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3 20:15최종 업데이트 22.04.2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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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의 '호남 출신 재벌' 하면 <동아일보> 김성수가 떠오른다. 지금은 많이 잊혀 있지만 현준호(1889~1950) 역시 손꼽히는 일제강점기 호남 재벌이었다.

김성수처럼 현준호 역시 친일파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백서 <친일재산조사, 4년의 발자취>는 친일파 현준호에 대해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를 한 자에 해당"한다고 기술한다.

정규직 갑부 친일파

그가 일제 치하에서 역임한 관직은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만이 아니었다. 광역의회에 해당하는 전라남도 도평의회에도 참여했다. 또 전쟁 협력을 위한 기구에도 가담했다. 전남 특별지원병후원회 부회장, 전남 군사후원연맹 부회장, 국민정신총동원 전남연맹 이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도 역임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도 관여했다. 동족 청년들에게 학병 참여를 권장하는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조선의 자치제도 주장했으나 이는 일제의 미움을 사는 일이 아니었다. 일본제국의 테두리 내에서 자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또 금전도 많이 기부했고, 금 현물도 많이 기부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에 따르면, 1939년 4월 본인 명의로 금제품 26점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기부했고, 다음 달에는 그의 부인이 조선군애국부에 금제품을 헌납했다.
 

책 <무송 현준호> 표지 ⓒ 에코미디어

 
이런 행위들로 인해 상을 많이 받았다. 일본 정부가 주는 상도 받고 총독이 주는 표창도 받았다. 만 32세 때인 1927년에는 다이쇼 일왕(천황) 장례식에 참석할 전남 대표로도 선정됐다. 또 중추원 참의로 일하는 대가로 오랫동안 봉급을 받았다. 이 봉급은 1930년 6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지속적으로 나왔다. '정규직 친일파'였던 셈이다.

조선총독부도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일이 있었다. 일본의 한국 지배에 협력한 일본인명과 한국인들을 소개한 <조선공로자명감>이다. 이 책에도 현준호의 이름이 들어 있다.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갑부 친일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현준호는 동학혁명 5년 전인 1889년에 목포 동쪽인 지금의 전남 영암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이 전라도로 이주한 것은 증조부 때였다. 2009년에 <한국민족문화 35>에 실린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의 논문 '일제시기 호남 재벌 현준호의 학파농장과 자본축적 시스템'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이 가문이 충청도 천안에서 전라도 영암으로 이주한 것은 그의 증조부 때였다.

할아버지 현인묵이 남긴 재산은 3천 석을 수확할 수 있는 농지였다. 이것이 아버지인 친일파 현기봉(1855~1924) 때는 7천 섬으로 불어났다. 현기봉은 금융을 비롯한 여타 분야에도 진출했다. 위 논문은 "광주농공은행 이사를 비롯하여 목포창고금융㈜ 사장, 해동물산㈜ 사장, 조선생명보험㈜ 이사, 조일석감㈜ 감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근대 금융과 산업 경제에 눈을 떴다"고 설명한다.

현준호는 아버지가 확장해놓은 기반 위에서 도쿄 유학 이후인 1920년부터 경영을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그 역시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중에서 그가 주력을 기울인 기업은 호남은행과 학파농장이다.

일본과의 관계가 긴밀해질 때마다

그의 사업은 친일행위와 긴밀한 관련을 띠었다. 사업과 별개로 친일을 한 게 아니라 사업과 일체로 그것을 했다고 해야 정확하다. 간척을 통한 농지 확대가 핵심이었던 학파농장 사업에서도 친일행위가 밑바탕이 됐다. 위의 오미일 논문은 전남을 기반으로 하는 학파농장 경영과 관련해 "조선총독부가 행한 각종 금융 지원과 같은 정책적 지원도 간척 사업의 활발한 시행을 촉진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친일행위는 그에게 또 다른 방법으로도 이익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여타 친일파에 비해 <친일인명사전>에 비교적 길게 소개돼 있는 그의 이력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일본에 협조하거나 일본으로부터 대가를 받은 시기에 그가 새로운 기업의 임원이 되는 장면들을 접할 수 있다.

1933년 3월 그는 조선나(한센병)예방협회에 기부금을 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의 상을 받았다. 기부금을 낸 다음 달, 그는 남조선철도주식회사 취체역(이사) 및 전남수산회 부회장이 됐다. 사상범 전향을 촉진하는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위원이 된 1937년 4월에는 동아일보 취체역 및 경성방직 취체역이 됐다.

1938년 8월에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광주지부장이 됐다. 이로부터 2개월 뒤, 호남제탄주식회사 취체역이 됐다. 뒤이어 전남산업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했다. 1939년 11월에는 유림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는 조선유도연합회에 가담했다. 그달에 그는 경성축산주식회사 취체역이 됐고 다음 달에는 남만방적 감사역이 됐다.

이런 패턴은 그 뒤에도 일어났다. 일본과의 관계가 긴밀해질 때마다 주식회사 임원 명함이 한 장씩 늘어나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친일행위가 직접적으로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도 그의 재산 증식에 기여했으리라는 판단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처벌받지 않은 친일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상태에서 갑자기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해방 3개월 뒤인 1945년 11월에는 미군정에 의해 중추원 참의 파면 조치도 당했다. '정규직 일자리'가 공식적으로 없어졌던 것이다. 뒤이어 1949년에는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입건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1949년 6월 2일 친일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친일파 석방을 요구했다. 6월 3일에는 친일파 시위대가 반민특위를 공격했다. 6월 6일에는 경찰까지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친일청산의 역량은 사실상 무력화되어 갔다.

그런 뒤에 발행된 그해 8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는 "다음 13명에 대하여는 개전의 뜻이 현저하고 또한 증거 불충분 등 정상을 참작하여 불기소 의견을 첨부하여 동일부로 각기 검찰부에 넘기었다 한다"라면서 현준호를 거명했다. 반성하는 뜻이 현저하다는 이유 등이 거론됐지만, 굳이 반성하지 않아도 처벌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친일행위로 인한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그 뒤 그의 집안에는 안 좋은 일들이 많았다. 그 자신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세상을 떠나게 됐다. 딸 셋과 아들 여섯인 그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장남 현영익과 차남 현영직도 6·25 중에 세상을 떠났다.

만 61세로 세상을 떠난 현준호를 뒤이어 가업을 계승한 사람은 셋째아들 현영원이다. 1973년 1월 1일자 <매일경제> 기사 '산업인맥 1'은 "아들 현영원이 외롭게 재건에 힘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영원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학파농장 사업을 이어받는 한편, 신한해운을 세워 해운 사업에도 주력을 기울였다. 1977년 1월 19일자 <매일경제> '해운 청사진 12'는 "현영원 사장은 그동안 다방면의 사업에 종사하면서도 해운 진흥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은 해운인으로 정평을 받고 있다"고 호평했다.

현준호는 친일파로 지목돼 반민특위 조사를 받았지만, 친일행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그의 재산은 그로 인한 타격을 받지 않았다. 후계자 현영원이 유력 기업인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재산이 밑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현준호의 흔적은 강렬했다.

정주영의 그늘 아래로
 

서울 종로구 율곡로 현대그룹 본사 모습. ⓒ 연합뉴스

 
그 흔적은 1980년대 들어 전혀 새로운 운명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현영원이 경영하던 신한해운은 전두환 정권의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에 의해 현대상선에 흡수됐다. 그의 기업을 흡수한 정몽헌 현대상선 대표이사 사장은 장인이기도 한 현영원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현준호의 후계자인 현영원이 주력 기업을 이끌고 현대그룹으로 들어갔으니, 현준호의 흔적이 정주영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준호의 흔적은 또 다른 양상으로도 현대그룹과 관련이 있다. 현준호의 손녀이자 현영원의 딸인 현정은은 남편 정몽헌이 세상을 떠나고 2개월 뒤인 2003년 10월 21일 현대그룹 회장이 됐다. 현대그룹판 왕자의 난으로 인해 그룹이 쪼개져 정주영 회장 때의 현대그룹보다는 현저히 작았지만, 정주영의 맥을 잇는 현대그룹이 현준호의 손녀에 의해 계승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준호의 흔적이 그런 방식으로도 현대그룹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 뉴스타파 화면캡처

 
대학생 현정은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경영 작가 임희정의 <이기지 못할 도전은 없다>에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다. 현정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은 "1975년 초 현대중공업 선박 명명식 있던 날"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이렇게 서술한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4학년에 다니던 현 회장은 당시 신한해운 사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울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한 어른이 직접 가방을 받아주며 안내하기에 그냥 회사 관계자인 줄만 알았다."
 
가방을 들어준 "그냥 회사 관계자"는 조만간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저녁 리셉션에서 그 어른이 정주영 명예회장이란 소개를 받고 깜짝 놀랐다"며 "훗날 각별한 정을 준 시아버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라고 현정은은 그날의 에피소드에 의미를 부여했다.  

현준호의 손녀가 들고 있던 가방이 정주영의 손에 들려지는 이 장면이 연출된 그 이후에, 현준호의 유산 일부가 현대그룹에 들어가고 현준호의 손녀가 현대그룹의 계승자가 됐다. 일제 패망으로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던 현준호의 흔적들이 정주영 및 현대그룹과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운명의 단계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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