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6 12:31최종 업데이트 22.04.26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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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 역도산의 문하에서 성장해 일본 프로레슬링의 차세대 주역으로 떠오르던 김일이 한국에서 온 중앙정보부 요원을 만난 것은 1964년 6월이었다. 그때 조국에서 정부의 지원 아래 프로레슬링 흥행을 이끌어보라는 제안을 받은 김일은 얼마 뒤 귀국해 중앙정보부 차장 이병두를 만나 수락의 뜻을 전했고, 곧바로 청와대로 초청돼 박정희 대통령을 접견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 7월에 귀국한 그는 8월 6일과 7일 이틀 동안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일본의 우에다·요시무라·요시노·나가사와, 한국의 장영철·천규덕 등과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른 프로레슬링 극동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우승하며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미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프로레슬링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던 김일은 이후 미국과 일본의 유명 프로레슬러들을 악역으로 초청해 갖은 반칙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박치기 한 방으로 응징하는 역전승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충체육관 뿐만 아니라 조금씩 늘어가던 TV와 라디오를 통해 연결되던 대중사회의 스타로 떠올랐으며, 특히 '세계 최강의 사나이'이자 일본을 혼내주고, 서양인에 대한 콤플렉스를 씻어주는 민족적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박치기왕 김일 역도산의 제자로서, 일본 프로레슬링 무대에서 '원폭박치기'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일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 대한체육회 (스포츠영웅)

  
프로복싱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이루어졌다. 1965년 대한중석 사장 박태준을 부른 박정희 대통령은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을 하나 만들어볼 것'을 지시했고, 박태준은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출신 프로복싱 동양챔피언 김기수를 위해 신설동에 체육관을 지어주고 훈련비와 생활비 일체를 지원했다.

이어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 니노 벤베누티를 서울로 불러 김기수와 경기를 치르게 하며 대전료 5만 5천 달러까지 대납했다. 1인당 국민소득 120 달러 시대의 5만 5천 달러는 내는 쪽에서도 거액이었지만 받는 쪽에서도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액의 대전료 수입'으로 기록될 만큼의 거액이었다.


그날의 경기에서 김기수는 15회까지 분투했고, 안방의 이점을 등에 업고 2대 1 판정승을 거두며 최초의 한국인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되는 데 성공했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 김기수는 벨트를 움켜쥔 채 귀빈석으로 뛰어올랐고, 대통령의 허리에 직접 챔피언 벨트를 감고 부둥켜안았다.

세계 최강의 사나이

특별히 1966년 6월 25일로 맞춘 날짜에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이 직접 장충체육관을 찾아 관전하기로 한 그 경기가 단군 이래 최대의 관심이 집중된 스포츠 이벤트가 된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경기 주관사가 방송 중계권료로 호기롭게 1천만 원을 부르고 방송국들이 80만 원 이상은 어렵다고 버티면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이렇게 중요한 경기를 TV로 중계방송하지 않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 행위'라는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졌고, 중계권료는 단 돈 2만 원에 낙찰되고 말았다. 그 경기가 대흥행을 한 것은 당연했지만, 주관사는 경기 직후 파산하고 말았다.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이 대중을 열광시킨 것은 당연했다. 힘과 기술을 동원해 상대를 때려눕히는 경기 방식이 지극히 직관적이었으며, 훨씬 강해 보이는 거만한 서양인과 일본인을 이겨내며 민족적인 자긍심을 고취시킨다는 배후의 의미 구조 역시 단순 명쾌했다.

게다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스타플레이어, 경기, 중계방송도 충분히 공급되었다. 프로복싱과 프로레슬링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장충체육관 일대가 대혼잡을 빚었고, TV와 라디오 앞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작은 극장을 이루었다. 
 

주연배우 김기수 대통령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인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 그는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내 주먹을 사라>에서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와 함께 주연을 맡으면서 세계챔피언에 오른 뒤 영화배우로 데뷔하는 루트를 개척했다. ⓒ 한국영상자료원(영화 영상 캡쳐)


그에 비해 야구가 가진 매력이란 보잘것없었다. 규칙은 어렵고 경기방식은 난해하기에,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학습의 과정이 필요했다. 인터넷도 없고 야구 관련 책이나 잡지도 없던 시절, 야구라는 종목에 대해 설명해줄 만한 '동네 형들'도 대부분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학교 출신들뿐이라 공부하느라 바빠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경기는 길었고, 중계방송이 흔치 않았으며, 기껏 라디오 중계방송의 말로 하는 설명으로는 경기 양상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싸우는 상대 역시 경북고 아니면 선린상고, 인천고 아니면 경남고 식이라 그 학교를 졸업한 가족이라도 있지 않는 한 굳이 응원할 이유도 없었으며, 최소한 일본놈 서양놈 쥐어패는 재미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복싱과 레슬링 밀어낸 야구

하지만 1970년대 초, 고교야구의 인기가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을 압도하는 대반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중반 사이의 10여 년간 고교야구대회의 입장객 수는 서너 배씩 증가했다.

고교야구 소식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확장되면서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로서 1969년 창간 당시 2만 부를 발간하던 <일간스포츠>가 1976년에는 80만 부를 찍어낼 정도로 팽창했다. 각 종합일간지의 스포츠면 비중도 꾸준히 확대되었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야구가 처음으로 최고 인기 종목으로 올라섰으며, 중계방송의 빈도 역시 프로복싱과 프로레슬링을 넘어섰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발언 때문에 프로레슬링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프로복싱에서 더 이상 세계챔피언이 배출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한국인들이 일본과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모두 해소해버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국내파 프로레슬러 장영철이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발언을 했던 것은 김일이 귀국한 직후인 1965년 11월이었고, 당연하게도 김일의 전설적인 국내 활동이 이어진 것은 대부분 그 뒤의 일들이었다.

프로복싱에서는 김기수의 챔피언 등극을 지켜보며 복싱에 입문한 '김기수 세대'들이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챔피언 타이틀을 수확하기 시작했는데, 1974년 홍수환(WBA 밴텀급), 1975년 유제두(WBA 주니어미들급), 1976년 염동균(WBC 슈퍼밴텀급), 1978년 김성준(WBC 라이트플라이급), 1978년 김상현(WBA 슈퍼라이트급), 1979년 박찬희(WBC 플라이급) 등이 그들이었다.

사실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은 1970년대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세대교체와 후진 양성에 성공한 프로복싱과 김일 한 사람의 나이 들어감과 더불어 노쇠한 프로레슬링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극적인 몰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1960년대 중반의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지위를 조금씩 잃어갔을 뿐이고, 그것은 스포츠의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진 성장과 대비된 것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교야구의 급격한 부상 외에도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에서 본격적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폭발력 

그렇다면, 야구로 국민적인 관심이 옮겨가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경기 방식이 난해하고 애국심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계기도 약한 데다가 특히 실업야구에 비해 기술적인 수준도 높지 못한 고교야구에 집중적인 관심이 쏟아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군산상고의 개선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극적인 9회말 역전승을 거두며 전후 호남지역 학교 최초의 전국대회 우승을 이룬 군산상고 야구부가 군산 시내를 개선행진하고 있다. 그 사건은 호남 전체를 열광시켰고, 야구의 지역대결구도를 완성했다. ⓒ 오성자(최관수 감독 부인) 제공

 
간단히 말하자면, 대한민국을 대표해 일본과 서양을 쥐어패는 것보다도 더 재미있고 더 깊숙이 몰입하게 만드는 대결구도가 고교야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역 대결 구도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영남 지역에 집중된 공업시설들은 호남 지역과의 경제적 격차를 확대했고, 박정희와 김대중이 혈전을 벌인 1971년의 대통령 선거는 그 격차를 정치적 경쟁의식으로 구조화했다. 일본이나 서양과의 경쟁의식이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되는 상징적인 것이었다면 지역 간의 경쟁의식은 현실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것이었고, 따라서 더욱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지역 간의 경쟁의식이 드러날 만한 대리전의 무대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고, 1960년대까지는 야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야구는 서울과 인천,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스포츠였고, 결정적으로 전쟁 이후 야구의 맥이 끊어진 호남 지역이 소외된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72년 7월, 전북 지역 소도시의 이름 없는 상업고등학교가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를 제패한 사건은 잘 마른 장작 위에 던져진 불씨와 같았다. 호남 야구의 부활은 곧 야구의 전국화를 의미했고, 그것은 동시에 야구를 통한 지역 간 대결구도의 완성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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