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24 14:03최종 업데이트 22.05.2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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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고교야구의 시대였다. 대회가 늘어났고 관중도 늘어났다. 1960년대 중반까지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두 대회를 관전하기 위해 서울야구장을 찾은 입장객이 해마다 10만 명을 넘지 못했지만, 대통령배와 봉황기가 창설되며 '4대 전국대회' 체제가 확립된 1971년에는 30만 명을 넘어섰고 1979년에는 112만 명에 달했다.  

관중이 늘고 야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야구부를 창단하는 고등학교들도 늘어났다. 1960년대 후반까지 30개를 채 넘지 못했던 고교야구팀의 수는 1975년 50개까지 불어났고, 고교야구 선수의 수 역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물론 빠르게 확산된 야구 인기에 편승해 성급하게 창설된 많은 고교야구팀 중에는 몇 년 안에 조용히 문을 닫는 경우도 있었지만, 꾸준히 성장해 오늘날까지 강자로 군림하는 팀들도 적지 않다. 신일고, 충암고, 진흥고, 강릉고, 대구고, 북일고, 덕수고 등이 그 시기에 야구부를 만든 학교들이다.  

고교야구 스타, 더 오래 볼 수 없을까

관중이 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회마다 전설적인 명승부가 이어졌고, 해마다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스타플레이어들이 등장했다. 1971년에는 경북고의 남우식이 주요 경기를 대부분 혼자 완투하며 팀의 전국대회 6관왕을 이끌어 고교야구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고, 1976년에는 군산상고와의 청룡기 승자 결승에서 20개의 삼진을 잡아낸 경남고의 최동원이 주목받았다.

그리고 1978년에는 출전이 허용된 3개 전국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이끈 부산고의 에이스 양상문이 화제를 모았고, 1980년에는 광주일고의 3학년 에이스 선동열을 난타한 선린상고의 2학년생 박노준이 나타나 그해와 이듬해 선수와 연예인을 통틀어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야구 아이돌' 박노준 선린상고의 박노준이 투구하고 있다. 박노준은 2학년 시절인 1980년부터 뛰어난 3학년생 에이스들을 연파하며 화제를 모았고, 3학년 때인 1981년 경북고와의 봉황대기 결승에서는 큰 부상을 입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더 큰 화제를 모았다. 특히 여고생들 사이에서 그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 연합뉴스


문제는 한국의 고등학교는 3년제이며, 따라서 고교야구 선수의 수명 역시 3년이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선수들은 3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기 때문에 대중에게 각인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그 선수들을 더 길게 보고 싶은 대중의 요구와 그 선수들을 통해 손쉽게 대중의 관심을 얻을 수 있게 된 대학과 기업들의 필요가 맞물린 것은 당연했다.

해방 직후 상대와 약대를 중심으로 대학야구의 발전을 주도한 서울대가 체육특기생 선발을 거부하며 도태된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야구부를 운영한 대학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한양대, 동아대, 경희대 6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중앙대와 건국대, 인천체육전문학교, 영남대, 인하대, 충남대, 원광대 등 7곳의 대학이 야구부를 창설하면서 고교야구 선수들의 진학 기회도 두 배 이상 넓어졌다.

그에 비해 실업야구팀의 증가는 두드러지진 않았다. 각 군(육·해·공)에서 운영하던 팀들을 제외하면 1963년 14개로 정점을 찍은 뒤 창단과 폐지가 되풀이되고 엇갈리며 1960년대 후반 7개까지 줄어들었다가 1977년 다시 9개까지 늘어난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실업팀들이 생겨났다는 점이었다. 바로 롯데와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등 프로야구팀의 출현을 예고하는 팀들의 등장이었다.

그 세 팀은 정부의 압력이나 권유와는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창단했다는 점과 선수들에게 일반 업무의 부담을 강요하지 않고 야구장에서의 경기력을 경제적 보상과 연결함으로써 더 높은 성과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고, 다른 팀들과는 달랐다.

'프로다운 야구'의 개척자, 롯데

그 중에서도 1975년에 창단해 이듬해부터 실업야구 리그에 참가한 롯데 자이언트의 과감한 투자와 적극적인 운영은 파격적이었다. 남우식, 김인식, 천보성, 계형철 등 국가대표 멤버들을 중심으로 17명을 선발한 데 이어 재일동포 선수와 지도자 영입을 공언하기도 했고, 리그 데뷔를 앞둔 1976년 2월에는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함으로써 한국야구 최초의 해외 전지훈련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롯데는 이전까지 다른 실업야구팀에서 볼 수 없었던 적극적인 홍보 전략을 구사했다. 30여 명의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고적대 응원단 '롯데 엔젤스'를 조직해 합창과 율동, 타악기 연주 등을 선보이기도 했고, 1975년 겨울에는 동계훈련지 부산에서 서울까지 520km의 거리를 선수단 전체가 13일간 도보 행군하면서 그 13일 동안 언론매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또 시즌 개막전이나 우승 결정전 같은 중요한 경기에는 천 명 이상의 그룹 임직원들을 동원해 오늘날 부산 사직구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집단 응원을 연출했다. 
 

롯데 응원단 엔젤스 30명의 여성으로 구성한 실업야구팀 롯데 자이언트의 응원단 '엔젤스'는 고적대 공연을 기본으로 중창과 율동 등을 선보이며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 동아일보

 
롯데의 과감한 투자는 성적으로도 이어졌는데, 처음 참가한 1976년 춘계리그에서 3위에 오른 데 이어 하계리그와 추계리그를 모두 석권하며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그 해 실업리그 최우수감독상(김동엽)과 최우수선수상(차영화), 우수투수상(유남호)을 모두 휩쓴 것은 물론이었다.

롯데만큼은 아니었지만 포항제철도 2루수 배대웅이 입단 1년 만에 계장으로 승진하면서 봉급이 25%나 인상되었을 만큼 파격적인 보상을 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실업야구 선수에게 야구가 '입사에는 도움이 되지만 직장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소한 특기 정도에 머물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제 야구란 곧 승진과 성공의 도구였으며, 따라서 재주껏 눈치 보며 은퇴할 시점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개척자 김재박

고교야구에서 시작된 급격한 성장의 파장이 성인야구의 성장을 자극했고, 성인야구의 성장은 고교야구 선수들에게 더 많은 진학과 취업의 기회를 보장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렇게 좀더 길어진 선수의 수명과 좀 더 넓어진 기회들은, 새로운 방식의 스타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혀 주목받지 못했지만 대학과 실업야구에서 최고의 스타로서 발굴된 최초의 인물은 김재박이었다.
  

김재박 서울에서 열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에서 전경기가 TV로 중계방송된 첫 번째 세계대회였다. 그 대회 한국 국가대표팀의 1번 타자와 유격수로 출전한 김재박은 차원이 다른 수비 기술과 주루 센스로 많은 소년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소년들은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와 가장 적극적인 야구팬들로 성장했다. ⓒ 국가기록원

 
김재박은 원래 대구에서 나고 자라 대구초등학교와 경북중학에서 야구 선수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하지만 체격이 작은 데다가 투수로서나 야수로서나 별다른 특기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당대 고교야구 최강이던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데 실패해 서울의 신생팀 대광고를 택해야 했다.

대광고에서는 나름 중심 선수로서 활약하긴 했지만 약할 수밖에 없는 신생팀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대학 역시 새로 야구부를 창단한 영남대로 진학했을 만큼 빛을 보지 못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창단 작업에 차질이 생겨 입학 후 1년간 거의 합동훈련을 하지 못한 불운을, 그는 오히려 개인훈련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했다. 그 1년 동안 작은 체구를 보완하기 위해 체력을 기르고 주력과 수비 기술을 보완하는 데 집중한 그는 대학 2학년이 된 1974년 대학야구 추계리그 타격왕에 오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3학년이 된 이듬해에는 팀을 창단 3년 만에 대학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활약을 통해 그는 대학선발과 국가대표로 선발되기 시작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야구 무대에 데뷔한 1977년에는 당시에 공식적으로 시상하던 공격 전 부문인 타격,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 1위를 석권한 데 이어 신인왕과 MVP 그리고 특별상인 타격삼관왕 상까지 휩쓸며 연말 시상식에서 무려 8개의 트로피를 독점하는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타격왕과 도루왕에 오르며 한국팀의 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그 대회와 1981년 같은 대회 그리고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연속으로 대회 '베스트 9'에 선정됐다.

보통의 유격수에 비해 반 걸음 앞서는 정확한 위치 선정과 한 걸음 이상 넓은 수비 범위, 거기에 국가대표팀에서도 투수를 겸했을 만큼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3루 쪽 깊숙한 곳에서 1루까지 직선으로 쏘아 보내는 레이저 송구.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이루어지는 과감한 다이빙 캐치와 내·외야 전체를 지휘하며 협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까지.

김재박은 프로야구 출범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수비의 안정성과 적극성, 그래서 효율성과 화려함의 모든 측면을 두루 겸비한 가장 완벽한 유격수였으며, 특히 그의 동시대에는 비교 대상조차 찾을 수 없는 압도적인 개척자였다.
  

김재박의 개구리번트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최종전에서 만나 우승을 다투었고, 2대 0으로 끌려가던 8회에 거짓말처럼 5점을 뽑아내며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일본의 배터리가 고의로 뺀 공을 향해 솟구쳐 성공시킨 김재박의 기습 번트는 동점타였을 뿐만 아니라, 승리의 기운을 결정적으로 끌어온 의미있는 한 방이었다. ⓒ 한국야구위원회

 
서울에서 열려 전 경기가 TV로 생중계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그가 보여준 그림 같던 수비와 주루 그리고 곡예 같던 번트에 매료된 수많은 1970년대 초반생 꼬맹이들은 선수로서는 가장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배출된 황금세대를 이루었고, 팬으로서는 아무리 암울한 암흑기에도 차마 야구장을 떠나지 못하는 최후의 수호신이자 악만 남은 악플러로서, 한국 야구사의 가장 중요한 세대를 이루고 있다. 

그런 슈퍼스타의 출현이 가능한 야구사적 배경이 만들어진 것이 비로소 1970년대 중반이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우리는 한국 야구의 발전이 이루어진 짧지 않고 간단치 않은 내력을 발견할 수 있다.
 

체육훈장을 받는 박찬호 10살에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과 프로야구 출범을 지켜본 1973년생들은 가장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배출됐기 때문에 '황금세대'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난 별은 단연 박찬호였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경제난을 겪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준 박찬호에게 체육훈장을 수여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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