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2 18:07최종 업데이트 22.05.0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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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일본에 파견한 정책협의대표단 단장인 정진석 국회부의장이 24일 오후 일본 지바현 나리타시 소재 나리타국제공항에 도착한 직후 취재진 앞에서 활동 계획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정책협의대표단은 정 부의장(한일의원외교포럼 공동대표), 김석기 국민의힘 의원(부단장,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전문위원), 이상덕 전 주싱가포르 대사, 장호진 전 주캄보디아 대사,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등 7명으로 구성됐다. 2022.4.24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친서를 들고 방문한 한일정책협의대표단(대표단)이 지난달 27일 아베 신조 전 총리와 주고받은 대화가 보도됐다. 대표단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거부한 전범기업이 한국에서 강제집행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아베 신조의 요청에 대해 동조의 뜻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전범기업의 한국 내 자산이 현금화되어 피해자 측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표시했다는 것이다.

27일 자 <도쿄신문> 기사 '아베 신조 전 수상, 위안부 문제 관련해 한국 측에 유감의 뜻 전해(安倍晋三元首相、慰安婦問題で韓国側に遺憾の意を伝える)'는 대표단과 아베 신조 사이에서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가 협의됐다고 보도한다.


이 자리에서 아베 신조가 윤석열 정부에 대한 요구 사항을 내놓았다고 한다.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는 절대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괄호 속 내용은 <도쿄신문>에 보도된 그대로다. 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정진석 국회부의장이 단장인 대표단은 아베 신조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 기사는 27일 오후 7시 25분 업로드됐다. 오후 11시 21분 <도쿄신문>에 옮겨진 <교도통신> 기사 '아베 전 수상, 현금화 회피를 요구, 징용공 소송 관련 입민 대표도 회담(安倍元首相、現金化回避を要求 徴用工訴訟で、立民代表も会談)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렸다. 이 기사 역시 "(아베 신조가) 한국 측에 선처를 구했다"라고 한 뒤 "한국 측은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응했다고 한다"라고 보도했다.

배상절차를 현 단계에서 멈춰달라는 요구에 대해 '그것만큼은 안 된다'라고 하지 않고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답했다. 대표단이 내놓은 이보다 더 구체적인 답변은 이들의 도쿄 특파원 간담회에 관한 국내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정진석 단장은 "일본에 자산 현금화를 않겠다는 표현을 쓴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한일관계가 더 악화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겠다고 답했다"라고 말했다. '현금화를 피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더불어 '더 악화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으니, 아베의 요구를 우회적으로 수용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표단은 윤석열 당선인의 친서를 들고 일본에 갔다. 특사의 성격을 띤 대표단이 그렇게 말했다면 윤 당선인의 의중 역시 그렇다고 이해하는 게 순리적이다.

박정희 정권의 꼼수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대표단의 발언은 어떤 식으로든 상황에 개입하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이미 판결이 확정돼 강제집행 단계에 진입해 있는 사건에 대해 차기 행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을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윤석열 차기 정부가 강제집행 사건을 진행하는 사법부에 대해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 개입이 일어난다면 삼권분립 파괴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피해자 측을 설득해 절차 포기를 유도하려 한다면, 이는 삼권분립 파괴 이상의 문제를 낳는다. 정부가 외국 정부와의 친선을 위해 자국민의 한(恨)을 짓밟는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정부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낳게 된다.

피해자 측이 한국 정부의 돈을 받도록 유도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발생한다. 금전의 지급 주체는 일본 기업이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의 의무를 대신 부담할 법적 근거는 없다. 우리 국민들이 그런 권한까지 정부에 위임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위로금이나 지원금 등에 불과하다.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수십 년 넘게 한을 삭이지 못하는 것은 그 고통 자체가 지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가 주는 돈이건 손에 돈만 쥐여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100억, 1000억을 줘도 풀리지 않을 응어리들이 가슴에 서려 있다. 전범기업이 직접 사과하고 전범기업이 직접 배상하지 않는다면 그 응어리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 측이 볼 때 '모범 사례'를 남겼다. 1971년 3월 21일부터 시행된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은 법 시행 2개월부터 10개월 사이에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신고하도록 규정했다. 사안을 신속히 마무리하고자 신고 기간을 길지 않게 잡았던 것이다.

그런 의도를 무시한 채 무턱대고 정부를 찾아갔다가는 낭패를 보기가 쉬웠다. 재무부에서 신고 업무가 개시된 날인 그해 5월 21일 발행된 <매일경제> 기사 '민간청구권 신고 업무를 개시'는 "어차피 형식과 구호에만 그치게시리 되어 있다"라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하지 않을 수 없어 흉내만 내고 있다는 눈치"라며 재무부 분위기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4·27 대선과 5·25 총선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니 기대감을 갖지 말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담당 공무원들의 눈치를 무시하고 신고를 감행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많았다. 위 법률은 신고 기간을 짧게 정했을 뿐 아니라 신고 절차도 매우 까다롭게 규정했다. 1947년 8월 14일 이전에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이 증거를 제출하면서 신고해야 했고, 징용 갔다가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이 청구권을 신고하려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했음을 입증해야 했다. 징용 가서 죽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되는 게 아니라, 징용 가서 8·15 이전에 사망했음을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잘못 신고하면 빨갱이로 몰릴 수 있다는 암시도 법률 규정에 들어 있었다. 제13조는 청구권을 입증할 서류를 일본에서 국내로 갖고 들어올 때 반국가적 목적이 있었다면 사형·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신고하지 말라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위 <매일경제> 기사에서 보도된 재무부 분위기는 국민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다. 7월 24일자 <경향신문> '한산해진 청구권 창구'는 "수십 만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피징용 사망자 신고는 불과 4백 76명에 머무르고 있다"며 "그러나 7월 중순 이후로는 접수 신고가 부진, 사무국 창고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고 증빙 규정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 뒤 "이래서 창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정부가 생색만을 내고 실제 혈채(血債) 보상은 기피하려는 게 아니냐고 불만"이라고 보도했다. '더 악화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박 정권의 의지가 성공을 거둔 셈이다.  

박정희 정권의 이 같은 조처는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자 정신적 구심점인 동시에 일본 극우세력의 사표 중 하나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를 만족케 할 만했다. 하지만, 윤석열 차기 정부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에게 그런 만족감을 주기가 쉽지 않다.

해법은 하나

박정희 정권은 입법 단계에서부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발목을 묶어놓았다. 그에 반해 윤석열 차기 정부는 그런 수단을 행사할 여력이 없다. 게다가, 사건이 이미 입법 단계를 떠나 사법 영역으로 넘어가 있다. '더 악화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라고 아베 신조에게 해준 약속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전망할 수밖에 없다.

'더 악화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면서도 역사에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은 사고의 전환을 기하는 것뿐이다.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으려면, 법원과 피해자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전범기업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즉각 사죄배상하라" 29일 부산시 동구 일본영사관 평화의 소녀상에서 부산겨레하나가 법원의 배상판결 이행에 불복하는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한 규탄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2021.9.29 ⓒ 김보성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설득해 사과하고 배상하도록 유도한다면, 강제집행절차가 중단될 가능성도 전망해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현금화는 절대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요청도 성취시켜주게 된다.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려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맞춰줘야 한다. 피해자더러 가해자에게 맞춰주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피해를 낳게 된다. 윤석열 차기 정부가 일본 정부와 협력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전범기업이 고집을 버리고 피해자 측에 맞춰주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순리적이다. 그래야 현금화도 피할 수 있고, 더 이상의 상황 악화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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