일파가 아닌 척하고 살았던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이해되지 않아 대구지검 부장검사가 정신병원장에게 소견을 부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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