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5 06:19최종 업데이트 22.04.25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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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비를 뽑읍시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때론 9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이어지는 대통령과 기자들의 회견 자리에서 불만이 불거졌다. 일부 기자들이 자신들에게 질문권이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요지는 현 정부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기사들을 내는 언론사 기자들이 매일의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으로부터 비교적 쉽게 질문자로 지목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공식 명칭으론 '오전 기자회견(Conferencia de Prensa Matutina)'. 하지만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와 대부분 언론, 그리고 국민들까지 딱딱한 이름 대신 '이른 아침(Mañanera)'으로 칭하는 멕시코 특유의 소통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전 기자회견'에서 멕시코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질문을 위해 손을 든 기자들 중 한 명을 지목하고 있다. ⓒ 대통령처

 
831회 이어진 대통령 기자회견

기자들의 불만에 대한 대통령의 답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제비를 뽑자는 것이었다. 물론, 대통령은 그간 자신의 지목이 특정 언론사 소속 기자에게 편향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혔고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시절에는 서로 마스크를 쓰기 때문에 더더욱 얼굴을 기억하여 지목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

누구든 멕시코를 여행하게 된다면 매일 아침, 점심, 혹은 저녁 뉴스 어디쯤에서 대통령궁 안 천장이 유난히 높은 방에서 이루어지는 '오전 기자회견'의 장면들을 쉽게 볼 것이다. 혹 날이 밝기 전 수도 멕시코시티 헌법 광장 가까이 있다면 기자 신분증을 패용하고 방송 장비를 챙겨 새벽어둠을 가르며 속속 대통령 궁 안으로 들어가는 무리들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매일 정각 07시에 대통령의 입장과 함께 기자회견이 시작된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전 기자회견장에는 수많은 언론인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취재 경쟁과 질문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회견이 열리는 장소는 멕시코 대통령궁 내에 위치한 구 재무국 사무실이다.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한다. ⓒ 대통령처 유튜브

 
이들 모두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른 아침 진행되는 대통령 기자회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뉴스 혹은 현장에서 직접 보게 되는 이런 장면 한 컷 한 컷이 멕시코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른 아침'의 한 장면들이다. 공중파 방송의 뉴스와 현장이 아니더라도 멕시코 각 행정부처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유튜브 채널과 페이스북, 그리고 트위터를 통해 생중계하니 어쩌면 멕시코를 여행하는 동안 어떤 경로로든 한 번쯤 접하게 될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언론과 소통하면서 주요 현안에 대해 질문을 받고 답하는 일은 사뭇 독특하다. 2018년 12월 1일(토요일) 멕시코 제6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는 이틀 후인 12월 3일(월요일)부터 '오전 기자회견'을 시작했고 2022년 4월 20일 현재 831회에 이르고 있다.


대통령이 기자들을 상대로, 미리 짜인 계획 없이, 그리고 별도의 원고나 프롬프트도 없이 매일 즉문즉답 형식의 회견을 진행하는 것은 멕시코 역사에서도 선례가 없다. 1970년대까지는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는 장이 아예 없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매년 12월 1일, 1년에 딱 한 번 연례보고를 통해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가 방송을 타고 생중계되었다. 물론, 일방적인 대통령의 보고만 있을 뿐 국민들이나 그들을 대신한 언론이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멕시코 역사 상 행정부와 언론이 이토록 가까이에서 소통했던 적은 익히 없었다.

새벽 1시부터 줄 서는 기자들

매일 기자회견의 시작은 오전 일곱 시지만, 대통령과 각료들은 오전 여섯 시에 미리 모여 당일 발표하게 될 현안들을 챙긴다. 기자회견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대통령궁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방이다. 과거 연방 재무국 사무실로 쓰였던 공간이라니, 멕시코 모든 공공기관을 통틀어 가장 호화로운 방으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중심 헌법광장(소칼로) 한 면에 위치한 대통령궁(국가궁전) 전경. 매일 아침 이른 새벽 기자들은 대통령의 오전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이 곳에 도착한다. ⓒ 대통령궁 트위터

 
통상적으로 오전 일곱 시에 대통령이 당일 발표할 현안과 관련된 각 부처 장관들과 함께 입장하고 별도의 진행자나 사회자 없이 대통령이 직접 현안들을 발표하며 기자회견을 주도한다. 사안에 따라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해당 부처 장관들이 부연 설명을 이어간다. 이때도 대통령은 자리에 앉지 않고 발표자들의 뒤편에 서서 설명을 듣는다. 매일 두 시간 이상 서 있는 셈이다.

지난 3년 간 진행과 관련하여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처음 서너 달 동안은 기자들뿐 아니라 유투버나 블로거들, 그리고 법과대학에 재학하는 학생들도 기자회견 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또한 질문의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참가자들이 계속 늘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새벽 1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조치가 필요했다. 결국 2019년 4월 이후 '이른 아침' 현장 참가자들을 공식 등록된 매체 기자들로 한정하였다. 당시 이 기준을 갖추지 못한 단체로부터 참가 제한이 곧 언론통제가 될 수 있다는 항의가 이어졌지만, 다양한 채널을 통한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갔다.

2020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과 함께 다시 한 번 현장 참가자들을 제한하게 된다. 그간 커다란 사무실을 빽빽하게 메우던 언론인들이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원 제한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질문은 여전히 치열하다.
 

아.. 질문의 기회를 얻기란.. ⓒ 대통령처

 
질문권자를 지정하는 것은 대통령이다. 기자들은 손을 들어 질문 의사를 표하고 대통령이 그 중 한 명을 지목하는 방식이다. 방송에서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제비 새끼들이 어미 제비가 물어온 먹이를 받아먹겠다고 서로 입을 벌려 대는 모습이 연상된다. 질문권을 얻기 위한 다툼이 격렬하다.

모두에게 질문권을 주지 못하는 이상, 질문권을 얻지 못한 기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자기 구미에 맞는 언론사 기자들에게만 질문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대통령의 제비뽑기 안이 나왔다. 어떤 언론사에 대한 편향 선호도 없으며, 숨기는 것이 없는 한 어떤 언론사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답하지 못할 것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제비뽑기

지난 월요일(4월 18일) '이른 아침' 기자회견에 참가하는 모든 기자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가 시작되었다. 방식은 다음과 같다. 매일 새벽 여섯 시부터 25분간 대통령궁 마당에 여섯 개의 플라스틱 통이 놓인다. 각 통은 TV, 멀티미디어, 라디오, SNS, 신문사, 인터넷 신문사 중 하나를 대표한다. 기자들은 자신이 속하는 매체의 통에 이름을 적어 넣는다.
 

2022년 4월 18일, 오전 6시 30분 제비뽑기가 시작되었다. 매일 오전 6시부터 6시 25분 사이 대통령궁 마당에 놓인 여섯 개의 플라스틱 통에 각 매체 별로 기자들이 이름을 적어 넣으면 6시 30분 대통령처 사회소통부 직원이 나와서 각 통 별로 세 명의 이름을 추첨하는 식이다. 오전 6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간인데 여전히 어둡다. ⓒ Carlos Guzman Martin 트위터

 
추첨은 여섯 시 반. 대통령처 사회소통부 직원이 나와 각각의 통에서 세 명씩 추첨한다. 각 통에서 처음 뽑힌 사람이 회견장에서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줄, 두 번째 뽑힌 사람이 두 번째 줄, 그리고 세 번째 뽑힌 사람이 세 번째 줄에 앉는 방식이다. 첫 줄부터 세 번째 줄까지 여섯 종류로 구분된 각 매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각 줄마다 한 명씩 착석하는 형태다. 첫 번째 줄과 두 번째 줄에는 여섯 개 의자에 더해 공석을 하나씩 둔다. 당일 중요한 현안에 대해 질문하게 될 단체나 외신 기자를 위한 것이다.

물론, 제비뽑기에서 이름이 호명되어 첫 줄부터 세 번째 줄 사이에 앉는다 해도 질문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공지되었다. 그간 앞쪽에 앉을수록 질문 시간 대통령의 지목을 받을 확률이 높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당일 하루 제비에 뽑힌 해당 기자들의 질문권 확률을 높이는 것뿐이다. 질문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자리를 추첨하는 셈이다.

당일 제비에 뽑혀 질문권까지 받은 언론사는 익일 제비뽑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조항도 첨부되었다. 한 언론사에 연거푸 질문권이 몰리는 것을 방지한다는 취지다. 그간 일부 기자들로부터 불만 혹은 의심으로 제기되었던 대통령의 편향 선호가 일절 불가능함을 알리는 이중 장치이기도 하다.
 

지난 2월 16일, '이른 아침' 기자회견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그 어떤 기자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질문 시간에 기자 한 명이 대통령에게 당일 자신들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유난히 기자 피살률이 높은 멕시코에서 2월 16일 현재 2022년에만 다섯 명의 기자가 피살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이를 개선할 것을 촉구하고 그간 숨진 동료들을 추모하기 위해 당일 하루 질문을 하지 않은 채 1분 간 전원 침묵을 지켰다. 2000년 이후 멕시코에서는 총 151명의 기자가 피살되었다. 화면에는 '침묵 속의 이른 아침'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 El Pais 뉴스

 
지난 3년 간 '이른 아침'이라 불리는 기자회견이 800회 차를 넘기면서 이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축적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 언론사가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9%가 최근 1주일 최소 1회 이상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시청했다고 밝혔으며 22%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녹화본의 일부라도 접했다고 응답했다. 대통령처에서 운영하는 유튜브를 통해 당일 기자회견을 보는 사람은 60만 명 정도 된다.

소통인가 포퓰리즘인가

멕시코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은 '이른 아침' 기자회견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긍정적인 부분은 대통령 기자회견에 대한 선호와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의 상호 견인과 연동이다.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의 말은 충분히 느린 편이고 서민들의 언어가 섞인다. 특히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공격에서 더욱 돋보인다. 시민들 중 더러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반면, 일각에선 프로파간다 혹은 포퓰리즘으로 해석하며 우려를 표한다. 기자회견을 통해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언어나 기자회견 내용을 분석하는 단체들이 기자회견 장에서 나온 대통령의 가짜뉴스를 짚어 내면 대통령은 다시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의 가짜 뉴스를 짚어 내고 정정한다. 적어도 양측 소통은 충분히 자유로워 보인다.
 

여론 연구기관 SPIN은 매 2주마다 지난 10회 분 대통령의 오전 기자회견을 분석하여 다양한 정보가 담긴 인포그래픽을 제공한다. 가장 최신호인 72호에서는 2022년 3월 30일 현재 임기 1217일 중 820회차 기자회견이 실시되었고 평균 소요시간이 110분이었음을 알리는 정보와 함께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말, 그리고 2022년 가장 많은 질문의 기회를 받은 기자의 이름과 소속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더불어 가짜 뉴스(SPIN 기준) 언급 횟수에 대한 정보다 다양하게 담겨있다. ⓒ SPIN

 
지난 4월 10일, 멕시코 역사상 처음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는 투표가 진행되었다. 투표율은 18%로 저조했지만, 6년 중 3년여 잔여 임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유효투표수의 92%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한국식 표현의 유행대로라면 기자회견의 애칭 '이른 아침'에 사람을 뜻하는 표현 ~러(er)가 붙어 '이른 아침러'로 불리기도 하는 대통령의 임기가 지속되는 한 기자회견 역시 회차를 거듭하며 계속될 것이다.

기자회견을 둘러싼 왈가왈부 앞에서 대통령의 답은 오래 전부터 나와 있다.
 
"정보가 곧 민주주의다." (2019년 2월 26일, 오전 기자회견 중)

대통령 홈페이지에는 매일 당일 기자회견의 속기록을 푼 전문이 공개된다. 지난 3년간 쌓인 방대한 양의 정보와 앞으로 3년 간 쌓일 엄청난 정보가 이곳 멕시코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일단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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